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 모임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하다. 성도는 소그룹 모임을 통해 교제와 사랑을 나누고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예배를 잘 드리고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소그룹 모임을 통한 교제가 없으면 신앙생활에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나아가서 소그룹 모임은 교회 성장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설교와 뜨거운 기도가 있다 하더라도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 되지 않으면 교회 성장에 제동이 걸리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래서 소그룹 모임을 어떻게 운영하는가 하는 것은 목회자들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왔다.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관별 모임과 구역 모임을 통해 이러한 요구를 충족해 왔다. 그러나 남여 전도회와 청년회 등의 기관별 모임은 사업과 행사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구역 모임은 대개 예배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개인별 신앙 교육과 돌봄과 권면, 상담, 전도 등이 약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그래서 상당 부분 형식화되고 제도화된 기존의 소그룹 모임 대신 새로운 소그룹 모임을 추구하게 되었다. 각종 성경 공부 모임, 제자 훈련, 순 모임, 셀 모임, 가정 교회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특히 어떤 교회들에서는 지나치게 제도화된 당회 조직 외에 좀 더 유연하고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는 대안으로 ‘가정 교회’ 모임을 선호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 가정 교회야말로 신약 성경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모델이며, 초대 교회는 다 가정 교회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그 가정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이루었으며, 가정 교회들 전체가 모이는 연합 모임은 대개 한 달에 한 번쯤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면 과연 신약 교회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신약 교회는 정말로 가정 교회 형태였을까? 그리고 과연 그러한 많은 가정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이루었을까? 그리고 소위 연합 예배는 한 달에 한 번쯤 모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사실일까? 과연 신약 성경은 이러한 주장들에 어떻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신약 성경이 오늘날 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는 가정 교회 운동과 이에 대해 신학적으로 동조하는 주장을 펴고 있는 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성경적으로 살펴보고, 신약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방향은 무엇인지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I. 가정 교회란 무엇인가?


그러면 가정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날 무엇보다도 ‘가정 교회’라는 용어의 혼란이 심각하다. 통일교는 지난 1997년경부터 ‘가정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교단명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에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바꾸었으며. ‘참 가정’을 세운다는 것이 그들의 모토이다. 1)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정 교회(house church)’라고 부른다.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교회들이 그러하였다. 예를 들면 로마 교회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였으며(롬 16:5), 고린도 교회는 아마도 바울과 온 교회의 식주인이었던 가이오의 집에서 모인 것으로 생각된다(고전 16:23; cf. 고전 1:14).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였으며(몬 2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자의 집에서 모였다(골 4:15). 또 에베소 교회도 처음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다(고전 16:19). 이처럼 초대 교회는 성도의 집(가정)에서 모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의 ‘가정’이란 장소로서의 가정을 말한다. 즉, 교회당 건물이나 빌딩이 아니라 성도의 집에서 모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단순히 성도의 집에서 모였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가정 교회’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미국 휴스턴의 최영기 목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가정 교회’가 그러하다. 신약 성경에 그들이 말하는 가정 교회의 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장소로서의 가정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교회당 건물이나 상가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영기 목사가 주장하는 ‘가정 교회’는 그런 장소적 의미가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장소적 의미보다 새로운 구조로서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즉, 그가 말하는 ‘가정 교회’는 교회 안의 한 소그룹 모임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교회 안의 교회’로서 ‘가정 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실 어디에서 모이느냐 하는 장소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며 ‘새로운 교회 구조’가 그 핵심이다. 2) 이 ‘새로운 교회 구조’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役事)를 제한하는 ‘전통적인 교회 구조’와는 달리 ‘성령의 힘을 제한하지 않는 교회 구조’인 초대 교회를 말하는데, 그 당시에는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 안에 가정이 중심이 된 수많은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3) 그래서 최영기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저는 신약 교회가 성령께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는 조직, 즉 가정 교회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폭발적인 능력이 나오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4) 그리고 1996년에 나온 책에서 그는, 자기 교회에는 32개의 ‘가정 교회’가 있다고 말한다. 5)

  

이러한 ‘가정 교회’의 핵심은 교회 안에 있는 ‘가정 교회’ 하나하나가 다 ‘독립된 교회’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6) 그래서 그것을 ‘구역’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가정 교회와 구역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로, 구역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을 묶어 조직되지만 가정 교회는 가정 교회 회원들의 선택에 따라 결성된다. 둘째, 구역 모임은 친교와 서로를 돕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가정 교회에서는 예배, 성경 공부, 제자 훈련, 선교, 전도, 친교 등 교회가 하는 모든 역할을 다 한다. 7) 따라서 가정 교회는 자그마한 개척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8) 이처럼 최영기 목사가 주장하는 가정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교회이며, 그러한 가정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전체 교회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교회 안의 교회’라는 구조가 중요하며 어디에서 모이는가 하는 장소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안의 교회’, ‘2층 구조로서의 교회’ 구조는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정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예루살렘 교회가 “집에서 떡을 떼고”(행 2:46),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행 5:42), “마리아의 집에 .... 모여 기도했다”(행 12:12)는 말은 있어도 그 각각이 완전한 교회였다는 증거는 없다. 예루살렘 교회는 수많은 가정 교회들의 연합체였다기보다도 하나의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가정에 모여서 모임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가정에서의 모임은 오늘날의 구역 모임과 비슷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로마의 교회나 고린도의 교회 등에서도 오늘날 ‘가정 교회’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그런 ‘새로운 교회 구조’의 증거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자세히 논할 것이다. 


II. 교회란 무엇인가?


그러나 ‘가정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을 왜 ‘교회’라고 부를 수 없는가라고 반문한다.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인데 왜 그런 모임이 ‘교회’가 아니냐고 항변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벨직 신앙고백」이 교회는 ‘참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이라고 했을 때, 그 ‘교회’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보편적 교회’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의 보편적 또는 일반적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그것은 참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이다.”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현을 따르자면 ‘택자들의 총수’를 의미한다. “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불가시적인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였고, 모이고 있으며, 모일 택자들의 총수로 구성되어 있다.” 10) 따라서 성도들 몇 명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남아공화국의 개혁주의 교의학자인 헤인스(J. A. Heyns) 교수가 잘 표현한 대로 “참 신자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또는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다.” 11) 

  

모든 성도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는 ‘지역 교회’ 12)에 속해야 하며 그 교회의 가르침과 치리를 받아야 한다(「벨직 신앙고백」 28조). 우리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해야 하는데, 참 교회의 표지는 복음의 순수한 전파와 성례의 순수한 거행과 권징의 시행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29조).   

  

참 교회는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운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는 수종자(목사)가 있어야 하며, 목사와 함께 교회 회의를 구성하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어야 한다(30조). 그리고 말씀의 수종자들(목사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은 교회에 의해 적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31조).

  

따라서 이러한 선출 절차를 따르지 아니하고 목사나 당회에 의해 임명되는 ‘목자들’(가정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가정 교회’를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성경적인 의미에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가정 교회의 ‘목자들’은 대개 교회 성도들에 의해 투표에 의해 선출되지 않으며 당회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물론 장로들이 다 ‘목자들’이 된다면 이런 문제는 없어지겠지만, 가정 모임을 ‘가정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된다.     


III. 초대 교회는 다 가정 교회였는가?


최영기 목사와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는 ‘가정 교회’였다고 주장한다. 최영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정 교회라고 하면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신약 성경을 읽어 보면 우리는 당시의 교회 형태가 가정 교회였음을 발견합니다.” 13) 신약에서의 가정 교회에 대해 깊이 연구한 홍인규 교수도 “사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모두 가정 교회이다.”라고 말한다. 14) 교회 건물 형태로서의 가정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정용성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신약의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고, 그 이후 초대 교회도 주후 4세기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주후 313년) 이전까지는 가정에서 모였다. .... 이는 신약 시대의 교회는 모두가 다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음을 시사하여 준다.” 15) 침례신학대학교의 장동수 교수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한다.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공동체들은 그야말로 어떤 개인의 집, 즉 가정에서 만나고 예배하고 활동하는 가정 교회로 모였다. .... 주후 3세기까지 교회의 모임만을 위한 교회당 건물은 없었다.” 16)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병수 교수는, 조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신약 성경(그리고 속사도 시대 문서)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가 가정집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는 가정 교회의 시기였던 것이다.” 17)

  

그렇다면 초대 교회는 다 가정 교회였는가? 신약 성경은 오직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 형태 외에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신약 성경은 가정 교회에 대해 많이 말하지만 그것이 전부 다는 아니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신약 성경은 가정 교회 외에 다른 형태도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였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권함을 받은 3천명의 성도들이 모인 장소는 바로 성전이었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모일 수 있는 장소는 성전이 가장 적합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었다. 절기 때에는 수십만 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아마도 성전의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을 것이다(행 3:11). 사도행전 5:12은 이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 솔로몬 행각은 이방인의 뜰 동쪽에 있었는데, 미문(美門, 니카노르 문)이 있는 곳과 같은 방향에 있었다. 동쪽에서 미문을 통해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거기에 솔로몬 행각이 서 있었다. 18)

  

사도들은 이 성전에서 가르쳤다(행 2:42, 5:21, 25, 42). 성도들은 여기서 기도하고(행 2:42, 3:1, 4:23-31), 하나님을 찬미하고(행 2:47), 전도하였다(행 5:42).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늘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눅 24:53).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오순절 전이나 후나 신앙생활의 중심지였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집’에서도 모였다. 그들은 날마다 ‘집’에서 모여 떡을 떼며 음식을 먹었다(행 2:46). 또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가르치고 전도하였다(행 5:42).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의 ‘전체 교회’와 많은 ‘가정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집에서 모인 것을 두고 ‘가정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논할 것이다. 어쨌든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 ‘성전’에서 모였으며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2. 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그들은 바울을 따라 에베소로 왔다(행 18:18,19).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한 후 곧장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다. 그리고는 얼마 있지 않아 곧 가이사랴로 떠났다(행 18:19-22). 따라서 바울이 떠난 후에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모였을 것이다.

  

3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다시 에베소에 들렀다. 그는 관례를 따라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강론하였다(행 19:8). 그러자 어떤 이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비방하므로 바울은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다. 2년 동안을 그리하니 아시아에 사는 많은 사람들 곧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행 19:9,10).

  

따라서 에베소 교회는 적어도 2년 동안 ‘두란노 서원(hJ scolh; Turavnnou)’에서 모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서원(書院)’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콜레’는 원래 ‘여가(leisure)’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강의실(lecture hall)’을 뜻한다.19) 칼빈은 이에 대해 ‘두란노(Tyrannus)’라는 사람이 비용을 대어 설립하여 시에 기증한 ‘김나지움’일 것으로 추정한다.20)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어쨌든 에베소 교회는 ‘두란노 서원’이라는 강의실에서 모였으며 그곳에서 말씀을 듣고 배웠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6:19에 보면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다고 한다.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hJ kat! oi\kon aujtw'n ejkklhsiva)’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 몇 번 나타나는데(롬 16:5, 골 4:15, 몬 2절), 초대 교회가 성도의 집에서 많이 모였음을 나타내 준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의 경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도 모이고 두란노 서원에서도 모이고, 두 곳에서 모였다는 말인가? 주일 예배와 친교 및 기도 모임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가지고, 주중의 성경 강론은 두란노 서원에서 한 것일까? 우리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두란노 서원으로 분리해서 나가기 전에 바울은 그의 관례를 따라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강론하였다. 안식일 날 드리는 회당 예배가 곧 그들의 공식 예배였다. 따라서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명확하게 구별되기 전에는 기독교 예배와 유대교 예배가 공존하고 있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바울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을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했으며, 따라서 유대교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었다(행 28:22). 그러한 시기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와 교육과 기도의 장소로서 역할하였을 것이다. 두란노 서원으로 분리되어 나온 후에도 그들의 집은 계속해서 교제와 교육과 기도의 장소로서 역할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 또는 주일 날 예배를 어느 곳에서 드렸는지, 또 성찬식을 어디서 어떻게 행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어쨌든 오늘날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만이 신약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주장은 지나치며 사실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약 교회는 ‘의도적으로’ 가정에서 모였다고 하는 주장도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용성 교수는 “신약 시대에 교회는 단지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가정에 모였던 것이 아니라, 상당히 의도적으로 가정에 모였음을 특히 누가-행전은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21) 곧 가정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예배를 위한 가장 역동적인 무대 환경을 제공하여” 22) 주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가정에서 모였다는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신약 교회가 가정에서 많이 모인 것은 자연발생적이고 현실적인 이유 때문으로 생각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생겨나는데 마땅히 모일 곳은 없고, 또 예배당을 건축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감당할 재정 마련도 쉽지 않으며, 또한 적은 무리를 위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가정에서 모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가정이 가지는 따뜻함과 친밀감, 자연스러움의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가정에서 모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성도의 수가 많을 때는 ‘성전’에서 모이기도 하고 또한 ‘강의실’에서 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목적에 맞게 장소를 선택하였으며, 장소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어디’에 모이느냐보다는 ‘무엇’이 전파되느냐, 그리고 ‘어떻게’ 행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즉, 외적 환경보다는 복음의 내용과 삶이 더 중요하였던 것이다.


3. 야고보서의 수신자 교회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보낸 편지로 알려져 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디아스포라에 있는 열 두 지파’라고 되어 있다(약 1:1). 여기서 ‘열 두 지파’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인데, 여기서는 유대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에 “디아스포라에 있는”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어서 이 전체 표현은 팔레스타인과 인근의 수리아 지역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23) 

  

그러면 이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 모였을까? 2장 2절에 보면 ‘회당’이란 표현이 나온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 신약에서 ‘회당(sunagwghv)’은 원칙적으로 ‘건물’ 또는 ‘모임’을 뜻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들어오다’는 동사와 함께 사용되었으므로 건물적 의미라고 생각된다. 야고보서에서 ‘모임’을 뜻할 때에는 ‘교회(ejkklhsiva)’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약 5:14).24) 비록 여기의 ‘회당’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assembly)’을 가리킨다고 보더라도, 거기에서 장소적 개념 또는 건물적 개념을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어떤 장소, 유대인의 회당처럼 예배하기 위해 정해진 장소에 모인 모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절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는 표현이 그러한 장소성과 건물 구조를 시사하고 있다.25) 따라서 여기의 ‘회당’이란 표현은 건물로서의 ‘회당’이란 개념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이 ‘회당’은 물론 유대인들의 회당은 아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회당을 빌려 사용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야고보서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의 회당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따로 사용한 건물을 뜻한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자면 ‘예배당’ 또는 ‘교회당’이 되겠으나 당시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사용하던 용어인 ‘회당’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초기 기독교 예배 형태가 유대인의 회당 예배 형태에서 유래했으며, 동일한 유대인들이 예배드리게 된 것을 생각해 볼 때 ‘회당’이란 용어 사용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에 팔레스타인과 인근의 수리아 지역에 곳곳마다 교회당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처음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이내 분란이 생겨서 분리하여 나왔을 것이다. 처음에는 믿는 자들의 가정에서 예배들 드리다가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이 전에 예배드리는 건물인 유대교 회당을 본떠서 그들 자신의 (기독교) 회당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가 이 편지를 기록할 즈음에는 유대의 마을 곳곳에, 그리고 수리아 지역의 곳곳에 기독교 회당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야고보서의 기록 시기를 대개 로마서보다 이른 시기로 보는데,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주후 50년대의 어느 시점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이미 유대 지역 곳곳과 수리아 지역 여러 곳에 교회당 건물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곳에서 예배드렸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의 교회는 다 가정 교회였으며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주후 313년) 이전까지는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주장26)은 지나친 것이며 신약 자체의 증거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는 처음에 성도의 가정에서 모임을 가진 경우가 많이 있으며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신약의 ‘모든 교회’가 다 가정 교회였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약의 교회는 환경과 형편에 따라 ‘성전’에서 모이기도 하였고, ‘강의실 홀’에서 모이기도 하였고, 또한 따로 짓거나 빌린 ‘교회당 건물’에서 모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는 ‘의도적으로’ 가정에서 모인 것은 아니며 형편에 따라 가정에서 모이기도 하고 홀에서 모이기도 하고, 또는 별도의 건물에서 모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획일적으로 다 가정 교회 형태였으며 또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교회 형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며 사실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IV. 한 도시에 여러 가정 교회가 있었는가?


가정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 도시에 여러 가정 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최영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약 시대에는 지금처럼 한 도시에 여러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도시에는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로마에는 로마 교회 하나밖에 없었고 골로새에서는 골로새 교회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는 가정이 중심이 된 수많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27)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각 도시마다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에베소에는 에베소 교회 하나, 로마에는 로마 교회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시마다 집집에서 모이는 수많은 가정교회가 있었습니다.”28)

  

그러면 과연 신약 시대에는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고 그 안에 수많은 ‘가정 교회’가 있었는가? 아니면 한 도시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가? 아니면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가 있고 그 안에 여러 개의 ‘가정 모임’이 있었는가? 이 문제는 쉽사리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각각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도들이 ‘성전’에서 모이고 또 ‘집’에서도 모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6) 5장 42절에서도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수많은 가정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원문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2장 46절에서 ‘집에서(kat! oi\kon)’라고 하는 것은 ‘성전에서(ejn tw'/ iJerw'/)’와 대비되고 있다.29) 따라서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모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집에서도’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여서 ‘성전’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성도의 집에서 소그룹 모임을 가졌다거나 가정 교회 모임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 집에서 가족끼리 모였을 수도 있고, 몇몇 사람이 같이 모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모였다’는 것이 꼭 무슨 공식적인 순서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모여서 함께 식사를 나누고 교제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초점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였다. 따라서 초대 교회에 역사한 성령의 능력은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칼빈도 “집에서 떡을 떼고”에 대한 주석에서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누가가 말하는 것은 그들은 참 경건의 표시를 단지 공적으로만 보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적 생활의 진행과 분위기도 동일한 것이었다는 것이다.”30)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 42절과 46절의 “떡을 뗀다”
31)는 표현에 대해 ‘성찬’32) 또는 ‘애찬’33)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성도의 가정에서 ‘성찬식’을 거행하였고, 따라서 ‘가정 교회’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에서 ‘떡을 떼다’는 표현이 성찬 또는 애찬의 의미로 사용된 곳들도 있지만(행 20:7, 고전 10:16), 이 구절의 표현을 성찬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42절에서 ‘떡을 떼다’는 말은 ‘교제하며’ 다음에 나오며 또한 접속사 ‘카이(
kaiv)’가 없이 바로 연결되어 있다. 즉,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다음에는 ‘카이’가 나오고 ‘떡을 떼며’ 다음에도 ‘카이’가 나오지만, ‘서로 교제하며’와 ‘떡을 떼며’ 사이에는 ‘카이’가 없다. 그래서 ‘교제 하는 것’과 ‘떡을 떼는 것’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떡을 떼는 것’은 ‘교제하는 것’ 다음에 나오는 새로운 항목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교제하는 것’에 속한 항목으로서 교제의 구체적 방법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34) 즉,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떡을 떼는 것’ 곧 함께 식사하는 것을 통해 ‘교제’를 실천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성도들이 교제를 실천하는 방편으로서 ‘함께 먹는 것’을 의미하며 ‘성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35)

  

46절의 “날마다 ...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도 마찬가지로 이해된다. 여기에 ‘서로 교제하며’가 따로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떡을 떼며 음식을 먹는 것’이 바로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전에서나 집에서나 어디에서든지 다 ‘한 마음’이 되었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하였다는 것이다. 칼빈도 이 점을 잘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에서 떡을 떼는 것이 성찬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의 견해로는 누가의 의미와는 매우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우리에게 그들은 자주 함께 먹었으며 또 검소하게 함께 먹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36)

  

따라서 우리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공적인 모임을 성전에서 가졌으며, 집에서는 성도간의 교제와 기도와 전도를 하였다고 본다. 성도의 가정에서의 모임은 가족간의 식사였거나 또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공동 식사였다고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이것은 오늘날의 구역 모임이거나 비공식적인 교제 모임 또는 사랑방 모임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각각의 독립된 가정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예루살렘 전체 교회에 대해 ‘복수’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은 ‘지역 교회’에 대해 사용될 때 하나 이상의 여러 교회를 가리킬 때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항상 ‘복수’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 1:2, 고전 16:1), ‘아시아의 교회들’(고전 16:19), ‘마게도냐 교회들’(고후 8:1), ‘유대의 교회들’(갈 1:22)에서처럼 여러 교회를 가리킬 때에는 복수로 사용된다.37) 그러나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단수로 말한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행 5: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행 8:1),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행 8:3),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행 11:22),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행 12:1),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혀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 12:5),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행 15:4).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항상 ‘단수’가 사용되고 있다. 이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의 단일한 교회였음을 시사한다.


2. 로마 교회


  홍인규 교수는 도시 로마에 적어도 세 개의 가정 교회들이 있었다고 본다. 첫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이고(롬 16:3,5), 둘째는 아순그리도와 블레곤와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의 교회이고(롬 16:14), 세 번째는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성도의 교회이다(롬 16:15; cf. 16:5,10).38) 

  

조병수 교수도 “로마 교회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39)고 하면서, 그 증거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든다. 1)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롬 16:5); 2) 아리스도불로의 권속(롬 16:10); 3)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롬 16:11); 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롬 16:14); 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롬 16:15).40) 이러한 사실에서 조병수 교수는 로마에는 여러 가정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 교회(Family Church)’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가족 교회에 방문자들과 손님들이 가담하여 ‘가정 교회(House Church)’가 되었으며, 이 가족 교회들 또는 가정 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이루었다고 본다.41)   

  

이러한 주장에 대해 우리는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로마서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교회’ 또는 ‘교회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부르고 있을 따름이다(롬 1:7). 따라서 이 표현만으로는 로마에 하나의 교회가 있었는지 여러 개의 교회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칼빈은 로마서 16:5의 ‘그들(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이는 교회’라는 표현에 대해 그들의 ‘가족’을 가리킨다고 본다. 바울은 그들의 가족을 ‘교회’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 대해 커다란 존경을 표하고 있다고 말한다.4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교회’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그런 개인적인 가정에 대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43)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로마의 모든 성도들이 다 모였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집에 로마의 성도들 중 일부가 모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것은 로마 시의 크기로 보아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로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한 집에 다 모이는 것은 거리상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44) 그렇다면 로마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이는 교회 외에도 몇 개의 가정 교회들이 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개혁주의 주석가들의 견해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45) 물론 로마서 16장 14절의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tou;" su;n aujtoi'" ajdelfouv")’이 ‘교회’를 뜻하는지 그냥 말 그대로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15절의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tou;" su;n aujtoi'" pavnta" aJgivou")’란 표현도 꼭 ‘교회’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성도들’을 뜻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로마 교회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실상을 알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태도가 될 것이다. 

 

3. 고린도 교회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홍인규 교수는 고린도에도 여러 가정 교회들이 있었다고 본다. 곧,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행 18:1-3), 디도 유스도의 집(행 18:7), 아볼로가 머문 집(행 18:27-28), 가이오의 집(롬 16:23, 고전 1:14), 스데바나의 집(고전 1:16, 16:15-16), 그리고 에라스도의 집(롬 16:23).1)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이면 거기에 ‘가정 교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점은 조병수 교수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가이오가 로마서에서 ‘온 교회의 식주인’(롬 16:23)으로 소개된 사실에서, 가이오의 집이 가정 교회로 사용되었지만 때때로 전체 교회의 회집 장소로 제공되었다고 본다. “만일에 이런 추측이 옳다면 고린도에는 하나의 지역 교회와 여러 가정 교회들이 병존했으며 다양한 회집 형태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2) 여기서 우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조병수 교수가 주장하는 견해는 순전히 ‘추측’에 근거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린도에 여러 개의 가정 교회들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다 마찬가지다. 오늘날 소위 ‘가정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대부분 ‘추측’에 근거해 있으며 확실한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추측’이 타당한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이며 나중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조병수 교수는 또 사도 바울이 스데바나의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전 1:16)는 사실에서 그곳에 가정 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3) 물론 고린도전서 16:15에 보면 “스데바나의 집은 ...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도들 섬기는 것’이 꼭 ‘가정 교회’를 통해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도 대접하기를 힘쓰며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뜻인지 우리가 알기 어렵다. 미국의 고든 피(Gordon Fee)도 여기서 이 ‘섬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가르치는 것과 설교를 포함해서 많은 봉사(섬김)들을 포함할 만큼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4)

  

그러나 홍인규 교수나 조병수 교수는 ‘교회’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성도들이 어디에 몇 명 모여 있으면 거기에 ‘교회’가 있다고 추정하는 것 같다. 그래서 조병수 교수는 ‘가족 교회’, ‘가정 교회’, ‘지역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5) 그러나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무시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관에 따르면,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 곧 순수한 복음의 전파, 순수한 성례의 거행, 권징의 실시, 이런 참 교회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벨직 신앙고백」 29조). 그리고 교회에는 직분자들이 있어야 한다. 곧, 하나님 말씀의 수종자, 장로와 집사들인데 이들은 교회에 의해 적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제31조; 엡 4:11). 그냥 성도들이 모였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다.6)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hJ ejkklhsiva tou' qeou')’는 단수로 되어 있다. 여기서 ‘교회’는 지역 교회(local church)의 개념이다.7) 고린도후서 1:1에서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교회’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가정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여러 개의 가정 교회들로 구성된 하나의 ‘지역 교회’를 가리킨다고 주장지만, 만일 고린도 교회가 각각의 독립된 완전한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약 성경의 용법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수신자에 대해 ‘갈라디아의 교회들(aiJ ejkklhsivai th'" Galativa")’이라고 복수로 말하고 있다(갈 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라고 할 때에도 복수를 사용하였다(갈 1:22).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말할 때에도 ‘마게도냐의 교회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고후 8:1).8)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울과 실라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였다고 말한다(행 15:41).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교회들’이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였다고 한다(행 16:5). 이처럼 신약 성경은 여러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말할 때에는 복수로 ‘교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이라고 말할 때에는 아주 분명하다(계 1:4, 11, 20). 이 일곱 교회에 대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분명히 복수로 말한다(계 2:7,11,17,28, 3:6,13,22, 22:16).

  

그런데 여기 고린도 교회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단수로 말하고 있다(고전 1:2, 고후 1:1).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의 지역 교회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가정 교회는 아마도 ‘가이오’의 집에서 모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16:23). 여기서 ‘식주인(xevno")’이란 말은 원래 ‘나그네, 손님’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손님을 대접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의 가이오 집에 머물고 있었으며, 그 때 로마서를 기록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가이오는 바울뿐만 아니라 ‘온 교회(o{lh hJ ejkklhsiva)’를 대접하였다. 여기서 ‘온 교회’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는 분명치 않다. 고린도 교회의 전체 성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아니면 좀 더 넓은 의미로 고린도뿐만 아니라 그밖에 당시에 존재하던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9) 어쨌든 가이오는 예수 믿는 자로서 바울뿐만 아니라 여러 성도들을 대접하기를 힘쓴 고린도의 유력한 성도로서, 고린도 교회는 그의 집에 모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이오의 집 외에 다른 집들에도 가정 교회가 모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를 들면, 조병수 교수는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서 ‘그의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다(행 18:8). 이것은 그가 자신의 집을 가정 교회로 제공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10)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추측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회당장 그리스보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지 그 이상은 없다. 어떤 사람이 온 가족으로 더불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그 집에 가정 교회가 모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며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한 300명쯤 되는 교회에 온 가족이 다 믿는 가정이 약 50 가정쯤 있다고 치자. 그러면 그 50 집이 다 ‘가정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한 사람이 온 가족으로 더불어 새로 등록했다고 치자. 그러면 “아, 거기에도 하나의 가정 교회가 모였을 것이다.” - 이렇게 추측할 수 있겠는가? 어떤 한 가정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과 거기에 가정 교회가 모였다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그런데 이 둘을 묶어서 같다고 보는 오류를 오늘날 학자들이 많이 범하고 있다.

  

V. 연합 모임이 있었는가?


만일 초대 교회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한 도시 안에 작은 여러 가정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홍인규 교수는 그들 가정 교회들은 때때로 전체 모임을 가졌을 것이라고 본다. 그 증거는 고린도전서 14:23의 ‘온 교회(hJ ejkklhsiva o{lh)’가 함께 모였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로마서 16:23에도 고린도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온 교회(o{lh hJ ejkklhsiva)’의 모임 장소가 가이오의 집에 있었다고 말한다. 홍 교수는 여기의 ‘온 교회’란 고린도에 있는 모든 가정 교회들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한다고 본다.11) 그리고 ‘온 교회’의 회합은 이교도의 모임들의 경우를 따라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12)


1. 온 교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해석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진다. 첫째로, ‘온 교회’에 대한 이해이다. 고린도전서 14:23의 ‘온 교회’가 과연 그런 ‘연합 예배’의 의미인지는 의심스럽다. ‘온(whole)’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홀로스(o{lo")’는 ‘범위에 있어서 전체에 속하는(pertaining to being complete)’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온, 전체의, 완전한(whole, entire, complete)’으로 번역된다.13) 즉, ‘부분’에 대해 대비되는 ‘전체’의 개념이다. 따라서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는 문장에서 ‘온 교회’는 가정 교회들의 ‘연합 모임’이라기보다도 교회가 전체로, 즉 공적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모임에서 성도들이 다 방언으로 말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가정 교회’에서는 방언을 해도 되는데 ‘연합 모임’에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28절의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거기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여기서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연합 모임’에서 잠잠하라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지금 “연합 모임에서는 잠잠하고 가정 교회에서는 방언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너희 중 누가 방언으로 말하려고 하거든 혼자서 개인적으로 하라”는 뜻으로 말한다. 꼭 교회의 모임에서 하려거든 통역자가 있는 가운데 두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하고 통역하라”고 말한다(27절). 따라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는 ‘가정 교회’와 대비되는 ‘연합 모임’에서 잠잠하라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기도’와 대비되는 ‘공적 모임’으로서의 교회에서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23절의 ‘온 교회’는 가정 교회 주장자들의 주장처럼 가정 교회들의 연합 모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다 모이는 공적 모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온 교회’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구절들인 사도행전 5:11과 15:22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5:11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있고 난 후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온 교회(o{lh hJ ejkklhsiva)’란 교회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말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어서 온 교회 성도들이 두려워하였다는 뜻이다. 여기에 무슨 ‘연합 교회’의 개념이 들어갈 게재가 아니다. 이 본문 전체에서 소위 ‘가정 교회’와 ‘연합 모임’ 사이의 대비를 찾을 수 없다. 이 사실은 여기의 ‘온 교회’에 이어서 나오는 ‘듣는 사람들이 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앞의 ‘온 교회’가 조직체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면,14) ‘듣는 사람들이 다’란 표현은 개별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듣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 일을 듣는 자들은 다, 예외 없이 두려워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신자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누구든지 예외 없이 다 놀라고 두려워하였다는 뜻이다.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무슨 ‘가정 교회’나 ‘연합 모임’에 대한 시사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의 ‘온 교회’는 말 그대로 온 교회이지 다른 뜻이 아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5:22의 ‘온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란 표현에서 ‘온 교회’란 말 그대로 ‘온 교회’이지 다른 무슨 ‘연합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의 뜻은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가 일치단결하여 결정하였다는 것이며, 교회 안에서 의견이 나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른 표현인 ‘온 집(o{lo" oJ oi\ko")’도 마찬가지다. 사도행전 7:10의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에서 ‘온 집’이란 바로의 집에 속한 사람들 전체와 집안 일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18:8의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에서 ‘온 집’도 그리스도의 집에 속한 사람들 전부 곧 그의 가족 전부를 말한다.

  

로마서 16:23의 ‘온 교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라는 표현은 바울뿐만 아니라 교회 성도들 전체에 대해서도 식사를 제공하고 대접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온 교회’는 고린도 교회 전체 성도들을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오는 '외지인 그리스도인들(Christian strangers)’을 가리킬 수도 있다.15) 왜냐하면 여기에 ‘식주인’으로 번역된 ‘크세노스(xevno")’는 원래 ‘낯선, 외국의(strange)’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가이오는 외지에서 오는 낯선 그리스도인들을 재워주고 대접하는 일을 많이 하였는데, 단지 바울에게뿐만 아니라 로마나 다른 곳에서 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하였다는 말이다.16) 그렇다면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에 연합 모임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2. 모임의 회수


그리고 소위 그러한 ‘온 교회’의 모임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근거가 없다. 홍인규 교수의 그러한 주장은 로버트 뱅크스의 추측에 근거한 것인데, 뱅크스는 이에 대해 그저 추측으로 말할 따름이다. “온 교회가 모였다고 언급할 때 바울이 취한 다소 분명치 않은 표현은 그 모임들이 한 주에 한 번 꼴로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자발적인 이교도들의 회합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큰 모임들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예를 따랐을 것이다.”17) 그러나 이것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더구나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의 회합을 따랐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의 제사 행위에 대해 우상 숭배이며 귀신과 교제하는 것으로 보았다(고전 10:7, 20). 따라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이교도들의 회합을 모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홍인규 교수도 로마 교회에 대해서는 어떤 한 장소에서 전체 모임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인정한다. 아마도 로마라는 도시의 크기 때문에 전체 모임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라고 본다.18) 그렇다면 중요하게 문제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인데,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개의 가정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교회가 있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연합 모임’ 또는 ‘전체 모임’을 논하는 것 자체가 합당치 않다.


VI.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초대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한 도시에 여러 개의 가정 교회들로 구성된 하나의 지역 교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회 안의 교회’로서의 ‘가정 교회’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성도의 가정에서 교회가 모이는 경우는 많았다. 이것은 성도 수가 많지 않은 초기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획일적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이는 경우도 있었고 강의실이나 건물에서 모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그들이 속한 도시나 마을의 형편에 따라 모이는 장소는 달랐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현재 논란되고 있는 ‘가정 교회’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의 취해야 할 대안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소그룹 모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중요하다. 따라서 각 교회가 형편에 따라 소그룹 모임을 가지는 것은 자유에 속하며 적극 권장할 만하다. 어떤 형태의 소그룹 모임을 가질지는 시대와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각 교회가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소그룹 모임을 가지든 간에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가 되려면 참 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거행과 권징의 실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들(목사, 장로, 집사)이 선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적인 당회와 집사회(제직회)가 조직되어 운영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직 당회가 구성되지 않은 미조직 교회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조직 교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것이다. 따라서 미조직 교회는 조직된 교회 안의 하부구조로서의 소위 ‘가정 교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소위 ‘가정 교회’는 조직된 교회 안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소그룹 모임이며 장차 독립된 교회로 나아갈 의사가 애초부터 없다. 이에 비해 미조직 교회는 비록 당회는 없지만 당회장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정규적인 예배와 성례식을 거행하며 필요시에 권징도 실시한다. 제직회와 공동의회도 모인다. 따라서 ‘가정 교회’와 미조직 교회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것이다.

  

만일 교회 안의 소그룹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게 되면, 그것은 ‘교회 안의 교회(ecclesiola in ecclesia)’가 되고 만다. 이러한 교회 구조는 신약 성경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가정에 모인 교회’는 한 교회 안의 소그룹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개교회이다. 비록 성도의 집에서 모였지만 하나의 독립된 교회로서 예배와 성찬과 권징 등 교회로서의 모든 기능을 다 수행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자들이 몇 명 모이면 다 교회가 아니냐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개혁주의적 교회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참 교회의 표지와 직분을 무시하면 교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무질서해진다. 그렇다면 굳이 소그룹 모임만 ‘교회’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초등부 모임도 ‘유초등부 교회’라고 부르고, 중고등부 모임도 ‘중고등부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도들이 부엌에 몇 명 모여 있으면 ‘부엌 교회’라고 부르고, 화장실에 모여 있으면 ‘화장실 교회’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교회’라는 용어를 남용하는 것은 개혁주의 교회 개념에 맞지 않다. 개혁 교회는 참 교회의 표지와 직분을 중요하게 여기며 교회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2. ‘장로’가 소그룹 모임을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장로회 정치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장로교에서는 구역 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의 지도자에 ‘장로’를 세우는 것이 원칙적으로 옳다. 왜냐하면 장로의 직분이 양들을 치는(돌보는) 것이기 때문이다(행 20:28, 벧전 5:2). 그래서 목사 혼자서 다 돌보기 어려운 성도들을, 구역을 나누어서 장로들이 각각 자기 구역의 성도들을 돌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따라서 구역 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의 장은 장로가 맡는 것이 원칙이다. 참고로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장로가 구역장을 맡는다. 구역에서 일어난 일상적인 일들은 일차적으로 구역장 되는 장로가 돌아보며, 그 중에서 중요한 일이 있으면 목사에게 보고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당회에서 의논한다. 그래서 장로는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자기 구역 식구들을 심방하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그래서 장로직을 수행하는 것이 힘들어서 한 3~4년 정도 봉사하고 나면 장로직을 그만둔다. 휴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로직을 완전히 벗어버렸다가 1년 쉰 후에 다시 장로로 선출될 수 있다. 그러나 장로로 선출하려고 해도 본인이 사양하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그만큼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에 구역은 많고 장로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장로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럴 때에는 두 가지 해결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장로 수를 늘리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인 해결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장로를 세우신 목적은 양들(교회 성도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함이다. 구역 모임 또는 소그룹 모임을 하는 목적도 바로 성도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고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구역을 맡아서 지도하는 사람이 바로 장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것이다.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교인이 늘어나서 구역이 늘어나게 되면 그 늘어난 구역 수만큼 장로를 더 뽑는다. 장로 선출과 임직 순서도 간단하여서 변화하는 상황에 빨리 대처한다. 그러나 한국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해결책을 시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 교회의 구역은 대개 규모가 작으며 장로 수가 적고 또한 장로 선출 절차와 임직 절차가 번거롭고 거창하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두 번째 해결책은 몇 명의 구역장(소그룹 인도자)을 한 장로의 지도하에 두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한 장로가 3~4명 또는 5~6명의 구역장을 자기 관할에 두고 지도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장로가 매주 한 구역씩을 돌아보면 한두 달에 한 번씩 자기 관할하의 식구들을 다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몇 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진, 한 장로가 돌아보는 영역을 예를 들어 ‘지역’ 또는 ‘지구’라고 이름 짓는다면 장로가 ‘지역장’ 또는 ‘지구장’이 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성도들을 돌아보고 지도하는 일에 장로가 소외되지 않으며, 당회가 제 기능을 감당하게 되므로 장로교의 정치 원리에 벗어남이 없다. 오히려 장로들이 단지 결정만 하고 감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도들을 돌아보고 지도하는 일에 나서므로, 이것은 성경의 원리에도 맞고 장로교의 원리에도 맞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구역은 많고 장로 수는 부족한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당장 시행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책이기도 하다. 


3. 소그룹은 소그룹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구역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소그룹 모임은 그에 맞는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 교회는 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고, 구역은 구역으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 공예배와 성례식, 권징은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재정 운용과 교회적인 행사, 공동의회와 제직회와 당회도 다 교회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구역 모임에서 세례나 성찬을 행해서는 안 되며, 구역 모임이 공예배를 대신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헌금 사용에 대해서도 각 구역에서 독립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당회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 그리고 권징이나 치리에 관한 문제는 당연히 당회에서 다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역에서 다루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주된 것은 교제와 교육, 권면과 상담 등이 될 것이다. 교제는 중요한데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날마다 집에서 떡을 떼는 것(식사)을 통해 성도의 교제를 실천했다(행 2:42,46). 나아가서 서로 물건을 통용함으로써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참된 사랑을 실천했다(행 2:45, 4:32).

  

그리고 구역 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에서는 공예배 시의 설교에서 자세히 배울 수 없는 것을 소그룹 성경 공부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모르거나 궁금한 것을 질문할 수도 있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말씀을 배우는 것은 설교 못지않은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다. 이것이 또한 소그룹 모임의 장점인데, 이것을 통해 성도들 각자의 신앙상태와 생활을 점검하며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권면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장로(감독)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딤전 2:2). 장로의 주된 임무가 ‘양을 치는 것’인데 양을 치는 일이 곧 양을 먹이는 것이다(행 20:28, 벧전 5:2, 요 21:15-17). 곧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는 양을 치는 자로서 가르치기를 잘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장로는 그 동안 너무나 회의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구역을 돌보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장로의 본분을 소홀히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소그룹 운동이 성경 공부를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임무를 장로들이 맡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구역 모임(소그룹 모임)에서 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것은 권면과 상담이다. 디도서 1:9에 보면 장로(감독)의 직무 중에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것”이 들어 있다. 장로는 성도들을 각각 돌아보고 그들 개개인을 권면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 때 권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해야 한다. 자기 생각이나 인간적인 교훈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교훈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래서 장로는 말씀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 거스려 말하는 자가 있으면 필요한 경우에는 책망도 해야 한다. 이런 권면과 책망은 구역 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에서 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 물론 문제가 심각한 경우에는 모든 장로들이 모이는 당회에서 의논하고, 또 필요한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책망하거나 시벌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구역 모임에서 장로가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성도들의 개인적인 고민이나 갈등,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점들에 있어서 소그룹 모임은 전체 모임이나 예배에서 할 수 없거나 부족한 것들을 보충하고 가르치며, 성도간의 교제를 촉진하며, 개인적인 권면과 상담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며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일들의 성격상 그러한 것은 기본적으로 신약에서 말하는 장로의 직무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로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본래의 임무인 성도들을 돌보는 일(양을 치는 일 곧 목양)에 나서는 것이 필요하며, 그리할 때 현재 ‘가정 교회’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많은 문제점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며 오히려 더욱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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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병규, “한국 이단들의 종말 사상에 대한 비평과 제언”, 「바른 신앙」 11호, 서울: 유사기독교상담소, 2007, p.32

2)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서울: 나침반 출판사, 2006(초판 1996), p.29.

3)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30.

4)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30.

5)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19

6)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p.19, 148, 165; 또한 최영기, 「가정 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서울: 두란노, 1999, p.69: “그러나 가정 교회는 그 자체가 교회입니다. ... 그러나 가정 교회는 예배, 교육, 친교, 전도, 선교 등,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사역을 포괄적으로 다 합니다.”

7)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20.

8)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21

9) 「벨직 신앙고백」 27조: “Wij geloven en belijden één katholieke of algemene kerk. Zij is een heilige vergadering van de ware gelovigen.”

10)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XXV,i: “The catholick or universal church, which is invisible, consists of the whole number of the elect that have been, are, or shall be gathered into one, under Christ the head thereof;” 

11) Cf. J. A. Heyns, Dogmatiek, Pretoria: N. G. Kerkboekhandel Transvaal, 3판, 1984, p.387: “Die kerk is nie oral daar waar gelowiges saam is of hulle geloof bely nie.”

1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XXV,iv)은 이것을 “particular churches”(개별적 교회)라고 부른다.

13) 최영기, 「가정 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p.39.

14)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한국 복음주의 신약학 연구」 제2권, 서울: 도서출판 바울서신, 2003, p.228.

15) 정용성, “신약 가정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 「개혁 신학」(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논문집 제13권), 202, p.65.

16) 장동수, “신약 성서의 가정 교회”, 「복음과 실천」 37 (2006년 봄호),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출판부, p.43.

17)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 「신학정론」 38(20권 1호), 2002, p.59.

18) F. W. Grosheide, Handelingen, 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42, p.107. 

19)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3rd ed., rev. and ed. by F. W. Dank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s.v.

20) J. Calvin, The Acts of the Apostles, II, tr. by J. W. Fraser, Grand Rapids: Eerdmans, 1966, p.154(행 19:9 주석 중).

21) 정용성, “신약 가정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 p.66.

22) 정용성, “신약 가정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 p.67

23) Cf. F. W. Grosheide, De brief van Jakobus,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27, pp.401-406.

24) Cf. Grosheide, Jakobus, p.452. 

25) 가버나움에서 발굴된 주후 2, 3세기경의 회당에는 옆으로 쭉 나 있는 2층으로 된 긴의자들이 발견되었다. 어떤 사람이 바닥에 앉는다면, 그의 머리는 제일 높은 의자에 앉은 사람의 발 위치에 오게 된다고 한다(Dibelius; cf. Grosheide, Handelingen, I, p.453 n.4).

26) 예를 들면 정용성, “신약 가정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 p.65.

27)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30.

28) 최영기, 「가정 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p.41f.

29)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편사 te도 대비를 나타낸다. 여기에 사용된 kat! oi\kpon은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예를 들면 Polhill, Acts, p.121 각주 152; Bauer) ‘집집마다’(from house to house, 배분적 의미)가 아니라 그냥 ‘집에(at home)’를 뜻한다. Cf. Grosheide, Handelingen, p.100 각주 1; J. A. Alexander, A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Carlisle: Banner of Truth, 1857(repr. 1991), p.94f.: “But the best authorities are now in favour of explaining it to mean in the house or at home, as distinguished from the foregoing phrase, in the temple. This philological decision is confirmed by the repeated use of the same Greek words in Paul's epistles, to describe a church, or stated meeting of believers, in a private dwelling. (See Rom. 16,5. 1 Cor. 16,19. Col. 4,15. Philem. 2.)” 

30) J. Calvin, The Acts of the Apostles, I, tr. J. W. Fraser and W. J. G. McDonald, Grand Rapids: Eerdmans, 1965, p.89(사도행전 2:46 주석 중). 

31) 행 2:42에는 hJ klavsi" tou' a[rtou(the breaking of the bread)라는 명사적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서 눅 24:35에 한 번 더 나온다. ‘떡을 떼다’는 동사적 표현은 자주 나타난다(눅 22:19, 24:30, 행 2:46, 20:7, 11, 27:35, 고전 10:16 등). 

32) 가톨릭 주석가들은 대개 ‘성찬’으로 본다. Cf. J. A.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New York etc.: The Anchor Bible, 1998, pp.269, 270f.; J. Keulers, De handelingen der apostelen, Roermond en Maaseik: J. J. Romen & Zonen, 1952, p.73. 개신교 주석가들 중에서 이런 견해를 취하는 것으로는 I. Howard Marshall, The Acts of the Apostles,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9, p.83을 보라.

33) 대개는 ‘성찬’ 또는 ‘애찬’으로 본다. Cf. J. B. Polhill, Acts, Nashville: Broadmann Press, 1992, p.119(성찬을 좀 더 선호); Grosheide, Handelingen, I, p.95(애찬을 더 선호). 

34) 따라서 행 2:42을 정리하면, 1) 사도의 가르침을 받음; 2) 서로 교제함; 3) 떡을 뗌; 4) 기도함, 이렇게 네 항목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1) 사도의 가르침을 받음; 2) 서로 교제함 곧 떡을 뗌; 3) 기도함, 이렇게 세 항목으로 나누어야 옳다.

35) 이렇게 보는 학자로는 E. Haenchen(Acts, p.584), H. Conzelmann(Acts, p.23) 등이 있다. Cf. Fitzmyer, Acts, p.270f. 박윤선 박사도 그의 사도행전 2:42 주석에서 ‘떡을 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사랑의 교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사도들이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며, 또 그들은 사랑스러운 교제를 가졌으며, 또한 기도를 힘썼다는 사실이다.”(「성경 주석 사도행전」, 12판, 서울: 영음사, 1981, p.75)

36) Calvin, Acts, I, p.89(행 2:46 주석 중). 칼빈이 여기서 ‘검소함’의 개념을 끌어내는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칼빈은 여기의 ‘순전한 마음으로(ajfelovthti kardiva")’를 ‘절제(temperance)’의 개념으로 이해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오히려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정직하게’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Cf. Grosheide, Handelingen, I, p.100. 곧 오순절 날에 강림한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과 능력으로 모든 인간적인 장벽을 극복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성령이 주시는 순수한 기쁨으로 서로 교제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음을 보여준다(cf. 행 4:12). 

37) Cf. 로버트 뱅크스, 「바울의 공동체 사상」, 장동수 옮김, 서울: IVP, 2007, p.68.

38)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7.

39)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48.

40)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p.48-51.

41)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p.51.

42) J. Calvi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and to the Thessalonians, Grand Rapids: Eerdmans, 1973, p.322 (롬 16:4 주석 중)

43) Cf. F. L. Godet, Commentary on Romans, Grand Rapids: Keregel, 1977, p.490.

44) W. Hendriksen, Romans, I,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0, p.23; 

45) 예를 들면, S. Greijdanus, De brief van den apostel Paulus aan de gemeente te Rome, I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33, pp.663, 670; J. van Bruggen, Romeinen, Kampen: J. H. Kok, 2006, p.233(그는 세 곳의 모임 장소가 있었다고 본다) 등. 

46)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6f.

47)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53.

48)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53.

49) G.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7, p.830.

50)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52.

51) J. van Genderen-W. H. Velema, Beknopte Gereformeerde Dogmatiek, Kampen: J. H. Kok, 1992, p.627(여기서 저자들은 Heyns의 Dogmatiek, p.387을 참조하라고 제시하고 있다).

52) F. W. Grosheide, Eerste brief aan Korinthe,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32, p.40.

53)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말할 때에는 단수를 사용하였다(살전 1:1).

54)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의를 참조하라.

55)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52.

56)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7f.

57)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8

58)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s.v.

59) Cf. Grosheide, Handelingen, I, p.163.

60) Cf. Godet, Romans, p.501. Greijdanus도 Godet의 이 견해를 따른다.

61) Greijdanus, Romeinen, II, p.677.

62) 뱅크스, 「바울의 공동체 사상」, 장동수 옮김, 서울: IVP, 2007, p.75.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Paul's rather vague way of referring to meetings of the whole church suggests that it met less than once a week. Voluntary and cult associations met on a monthly basis; these larger Christian gatherings may well have followed suit.”(R. Banks, Paul's Idea of Community, rev. ed., Peabody: Hendrickson, 2004, p.34)

63)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7 각주 25. Cf. Banks, Paul's Idea of Community,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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