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세훈 교수, “시장, 정치, 복지 그리고 한국교회”를 이야기 하다.

지난 22일 당산동에 있는 새물결북카페에서 새물결아카데미 특별 기획 강좌가 시장, 정치, 복지 그리고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번 강좌를 위해 고세훈 교수(고려대 공공행정학부)가 나섰다.

정치에 관심 없는 크리스천

고세훈 교수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책을 통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최근에는 뉴욕 맨해튼에서 젊은이들 목회를 하고 있는 팀 켈러(Tim Keller) 목사에게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이런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며 사회를 향한 교회의 책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전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와 그 영향 가운데 수십 년 동안 우리가 머물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경제 우선주의는 정치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거림,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정부, 공적 영역 등이 무시당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정치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다.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지면 우리 스스로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정치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 새물결아카데미 현장

정치의 핵심적 기능은 사회경제적 갈등 완화

모든 사회를 특징짓는 보편적인 개념은 갈등이다. 갈등이란 인간이 불안전한 존재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갈등 없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세계 여러 나라들을 살펴보면 단일 인종 국가인 한국 사회의 갈등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갈등을 정치가 어떻게 조절하고 통합해 내느냐? 에 달려있다. 그 동안 한국정치는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만들어 내는데 바빴다고 할 수 있다.

갈등 가운데 본질적인 갈등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시간을 초월해서 어느 시대에나 나타났던 갈등 그리고 공간을 초월해서 어느 지역에서나 나타나는 본질적 갈등은 사회경제적 갈등이다. 따라서 정치가 해결해야 할 중심 갈등은 바로 사회경제적 갈등이다. 예를 들어 오바마 대통령이 선언했듯이 미국의 흑백문제는 계급문제 즉 사회경제적 갈등이다.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도 사실 경제적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본질적 갈등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빈부의 문제와 중첩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치의 핵심적 기능은 사회경제적 갈등을 완화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당체제 안에 정당들의 대열이 사회경제적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배열되어야 한다. 이런 갈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다만 완화해야 한다. 정치는 갈등을 최소화 시켜서 잠정적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갈등 자체를 부정하면 신정정치, 병영정치, 일사불란한 독재정치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갈등은 박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타협을 통해서 완화하는 것이 갈등 조절의 목표이다. 정치의 가장 큰 책임은 이런 갈등을 완화하는 것이고, 사회경제적 약자를 편들어 주는 것이 정치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 필요

시장은 돈 있는 자와 돈 없는 자로 불평등하게 구분 된다. 시장은 돈으로 권위를 세우고 그로 인해 갈등하게 되어있다. 정치는 이 불평등과 권위를 교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아래서는 대량으로 또한 체계적으로 이런 사회 계급적 불평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개인이 나서서는 해결 할 수 없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다.

기독교가 이웃사랑의 계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이웃사랑의 계명을 버리는 것이다. 정치가 잘못되면 수많은 사람이 고통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처, 독일의 헬무트 콜, 미국의 레이건과 같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주창했다. 이 시대에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자유의 핵심은 사유재산권의 자유이다. 개인의 사유재산권 행사의 자유가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권투에서 헤비급과 라이트급이 붙으면 안 된다. 토끼와 거북이를 경주시키는 자체가 문제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보다 공격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다 보니 경제적 약자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대두된다. 냉전시대에는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체제경쟁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이 긴장하며 정치를 했다. 그 결과가 2차 대전 이후 복지국가의 개념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복지국가의 개념이 무너지면서 갈등이 심화되는 모습이 보인다. 빈곤과 불평등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되었다. 심지어 미국의 보수적 언론들조차 불평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한국도 이 불평등의 문제가 심각하다.

▲ 강의하는 고세훈 교수(고려대 공공행정학부)

한국사회 복지가 절실하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2020년에는 OECD국가 가운데 가장 불평등한 국가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왜 불평등한가? 학자들의 연구결과는 국민소득이 25천불이 넘어가면 불평등의 문제는 사회 모든 영역의 핵심 문제가 됨을 말하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 부동의 1위 문제가 불평등의 심각성을 대변하고 있다. 한국은 사회경제적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고, 이 말은 복지가 절실하다는 말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시장에 노동을 팔고 싶어도 팔지 못하는 문제이다. 이런 사람들이 대량으로 체계적으로 발생한다. 이 문제는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가 선택적으로 대응한 결과가 복지국가이다. 그러나 한국의 복지국가의 현실은 참담하다. GNP총량의 50%-70% 국가예산이 차지하고 그 예산의 50%-70%를 복지에 투자하는 나라가 서유럽의 복지국가들이다. 한국은 GNP 총량의 약 25%가 국가예산이고 그 예산에서 25%정도가 복지 예산으로 나간다. 그러니 약 4분의 1정도의 예산이다. OECD국가 중 꼴지가 터키이고, 그 바로 다음이 한국, 그 다음이 멕시코 그리고 미국이다. 선진국 가운데 복지문제가 가장 약한 나라가 미국인데 그런 미국도 한국보다는 복지예산이 훨씬 높다.

그러나 미국 같은 나라는 민간자산의 전통이 매우 강하다. 미국의 개인 기부자들은 GNP2%를 매년 정례적으로 자선단체에 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복지국가는 아니지만 복지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복지국가도 아니고 복지사회도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복지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조선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은 기부에 대한 통계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비정례적 기부이기 때문에 통계조차 잡을 수 없지만 미국의 33분의 1정도의 기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심하게 말하면 야박하고 야만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공기에 질식된 한국 사회

한국사회는 돈이 최고 가치가 된 사회이다. 한국 기업의 복지수준은 형편없다. 산업재해율 최고이다. 국가복지, 사회복지, 기업복지가 모두 없다. 한국은 복지를 싫어한다. 왜 세금을 많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돈 문제로 복지를 싫어하는 한국사회가 되었다. 복지 문제, 분배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위해서 내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성장이 먼저라는 주장에 암암리에 동의하면서, 이웃사랑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다. 성장결정론에 사로잡혀 복지를 포기하는 형국이다. 부자에게 감세해서 투자하게 하자는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기업은 투자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이익은 많이 가져가면서 고용은 하지 않는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에 비해 이익은 조금 가져가지만 대부분의 고용이 중소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분배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북유럽의 국가들은 현재 우리나라 보다 못살던 80년대에 복지정책을 완성하고, 사회가 안정됨으로 경제가 성장하여 현재의 북유럽이 되었다. 부자들은 돈이 있어도 더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이미 돈을 충분히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다 쓰게 된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에게 돈이 돌아가야 돈이 돌고 경제가 살아난다. 경제 용어로 가난한 사람들이 한계소비성향이 더 높다. 가난한 사람은 받은 돈을 다 쓰게 된다.

한국 사회는 시장의 강자가 모든 사회 영역을 사로잡고 있다. 대학 까지도 대기업이 통제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가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본주의 공기에 일방적으로 노출되어서 가난한 사람도 부자의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광고이다. 광고의 80%는 과장이고 정직하지 않다. 이런 자본주의의 광고를 보면서 거짓 속에 산다. 크리스천들은 진실을 보아야 한다. 거짓의 헤게머니 속에 살아가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거기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면서 살아가면 안된다. 정리하면 한국은 복지가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복지에 대한 문제의식과 문제제기 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가난의 문제 실업의 문제를 자기 스스로의 문제로 삼고 공적 담론의 현장으로 가지고 나오지 못한다. 개인의 고통을 스스로의 문제로만 본다. 또한 남이 고통을 당해도 그 사람의 문제 때문이라고 본다. 걸인이 걸인이 된 것은 그 거지의 책임이라고만 본다면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이유가 없다. 걸인이 걸인 된 것은 거지 자신 만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 즉 사회의 책임이라고 볼 때 이웃사랑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다. 이웃사랑의 계명은 거지의 문제를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보아야 순종할 수 있는 계명이다.

한국인들은 국가에 대해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국가가 무엇을 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없고 따라서 요구도 없다. 습관적으로 투표하고 연고에 따라서 투표한다. 아무런 요구가 없고 기대도 없기 때문에 어떤 정치인도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기업이 약자들은 서로 내팽개치는 모습이다. 한국사회는 반 복지의 덧에 걸려 있는 형국이다.

생각하기를 멈춘 한국교회 맘몬주의 문제에 대한 대안이 없다.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배울 수 있듯이, 교회가 자본주의 사회 형성에 기여했지만 현재는 거대한 자본주의 논리가 기독교를 다스리게 되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영국의 토니 수상은 현대의 기독교는 생각하기를 멈추었기 때문에 가질 수 없었고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줄 수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지적과 같이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교회는 내 놓지 못했다.

신학자들은 아마추어 사회과학자가 되어야 하고 크리스천 사회과학자들은 아마추어 신학자들이 되어서 오늘날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자본주의 영향에 함몰되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독교는 세상을 지배하는 영에 대해서 저항해야 하는데 압도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을 하고 있지 못한다. 서유럽에서 복지국가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기독교 사상 때문이었고 둘째는 약자들의 노동운동이 강했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는 기업의 노조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이 강하다는 의미이다. 조직되고 연대하지 않으면 숫자는 약점이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설득되고 이용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한국 노조조직률은 10% 미만이다. 영국은 30%, 독일은 40%, 스웨덴 80%의 노조 조직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복지국가의 수준을 반영한다. 한국의 노조가 거리로 나와서 사회와 기업을 시끄럽게 하고 악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은 그 만큼 한국의 노조가 약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노조의 긍정적인 측면을 볼 수 없다. 정치적 노동운동, 노동자 정당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서유럽 복지국가를 발전시켰던 기독교 가치와 노동운동이 모두 취약하다. 따라서 현실도 문제지만 앞으로의 전망도 없다.

기독교인들 십자가의 은혜로 생각하는 양심의 부활이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 사는 것은 종말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이 세상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가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복지국가는 기독교 정신과 노동운동으로 발전된다. 가진 사람들이 베푸는 정신이 있느냐? 와 노동자들이 의지를 가지고 찾아오느냐?에 달여있다. 다시말해 기독교 보수운동을 통한 시혜? 아니면 노동운동자들의 쟁취?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시혜냐 쟁취냐? 우리는 시혜도 없도 쟁취도 없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쉽진 않지만 복잡하지도 않다(not easy but simple).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제도와 법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법은 인간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제도는 사람들의 심성과 태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제도가 잘못되면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이 없어진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하에서는 노예학대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지지 못한다. 나치정권 체제아래서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잘못된 제도는 죄를 관영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는 죄라고 말씀하신다. 죄에 대해서 제도의 핑계를 댈 수 없다.

인간은 깨끗할 수 없다. 우리는 생각 이상으로 죄인이다. 죄의 구조 속에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에 깨끗할 수 없다. 술집에 나가서 돈 버는 여인이 돈이 더럽다면 한국 대기업에 들어가서 돈을 번다는 것도 깨끗할 수 없다. 대기업의 횡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 구조 속에서 우리는 모두 횡포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의 병폐 속에 빌 붙어서 살 고 있기 때문에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고 말 할 수 없다. 우리의 죄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놀라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심각성을 깨닫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다. 다른 데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고 교수는 성경이 수 많은 사회문제에 일목요연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가 정치영역에서 일목요연한 답을 제시하려고 하기 보다는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난 크리스천의 양심을 가지고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다.

이웃을 향한 기독교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부활절을 맞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교회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살려 주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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