2007년은 한국에서, 특히 부산에서 뜻 깊은 해라고 할 수 있다. 금년은 평양에서의 대부흥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 평양에서는 예기치 못한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1903년 원산에서의 기도회, 캐나다 출신이었던 의료선교사 하디의 회개는 부흥의 시원이 되었고, 1904년과 1095년 그리고 1906년 간헐적인 부흥의 역사가 있었지만 특히 1907년 평양에서는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때의 부흥에 대해 선교사들은 ‘한국의 오순절,’ 혹은 ‘한국교회의 재생’이라고 불렀다. 이 때의 부흥과 성령의 역사는 한국교회에 많은 변화를 주었지만 특히 1910년 이후 일제 하에서의 신사참배와 같은 박해를 이기게 만들어간 힘의 원천이었다. 1907년 대부흥의 역사는 한국의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고 국경을 넘어 만주지방으로까지 전파되었다. 많은 이들이 부산에서도 부흥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부산에서는 부흥이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흥 100주년을 맞는 금년에는 부산에서도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기도해 왔다. 100년 전 부흥은 평양에서 시작되었으나 오늘의 부흥은 부산에서 시작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왔는데, 이번에 부산에서 프랭클린 그래함 페스티발을 개최하게 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함 페스티발의 부산 개최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부산은 한국에서 제2의 도시이자 가장 큰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말할 때 부산은 선교사들이 입국했던 첫 항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기독교 인구는 한국의 대 도시 중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도시이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는 1천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20%에 달하지만 부산의 기독교인구는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현실이 전도집회 개최의 의의를 더해 준다. 부산은 항구도시로서 해안성 미신이 많은 곳이다.

많은 이들은 기존의 토착종교로부터 개종을 두려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은 타 지역에 비해 불교세가 강한 지역이다. 부산의 불교인구는 약 120만 명으로서 전체인구의 35%에 달한다. 부산의 종교인구 70%가 불교신자로 알려져 있다. 또 부산은 일본과 인접해 있는 관계로 왜색종교의 영향이 컸고 이러한 이 지역의 종교적 배경은 기독교의 수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부산은 전통적으로 덜 개방적인 보수적인 도시였다. 평양은 개화지향적이었고, 유교의 영향력이 높지 않았지만 부산은 유교적인 영향이 크고 보수적인 도시였다. 초기 선교사들이 이런 지역적 특성을 지적한 바 있다. 대표적인 한 사람이 1891년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에서 활동했던 마포삼열(Samuel Moffett)이었다. 그는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는 여러 도시와 읍내와 마을에서 지금까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또 우리는 사람들이 더 알기를 열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한문성경과 우리 전도인들을 통해서 순수한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북쪽의 국경지방은 백성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전혀 반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어 있다.” (S. Moffett, Letter to FMB, PCUSA, dated may 21, 1891.) 그러나 부산지방에서 일했던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William Baird)의 보고는 달랐다.

1892년과 1893년에 걸쳐 몇 차례 전도여행을 다닌 그는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1892년에 쓴 보고서에서, “이 경상도지역의 한국인들은 진리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지만 돌작밭에 떨어진 씨와 같아서 그것은 곧 말라 버릴 것이다. 거기에는 듣는 자는 많으나 믿는 자는 적다” 북장로교선교부 연례보고서(1892, 175.)고 이 지역민들의 복음에 대한 냉담함을 지적하였다. 이런 부산지방의 보수적 전통은 지금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부산에서 전도집회가 개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100년 전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이 부산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기를 기도한다.

34년 전 서울에서 있었던 빌리 그래함 집회는 한국교회사에 주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 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서울 집회에 3일간 참석했다. 그때 모인 인원은 약 100만명(연인원 32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처럼 많은 인원이 한자리에 모인 집회를 나는 보지 못했다. 이 때의 집회는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최대의 인원이 동원된 집회였다. 이때의 집회가 특별한 의의를 갖는 것은 회집인원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 때의 집회가 한국 기독교의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된 후 첫 10년(1884-1894)은 ‘고투의 시기’였다. 1890년 당시 세례 받은 신자는 155명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895년부터 기독교회로 들어오는 이들이 현저하게 증가했다. 이것은 청일전쟁(1894-5)을 경험한 후 기독교를 매개로 서양문물을 받아드리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기독교는 이런 필요를 채워주었다. 그러다가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1903년 부흥의 기원을 경험했고, 1907년 한국교회는 대부흥을 경험했다. 이때부터 한국기독교는 꾸준히 성장해갔다. 그래서 1945년 한국이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당시 기독교신자는 약 30만명으로 추산된다. 1960년대 박정희대통령의 성장주의 경제정책과 함께 한국교회가 큰 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1955년에는 약 60만 명이었으나 1965년에는 약 110만 명으로 증가하여 10년 만에 100% 성장을 이루었다.

빌리 그래함 대회가 열릴 당시 한국 개신교 인구는 300만으로 전체 인구의 11%였다. 그런데 1973년 빌리그래함 대회 이후 한국기독교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1975년에는 약 400만 명, 1980년의 경우 정부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 신자가 760만 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는 매 10년마다 배가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하루에 6개 교회씩 설립되는 것으로 보고되기도 했다.

수적으로 말하면 1970년대 이후에는 매년 60만 명씩 증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료가 정확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국교회의 성장은 아아(아시아·아프리카)제국의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점이다. 그래서 주한 선교사였던 쉬리어(Roy Shearer)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번져가는 불길’ 곧 요원지화(燎原之火, wildfire)라고 불렀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집회는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부흥 혹은 성장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 집회를 통해 결신한 자는 10만여명으로 집계되었고, 기 신자들의 신앙의 심화와 헌신이 나타났다. 내가 아는 박혜림이라는 청년은 이 집회를 통해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했고, 그는 그 결단에 따라 태국, 필리핀에서 17년간 사역한 후 지금은 미국 나사렛교단의 아시안 미니스트리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한국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민족 복음화의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민족복음화 운동을 이끌어 가는 동력이 되었다.

한국기독교는 스스로가 한국사회에서 큰 변화의 모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그 이후의 교회성장의 결실로 나타났다. 이 때의 집회가 가져온 또 하나의 결과는 김영재 교수의 지적처럼 복음주의 운동이 서서히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아시아연합신학대학(ACT)은 이런 흐름에 따라 복음주의 운동과 선교를 위하여 1974년 설립되었다.

1978년에는 한철하, 김준곤, 박조준 등에 의해 한국복음주의협의회(KEF) 조직을 위한 준비모임이 시작되어 1981년 5월에는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복음주의 운동은 그 이후의 한국교회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고, 그 결실이 1980년 대 말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The Christian Council of Korea)의 조직으로 나타났다. 또 빌리 그래함 집회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전도와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빌리 그래함 대회가 가져온 중요한 발전이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 강승삼 대표의 지적처럼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선교사는 불과 15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실 이 때까지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에 대한 관심이 미미했다. 그러나 이 전도 집회 이후 한국교회는 선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선교를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970년대 말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관심 높아졌고,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현재 한국교회는 173개국에 16,6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1973년 빌리그래함 집회 이후 34년 만에 열리는 부산 그래함페스티발에 대한 기대가 높다. 지난 1월 부산 사무국이 설치된 이래 여러 가지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고, 특히 이를 계기로 부산지방에서 교파간, 교회간 연합이 이루어지고 있고, 새로운 부흥의 물결이 일고 있다.

부산의 여러 교계지도자들이 이 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지만 총괄총무로 이번 행사를 주도하는 온천교회 안용운 목사와 여러 실무자들의 수고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지금 부산에서는 1907년, 1973년에 이어 제3의 부흥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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