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11월 16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대학교에서 열린 제2회 소그룹목회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이문식목사의 발표글이다. -코닷-


1. 초대교회의 소그룹 목회

▲ 이문식 목사(광교산울교회)

사도 바울은 교회를 말할 때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 공동체를 주로 오이코스(οίκος) 혹은 오이키아(οίκια)라고 불렀으며, 이 기초 단위의 소그룹 가정 공동체를 포괄한 지역공동체를 에클레시아(έκκλησία)라고 불렀다.

고린도에는 아마도 여섯 개 내지 열 개정도의 소그룹 가정 공동체가 존재했다. 그것은 그리스보의 집(18:8), 스데바나의 집(고전 1:16, 16:15~18), 글로에의 집(고전

1:11), 겐그리아의 뵈뵈의 집(16:1~2), 에라스도의 집(16:2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고전 16:19), 가이오의 집(16:23) 등이다.

또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다른 모임들 즉, ‘아리스도 불로의 권속’(16:10)이나 나깃수의 권속 중 주안에 있는 자들’(16:11) ‘아순그리도와 블래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16:14),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16:15)들로 지칭되는 모임들에는 바울은 의도적으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 이 모임들은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그 전단계의 기초공동체인 오이코스 공동체, 즉 소그룹 가정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한 지역 내의 여러 소그룹 가정 공동체(οίκος)들이 가이오의 집과 같은 곳에 함께 교회(έκκλησία)’로 모여 성찬과 가르침과 기도와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오이코스 공동체의 연합이든지, 아니면 오이코스 공동체가 조직화된 결과로서의 교회(έκκλησία)’를 사도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16̈:5 τὴν κατ, οι'κον αύτω'ν έκκλησίαν), ‘눈바의 집에 있는 교회’(4:15, τὴν κατ, οι'κον αύτη'ς έκκλησίαν), ‘빌레몬에 있는 집에 있는 교회’(1:2, τη'ν κατ, οι'κον σου έκκλησίαν)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에 있는(카토이콘(κατ, οι'κον))’이라는 표현은 가족적 연대성뿐만 아니라, 지역적 모임의 중요성을 내포한 표현이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교회라는 용어를 개인 후원자가 장소를 제공하는 집(오이코스), 그리고 그 가족공동체 혹은 권속과 연관하여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지역과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모인 공동체를 언급하며 사용하였다. ‘겐그리아에 있는 교회’(16:1), ‘고린도에 있는 교회’(고전 1:2, 고후 1:1),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4:16),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살전 1:1, 살후 1:1)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런 측면에서 가정에서 모인 소그룹 공동체(오이코스 공동체)는 혈연적 가족공동체(family)일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확대된 가족인 권속공동체(household)이며, 동시에 이것이 함께 교회(성전공동체)로 지어져 가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2:19~22)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지체와 몸의 비유를 통하여 그 당시 서로 잘 연합하지 않았으며 서로 독립되어 있었던 이 가정 공동체들이 잘 연합된 지역교회(로마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6장에서 이 각 가정 공동체들로 하여금 서로 문안하라고 권면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도의 일환이다. 바울의 이 소그룹 가정 공동체들을 향한 최종 권면도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살피고 떠나라는 것이다.(16:17)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과 지체의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서로 같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고전 12:25) 그리고 이 몸과 지체의 연합을 위해 각종 직분자(사도, 선지자, 교사)를 세웠다고 강조하며(고전 12:26), 이 직분자들이 그들의 은사를 사용하는 제일 좋은 길은 바로 사랑이라고 강조(고전13)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역교회의 연합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언과 방언의 은사도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고전 14:1)고 재삼 강조하며,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구하라’(고전 14:12)고 권면하는데 이처럼 바울은 소그룹 가정 공동체가 온 교회로 연합되기를 간절히 구했던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몸과 지체의 비유로 강조된 교회의 본질은 한마디로 유기적 연합인 것이다.

소그룹 가정 공동체에게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발성과 개체성이 생성되나, 그것이 결코 독립성이나 분파성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교회의 통일성(the unity of church)의 원리(고전1:10)가 아주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 초대교회 소그룹의 목회적 특징

홍인기 교수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역 교회들은 모두 가정교회라고 주장하며, “가정교회는 평등과 화해의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그는 초대 교회 소그룹 가정 공동체의 목회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열거한다.

1) 복음에 참여하는 공동체

2)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성도

3) 평등 공동체

4) 화해 공동체

5) 통합 공동체

이후 이와 같은 소그룹 가정 공동체의 특징과 장점은 교회가 역사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점차 상실되어져 갔다고 홍인기 교수는 주장한다. 그 결과 교회를 성도의 모임이 아니라 건물로 이해, 성직자 계급제도의 등장으로 인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예배에서의 성직자 중심주의와 평신도의 관객화, 예배와 삶의 분리,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의 의식(ritual), 개인주의화 등의 폐해가 발생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가 초대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 목회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한다.

오늘날 로버트 뱅크스 같은 가정교회 운동가들이 교회를 가정교회에 기반을 둔 회중(Congregation based on Home church)’으로 정의하며10), 교회의 기초공동체로서 가정을 강조한 것은 아주 중요한 통찰력인 것이다.

신약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고 하였으며, 대위임령에서도 선교적 매개 단위로 모든 족속을 강조한 것은 기독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기초관계가 가족(family)이며 권속(household)인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 구속역사의 진행은 일반은총적인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혈연관계를 무시하지 않고 이뤄지는 것이다. 따라서 소그룹 공동체 목회는 가족(family) )과권속(household)을 기반으로 하여 구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구속의 경륜에 일치하는 것이다.

 

. 다양한 소그룹 목회의 패러다임

1) cells in the church

교회의 기초 공동체인 의 성격에 따라 그 몸의 본질이 규정된다.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셀들이 나눔 셀’, ‘양육 셀’, ‘치유 셀’, ‘ 전도 셀’, ‘선교 셀인지에 따라 개교회 공동체의 특성이 형성된다. 이런 셀들을 다양하게 그 은사와 성숙정도에 따라 구성하여 모자이크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목회하는 소위 무지개 목회가 있다. 이런 무지개 목회는 은사의 다양성을 살리는 장점과 함께 다양한 영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목회적 포괄성이 드러난다. 다만 개인의 은사와 관심에 따라 셀이 구성되게 됨으로 가족의 연대성 보다는 개인을 바탕으로하여 셀공동체가 형성된다는 점이 약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역을 중심으로하여 공동체가 형성될 뿐,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공동체가 형성되는 데에 부족함이 생긴다. 특히 교회가 현대사회이 문제인 개인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공동체적 한계를 드러낸다.

2) cell-churchs in the church

이 모델은 소그룹 목회 공동체가 그 자체적으로 교회로써의 개체성과 독립성을 강화, 혹은 확보한 모델이다. 한 지역교회의 대부분의 사역이 바로 이 소그룹 목회공동체(cell church)의 사역과 기능에 위임되어 있다. 지역교회에서의 사역은 이 작은 소그룹 교회들을 연합시키고 하나 되게 하는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주일 예배도 소그룹 교회 연합예배의 성격을 갖게 되고, 연합행사는 모두 공동체 축제로써의 큰 모임을 지향한다. 반면 소그룹 목회 공동체(cell church)는 오로지 성도의 교제, 불신자 전도, 새 신자 양육, 제자(소그룹 목회지도자) 양성 등 기초 공동체 재생산사역에 모든 초점을 맞춘다. 이와 같은 특성은 교회로 하여금 셀 공동체를 매개로 하여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에 충실하게 하는 효과를 갖고 온다. 특히 이'cell church'들을 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할 때에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적 특성을 다시 회복하게 됨으로 교회의 공동체성과 창조적 연대성이 강하게 연합하는 특성을 나타낸다. 최영기 목사의 가정교회가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3) One cell house church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 공동체 자체가 독립적인 교회인 모델이다. 최근의 한국교회의 대안 목회중의 하나로 떠오르는 작은 교회 운동은 점차 이 모델을 향하고 있다. 한 사람의 목사가 일종의 대가족 신앙 공동체를 목회하는 모델이다. 이때에 목사의 이중직에 대해서도 온교회가 열린 자세로 접근하게 되며, 또 목회자를 통해서 드러나는 특정 은사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전문성도 갖게 된다. 이 모델은 교회의 다양성은 상당히 약화되는 약점은 있으나 전문성은 오히려 강화되어 심도 깊은 영적 돌봄과 치유와 나눔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장애인 선교, 혹은 전문인 선교, 혹은 여러 형태의 특수 목회에 아주 유효한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One cell house church’는 초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소그룹 공동체 목회의 가장 원형적인 모델이다.

특별히 누구, 누구 집에 있는 교회(16:5, 고전 16:19, 4:15, 1:2)’라는 표현은 관련된 가족들이 한 가정에서 모이는 집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지역교회로 전체가 다 하나로 모이는 집회’(16:23, 고전 14:23)와는 구별해야 한다.11) 사실 가정교회는 기독교 운동의 기본세포(basic cell)’이며, 그 핵은 실존하는 가족(family)’이다.

이러한 초기기독교의 가정교회의 특성은 결속성, 개방성, 선교성, 중계성, 계승성으로 파악된다.

방선기 목사의 ‘House church’와 홍인규 목사의 가정교회가 대표적인 예이다.

4) cells in the community

이 소그룹 공동체 모델은 지역사회와의 연대를 통하여 선교적 공동체를 이루는 유형이다. 위에서 언급한 1), 2), 3)의 모델이 교회의 선교(Missio Ecclesia)’모델인데 반하여 4)의 모델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모델이다. 개교회 주변의 지역 사회의 필요를 채우는 지역 공동체를 그리스도인들 중심으로 세우되 지역사회의 공공선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이루어 나가며 지역 주민들과의 친밀성, 연대성, 공동체성을 이룸으로써 복음을 총체적으로 전파하는 총체적 선교(Wholistic Mission)모델이다. 그 성경적 예로 초대교회의 가정 노예에 대한 태도를 들 수 있다.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노예는 영혼이 있는 도구’(아리스토텔레스)로 정의되는데 반하여, 초대교회는 도망 노예인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라고 칭한다. 이는 당시의 노예제도하에서는 거의 혁명적인 권면이며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극복하는 놀라운 인권 선언이다.(1:16) 초대 교회의 소그룹 목회 공동체의 등장은 당대의 가정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초대교회 소그룹 공동체야 말로 주후 1세기부터 3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지중해 연안 문명을 기독교 문명으로 탈바꿈시킨 아주 중요한 요인이었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노예마저도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인 사랑에 의해 그 사회적 한계를 혁명적으로 뛰어넘어 자유하게 하는 사회 문화적 역동성을 창출한 것이다.

예원교회(정성규 목사)아둘람 공동체가 바로 이런 초대교회의 가정을 매개로한 소그룹 목회 공동체의 선교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 이 모델은 지역의 필요성을 먼저 살피고 그것에 반응하는 선교공동체를 지향함으로써 지역 NGO들과도 연대하여 지역사회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뿐만 아니라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전 지구적 지역공동체 선교모델을 재생산하는 것(Glocalization)을 지향한다.

 

제안

한국교회는 기존 제도적 교회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초대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소그룹 목회 공동체를 다양하게 각 교회의 형편에 맞추어 재구성 하여야 한다. 특히 소그룹 목회 공동체는 가정을 기초공동체로 삼아 하나님의 권속 공동체로 확대 재구성하여 지역사회 공동체와 깊이 연대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그 역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는 선교적 공동체로 거듭나야한다. 이를 위해 좀 더 다양한 혁신적인 실험과 개척정신을 가지고 소그룹 목회 사역을 심화 발전시켜야한다.

 

- 존 칼빈의 교회론과 소그룹 목회

칼빈은 개혁의 이상으로써 초대교회를 지목하였다. 그는 초대교회를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교회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칼빈은 교회의 전통에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종교사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특별히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칼빈의 교회관은 가장 고교회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13) 일반적으로 교회를 성도의 모임(communio sanctorum)'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루터로부터 온 개념이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교회는 '신앙인의 공동체(community of the saint)'일 뿐만 아니라 그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재정하신 하나님의 기구(Institution)’임을 더욱 강조했다.(기독교 강요 4, I, 5) 즉 칼빈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역점을 두는 공동체의 개념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보전하기 위해서 제정하신 기구로서의 교회 개념을 훨씬 더 우선시 하였다. 따라서 칼빈의 교회론은 루터의 교회론이나 재세례파의 교회론 보다 더 훨씬 더 하나님 중심적이며, 고교회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그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칼빈은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교회는 다만 외적인 설교를 통하여 형성될 뿐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배우고 협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교회질서를 지킴으로써 그들의 모임을 함께 유지할 뿐이다.’(기독교강요 4, 1, 5)고 하였다. 즉 성도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공동체)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교회의 질서를 지키는 것뿐이라는 것이 칼빈의 강조점이다. 또 그는 교회를 우리가 일생동안 다녀야할 학교라고도 한다.(기독교강요 4, 1, 4.)

이 거룩한 하나님의 기구인 교회의 징표는 말씀과 성례이다.

특별히 칼빈의 교회론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설교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말씀은 언제나 성례에 선행하는 것이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설교할 때에 성례를 올바로 시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 말씀과 성례는 교회의 중요한 두 표지이지만 이 둘은 진정한 의미에서 동등한 것이 아니고 언제나 말씀이 성례에 앞서는 것이다. , 말씀의 외적인 징표(symbol)가 성례인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세례와 성찬을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Symbol of Covenant)로 이해한다.(기독교강요 4, 14, 1)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말씀과 성례 이외에 어떠한 제3의 징표를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은 아우그스브르그 고백서에서도 재확인된다. 다만 이후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 18조와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 29조에서 '권징'을 교회의 세 번째 징표로써 들고 나왔는데 이것은 후대의 교리적 발전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15)

칼빈의 교회는 직분’, 특히 목사직을 중심으로 한 교회이다.

칼빈은 목사직을 교인의 공동체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본다. 이 칼빈은 교회란 목사라는 직분자를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을 기초하여 성립되는 거룩한 기구라고 봄으로써 당대의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직분중심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관점은 그가 해석한 에베소서 4:11의 주석에서 돋보인다. ‘목사와 교사의 직분이 없으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교사가 목사와 다른 점은 교회의 권징이나 성례를 집행하지 않는다는 차이에 있다고 하였다. 칼빈은 장로와 목사를 직분상 동등한 관계로 보았으나 직무에 있어서는 분명히 차이를 두었다. 그는 목사직이 교회의 전체적인 활동을 포괄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직분은 목사가 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본다. , 장로의 직무는 목사 없이 수행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장로는 설교에 관한 권한이 없다. 설교권(강도권(講道權))을 부여받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교회에서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다.

이와 같은 칼빈의 교회론의 특징을 고려해 볼 때 장로교회 체제 안에서는 소위 소그룹 목회 공동체는 교회(έκκλησία, Ecclesia)안에 있는 성도들의 작은 모임(공동체)으로써 '오이코스(οίκος, Oicos)'의 성격이 분명하다. 따라서 소그룹 목회 공동체를 교회안의 작은 교회로 볼 수 없다. 다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기능을 하는 '기초공동체(Oicos)'일 뿐이다. 또 동시에 소그룹 목회 공동체의 리더는 그 명칭(구역장, 순장, 혹은 목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결코 직분이 아니다. 다만 역할 혹은 사역을 나타내는 기능적 명칭일 뿐이다.

사실 제네바에 있던 칼빈의 교회에는 교구 목회 사역은 있었어도, 소그룹 목회 사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목사와 함께 동역하는 장로들이 소위 교구장의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개혁파 장로교회의 전통에서는 평신도 사역자들에 의한 소그룹 목회 사역은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소그룹 목회가 주로 침례교와 감리교, 오순절 교회에서 활성화 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오이코스 공동체의 장점은 교회의 기초 공동체로써 교회의 모든 본질적인 기능을 가장 근본적으로 수행하는 기본세포(basic cell)를 활성화시킨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교회갱신운동에 있어서 제도를 바꾸는 여러 조직 개혁운동과는 달리 교회의 내용(content)과 기능(function)을 새롭게 하는 운동이다. 제도로서의 몸의 구조를 바꾸는 하드웨어 중심의 개혁이 아니라 지체의 기능과 기본세포의 생명력을 활성화 시키는 소프트웨어 중심의 교회갱신운동이다. 이것은 교회의 제도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새롭게 하는 특성을 갖는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칼빈의 교회론은 그 놀라운 장점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공동체성을 소홀이 한 측면이 있다. 지나치게 기구론적이고 직분 중심적인 칼빈의 교회론은 자칫 잘못 운영되면 제도만 있고 사역이 없는, 혹은 직분만 있고 역할이 없는 무미건조한 관료주의적 고교회로 전락할 수 있다. 따라서 지난 400년 동안 장로교 역사 속에서 장로교회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많은 보완적 노력을 행하였다. 구역장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나 영수 혹은 권사 직분을 인정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최근에는 목장이라는 제도나 목자라는 역할을 옛 구역이나 구역장을 대체하여 사용하는 경향도 있다.

한국장로교회가 소그룹 목회를 수용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우리는 먼저 그 목회 실천적인 측면에서의 유용성을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자세히 살펴보고 난 후, 우리 장로교회의 신학과 전통에 비추어 창조적 수용 혹은 비판적 수용을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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