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캠벨 박사 '목회자 세미나' 1강의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일까? 찰스 캠벨 박사(콜럼비아신학대학원 피터마샬 설교학 석좌 교수)는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하여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캠벨 박사는 목회자신문사가 최근 ‘부흥하는 설교에 도전하라’는 주제로 주최한 세미나에서 주강사로 나와 “목회자들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죄와 죽음권세로부터 사람들과 공동체들이 해방되었음을 선포하는 구속의 말씀(a redemptive word)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캠벨 박사가 동숭교회에서 500여 명의 목회자들 앞에서 강연한 2가지 강의안을 전재한다. 번역자: 임병호(장신대 신학박사과정) <편집자 주>


교회를 세우는 설교: 비전, 실천, 설교
(Building Up the Church: Vision, Practice, and Preaching)

찰스 L. 캠벨(콜럼비아신학대학원 피터마샬 설교학 석좌 교수)

   
이미 출간된 저서들을 통해 저는 설교의 근본적인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왔습니다. 신약, 특히 바울의 글들에서 ‘교회 세우기’는 깊이 있고 다방면의 수고가 요구되는 활동으로 소개됩니다. 저의 책 Preaching Jesus로부터 많은 인용을 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세우기”(building up, 헬라어: oikodomein)와 관련하여 몇몇 중요한 측면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교회 세우기’란 설교의 신적, 인간적 측면을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힘과 성령의 활동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일컫는 말이지요.

하지만 ‘교회 세우기’는 설교자를 포함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부여받은 믿음의 공동체에게 맡겨진 일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저는 주로 설교자의 일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물론 오이코도메인(oikodomein)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점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 세우기가 인간의 일인 동시에 하나님의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로 ‘교회 세우기’는 믿음의 공동체에 초점이 맞추어진 말입니다. 여기에서 주된 관심사는 개개인의 필요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하나님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친히 세우시는 주체이십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 이 세상에 또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시는 예수님을 드러내고 증거합니다. 우리의 설교는 그러한 사람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설교로 넘어갈 때 주로 물어야할 질문은 ‘성령님은 교회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가?’라는 겁니다. 이러한 나의 접근방식은 개인의 필요에 주된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들에게 커다란 변혁을 요구합니다.

세 번째로 oikodomein은 종말론적 측면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의 활동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속으로 침노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새 창조를 받아들이고 또 장차 성취될 것들에 대해 열망하는 구별된 사람들을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교회를 세우는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했고 또 임할 새로운 시대의 활동입니다. 그러한 설교는 따분하거나 질적으로 떨어지거나 단지 교육적 차원의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설교는 새롭고 흥미진진하고 놀랍고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oikodomein은 가족(household, 헬라어: oikos/oikia)과 밀접하게 연관된 말입니다. 가족은 신약 시대에서 중요한 사회적, 경제적 공동체였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초대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고 자연스럽게 가족들 간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측면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 세우기는 단순히 영적인 문제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그것은 분명한 사회적 상규에 따라 구체적이고 공식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은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행위도 경제적인 행위와 연관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식사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부자들과 빈자들 사이에 생겨난 새로운 관계의 실체적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행위는 교회를 세우는(oikodomein) 데 있어 하나의 통합적인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오이코도메인’으로서의 설교는 풍성하고 도전적이고 흥미진진한 행위입니다. 오늘 나는 설교를 통해 교회를 세우는 행위가 두 가지의 특별한 측면들을 포함한다고 말하려 합니다. 즉 신학적 비전과 윤리적 실천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차원의 설교를 가장 크게 발전시켰던 바울은 이 두 측면들을 일관되게 붙들었습니다. 바울의 신학적 비전에 대해 학자들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해왔습니다. 바울의 비전에서 새로운 창조는 기존의 세상을 침노하여 들어와 우리를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초대합니다.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로, 새로운 인식론을 가지고 바라보게 합니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이 인간의 지혜와 힘을 월등히 능가합니다. 신약학자인 찰스 카우저(Charles Cousar)의 말을 빌리자면, 바울은 “상상력이 변하지 않고 비전의 각도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행위는 결국 피상적으로만 바뀔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우리에게 새롭고 급진적인 신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바울은 동시에 그 비전을 윤리적 실행과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의 서신에서 바울은 신학적 비전으로 시작하여 공동체적 삶을 묘사하는 쪽으로 방향을 옮겨갑니다. 즉 교회로 하여금 그 비전을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하여 구체화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고린도전서만 놓고 보아도 그는 실로 막대한 양의 행위들을 언급합니다. 그는 신자들의 은사 사용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합니다. 그는 식탁 예절, 믿음의 훈련, 예배, 물질의 사용, 청지기로서의 삶에 대해 언급합니다. 바울에게 있어 신학적 비전과 윤리적 실천은 항상 맞닿아있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 역시 바울과 동일한 두 측면, 즉 신학적 비전에서 윤리적 실행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가운데서 구별되고 선택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시고자 합니다. 그분은 설교 내내 비전과 행위를 함께 강조합니다. 고전 5:3-12에서 설교는 팔복(Beatitudes)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세상 속으로 침노해 들어오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비전을 제공합니다. 팔복(Beatitudes)은 윤리적 요구라기보다 종말론적 복입니다. 8복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선언했을 때, 예수님은 지배와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 다시 말해 화평케 하는 자들이 일반적으로는 ‘복 받은 자’라고 불리지 않는 세계를 향해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상 속으로 침노해 들어오는 새로운 현실에 대한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그 새로운 현실 속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한 비전 제시를 통해 예수님은 믿음의 공동체로 하여금 세상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는 우리가 세상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통해 바라볼 수 있도록 초청합니다. 그 이야기는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가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설교의 두 번째 부분(5:13-16)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아닌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직설법적인 동사들과 두 개의 강한 비유(소금, 빛)를 사용하여 예수님은 명령이 아닌 비전으로 포문을 엽니다. 그는 공동체로 하여금 자신과 세상 속에서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돕습니다. 그는 공동체를 향해 ‘거하는’ 비전 즉, 세상에서의 삶을 구현해가는 비전에 대해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세상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설교의 나머지 부분을 공동체의 삶, 다시 말해 비전을 추구하는 삶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들을 묘사합니다. 비전과 비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일단 새로운 창조가 비전으로 제시되었다면, 이어서 세상 속에서 그 비전을 이루고 지속하기 위한 공동체의 구체적 행위들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시각을 구체화하고 강화시켜주는 행위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예수님은 그의 설교에서 방대한 양의 행위들을 언급합니다. 새로운 비전의 공동체에서는 화해의 행위가 복수보다 우선하고(5:21-26) 여성들은 더 이상 물건이나 재산으로 취급되지 않고(5:27-32)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와 비폭력적인 저항이 폭력적인 지배 행위를 대체합니다(5:38-48). Walter Wink가 강하게 주장했듯이, 5:38-42의 행위들(뺨 돌려대기, 겉옷 벗어주기, 십리 동행하기 등)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저항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행위들(자선, 기도 등과 같은)은 우월감이나 경쟁심을 조장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부를 축적하는 행위 역시 거부됩니다(6:19-34).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폭넓게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한 공동체의 실천 사항들을 명시합니다.

예수님의 설교와 바울의 서신처럼 신실한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현대 설교는 이 두 측면들 즉, 신학적 비전과 윤리적 행위를 잘 접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남은 강의에서 나는 우리가 설교에서 비전과 행동을 통합할 수 있는 몇몇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비전과 관련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설교의 가장 기본적인 어려움들 중 하나는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상상력, 즉 교회의 비전을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는 사람들이 성경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도록 돕기 위해 노력합니다. 즉 세상의 살벌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시각을 바꾸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설교자들이 취하는 방법들 중 하나는 재기술(redescription)입니다. 즉 우리는 설교 속에서 세상을 재기술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새로운 방식으로 사건과 정황을 바라보도록 유도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설교자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설교 중에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금요일 밤에 걷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설교자는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남편과 나는 음악회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 이윽고 우리는 우리의 거처가 있는 아파트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건물 한쪽에는 못 보던 부속물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빌딩 뒤에 있는 대형 쓰레기통 입구를 쇠사슬과 자물쇠로 봉해놓은 겁니다. 그 이유는 명백했습니다. 무언가 값나가는 물건이 없는가 하고 쓰레기통을 파헤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쓰레기통 주변을 더욱 지저분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행동했기에 범인을 밝혀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자물쇠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최선의 도구이자 탁월한 대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문득 나는 성경에 나오는 부자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 부자는 매일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반면에 그 집 문턱에는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가 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부자는 고정된 자기 자리에서 밥을 먹었고 나사로는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하고 기다렸습니다. (만약 나사로가 오늘날 우리 집 근처에 살았다면) 혹시 쓰레기통에서 알루미늄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무언가를 던져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다 알고 계실 겁니다. 부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아주 의미심장하고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 이야기로 인해 나는 내가 목격한 일(역주/ 쓰레기통 사건)에 대해 그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나사로 때문에 나는 조용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설교자는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상황을 재기술합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냉혹함, 배타심, 탐욕에 대해 그녀는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즉 우리가 부유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타인을 포용하고 함께 나누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는 세상에 대해 재기술함으로써 회중으로 하여금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귀중한 방식입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이러한 시적 혹은 예언자적 재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시인/예언자는 고정된 현실을 흔들어 깨워서 회중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을 불러일으키는 . . . 소리이다. 설교란 그런 식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일이다. 비록 그 일이 쉽지 않을 지라도 말이다. 본문에 대한 시적 표현과 설교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의 일들을 예언자적으로 해석해내는 일이다.”

우리가 회중에게 비전과 상상력을 고취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대한 생각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크고 극적인 그림들을 회중의 마음속에 그려 넣는 작업입니다. 회중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상상력을 잊어버리거나 상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성경의 예언자들은 때에 따라 이미지 그리기를 시도하였습니다. 익숙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6-9)

또한 요한계시록이 가장 장엄한 비전들 중 하나로 성경의 끝을 맺는 것 역시 매우 인상적입니다. 제국에 의한 핍박과 나라 상실의 고통에 직면한 상황에서 계시록을 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1-4)

때때로 우리 설교자들은 회중에게 큰 그림들, 거대하고 극적인 비전들을 제시함으로써 회중의 상상력을 자극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미래가 아니라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새로운 창조로부터 상당한 통찰력을 얻게 되는데 이것을 회중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년 전 노동절 연휴가 지난 직후 어느 날 나는 애틀랜타의 한 지하철역에서 열차를 기다라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에 만난 적이 있는 한 노숙자가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며 옆에 섰습니다. 그는 나에게 자기의 이름이 마이클이라고 되새겨주었고 우리는 이내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이클은 열심히 직업을 찾고 있으며 하나님이 여러 방법으로 자신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잠시 후 열차가 도착했고 우리는 함께 탑승하여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대화 도중 문득 나는 노동절에 어디에서 점심식사를 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애틀랜타에서는 노동절에 많은 봉사단체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노숙자들은 끼니를 해결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는 나에게 ‘910 (Open Door Community의 약어, 노동절마다 약 400명의 사람들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하는 기독교 봉사단체)’에서 식사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며 마이클은 눈을 크게 뜨고는 그 식사에서 대접받은 강낭콩이 얼마나 컸고 옥수수 빵이 얼마나 두꺼웠는지를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옥수수 빵의 두께를 설명할 때는 엄지와 검지를 최대한 벌려서 그 두께를 실감나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을 때 나는 그곳에서 몇 명이나 식사를 함께 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모든 사람이 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수 천 명이요.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몰려왔어요. 정말 수 천 명이나 되었어요.”

사회성과 도덕성의 해이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마이클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은 강낭콩과 옥수수 빵을 구세주가 베푸신 만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노숙자들을 종종 비하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사회 속에서 마이클은 노동절 식탁을 대하며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예수님의 성만찬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평화롭게 함께 먹고 또 온 세상은 기뻐하며 즐거이 외치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과 창조의 비전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마이클은 말씀(the Word)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는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권세를 알렸습니다. 그는 영광스런 기독교 예배의 비전 안에서 말씀과 성례전을 결합하였습니다. 그는 우리 설교자들에게 그러한 비전을 품도록 도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이미 침노해 들어온 새 창조의 통찰들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회중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비전 제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비전은 반드시 행위와 동반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해하기로 행위는 비전에 의해 형성되는 구체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습관적인 활동입니다. 행위는 또한 기독교의 비전을 튼튼히 유지시키는 데 도움을 줍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훈련을 요합니다.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실행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위대한 음악가는 음악을 통해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비전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 비전은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수도 없이 악보를 수정하는 작업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예술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전과 행동은 늘 함께 가야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새벽기도를 생각해봅시다. 매일 아침 6시만 되면 콜롬비아 신학교의 한국 학생들은 새벽기도회를 갖습니다. 솔직히 말해 대부분의 북미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행위는 동참하기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상상하기에도 힘든 일입니다. 일찍 일어나서 그렇게 이른 기도회에 나간다? 오전 6시에 그것도 매일?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이 있는 사람들만이 매일 6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그러한 기도의 행위는 비전을 확고히 하고 구체화하는 데 일조합니다. 매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안목과 자세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즉 비전과 행동(practice)은 함께 갑니다.

따라서 설교란 사람들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올바로 살아가도록 훈련과 실천의 필요를 촉구하는 일입니다. 즉 설교의 비전과 상상력은 공동체의 구체적인 실천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설교자들은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제자의 도(discipleship)를 연습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이처럼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신실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오이코도메인’으로서의 설교에서 설교자는 세상에 대한 신학적 비전을 제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비전을 구체화하고 성장시킬 윤리적 실천을 강조해야 합니다.

실천으로 이어지는 설교의 움직임은 현대 북미 설교학계에서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설교 이론들은 주로 설교의 말미를 열린 상태로 내버려 두어서 개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복음을 경험하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들입니다. 넌지시 간접적으로 말하는 방식이 득세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하는 대화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설교자들은 회중에게 어떤 요구나 주장을 하기보다 열린 대화의 자세를 갖도록 요청받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대 설교학의 강조점들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보다 인간의 규칙들이나 행위를 우선시하는 도덕적 설교는 복음에 반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러한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인간의 노력과 성취로 변질시킵니다. 또한 현대 설교 이론들은 설교자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회중에게 강요할 가능성에 대해 경종을 울립니다. 이 점 역시 높이 평가될 만합니다. 사실 설교자들의 무리한 주장과 강요는 적지 않은 교회들에서 문제를 야기해왔습니다. 자기의 주장을 통해 회중을 지배하고자 하는 설교자의 행태는 설교를 지배의 수단으로 오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는 새 창조의 원리에도 위배되는 겁니다. 이러한 도덕적, 권위주의적, 일방적 설교로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의심의 눈초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심 때문에 훈련과 실천의 필요성까지도 손상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앞서 설명한 설교의 움직임, 즉 비전과 행동의 통합은 복음서와 바울에게 있어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비전이 교회의 구체적인 실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비전과 실천을 통해 ‘교회 세우기’를 시도하는 설교자들은 복음서의 구체적 행위들을 주저 없이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식으로 말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설교자들은 설교란 구원과 관련된 행위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겁니다. 교회를 세울 때 설교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돕습니다. 실천에 대해 설교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우리 설교자들은 구원의 목적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설교는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죄책감에 기초를 두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설교는 사람들에게 행동할 자유를 충분히 부여합니다. 또한 그러한 설교는 두려움을 이용하여 동기부여를 하려 들지 않습니다. 실천에 동참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복음을 부담으로 변질시킵니다. 죄책감이나 두려움은 구원의 선포를 위한 목적에 맞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구원이라고 하는 보다 큰 목적 하에서 설교자들은 구체적이고 공동체적인 행위들을 설교 가운데 과감히 언급해야 합니다. 이렇듯 구원의 관점으로 행하는 설교 방법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간단히 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가장 널리 쓰일 수 있는 방법으로 설교자는 실천을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여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마땅히 감사의 응답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감사의 응답으로서의 실천은 성경의 곳곳에서 부지기수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2:1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공동체의 응답으로 다양한 행위들을 열거합니다.

이러한 응답의 행위들은 구약에서도 흔하게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계명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 구절이 나온 다음에야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감사의 응답을 몸소 실천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실천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응답으로 해석하는 설교자는 도덕적 설교의 오명을 벗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를 동기부여 하기 위해 죄책감이나 두려움에 의존할 필요도 없습니다.

두 번째로 미래지향적인 종말론 안에서 실천은 하나님의 새 창조에 대한 ‘비전을 바라고 살아가는’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비전은 (이사야나 내가 일찍이 언급한 계시록의 비전들처럼)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지향적인 비전은 현재와 충돌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의 비전을 바라며 살도록 초청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Plowshares Group이라는 단체는 파괴적인 무기를 망치로 때리고 그 위에 피를 붓는 의식을 행해왔습니다. 그러한 상징적 행위를 통해 그들은 이사야에 의해 선포된 샬롬의 비전을 품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사 2:4)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천은 이런 식으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교회가 낯선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난민들에게 예배당을 내어줄 때 그들은 샬롬의 비전을 바라보며 지금 여기에서 비전을 현실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같은 작은 행위조차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비전을 바라보며 행하는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크던지 작던지 간에 교회의 공동체적 실천 행위는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실천은 종말론적 구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으로 침노해 들어온 새 창조에 참여하는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유와 생명의 ‘새 공간(new space)’이 죄와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던 곳에 새로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은 그 새 공간 속에서의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이전 것들로 인한 고통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설교자는 교회로 하여금 새 창조의 삶을 시작하도록 돕고 세상을 향해 새로운 가능성이 구체화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좋은 예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28에서 그러한 접근법을 취합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립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고 사도는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게 세상을 침노하여 들어온 새 창조의 삶을 살도록 요청합니다. 윤리학자인 Nancy Duff는 이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바울은 이전의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중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임시적인 삶의 방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 광적인 신앙을 조심해야 하지만 뜨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력한 침노에 의해 새로운 공간이 생겼고 우리는 지금 그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공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옛것을 못 버린 채 살아가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억압과 파괴가 주를 이루는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용인하며 무기력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옛것에 기초하여 ‘이대로’라는 슬로건을 주창하는 정치적 질서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정당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존재하고 행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곳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공간이다.

듀프(Duff)에 의하면, 종말론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존의) 세상을 침노하여 들어온 새로운 ‘현실’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역주/ 비전) 모두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도 변했고 세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도 변했다는 말입니다(p. 281).

회중으로 하여금 세상 속으로 침노해 들어온 새 창조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실천을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제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노동절에 노숙자들 사이에서 만찬을 들었던 마이클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현실 속에서 회중이 동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역, 가령 노숙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것과 같은 일을 제안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 실천으로의 전환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라 구속적인(redemptive) 사건이 될 수 있고 흥미진진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회중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과 그 비전을 무르익게 할 수 있는 실천적 행위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비전과 실천 사이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설교자들에게 단지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실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세상 속에 또 세상을 위해 존재할 수 있도록 중요한 길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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