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위협하는 세력과 주제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 박광서 목사(큰사랑교회 담임)

우리가 잘 쓰는 한자성어 중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해 원전을 변용(變用)한 경우가 있다. 그로 인해 변용된 것을 원문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 대표적인 문구가 손자병법에 나오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는 뜻의 知彼知己 百戰不殆(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문구다. 충무공 이순신도 난중일기에서 百戰不殆(백전불태)百戰百勝(백전백승)으로 바꿔서 사용했다. 물론 그가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상황에 맞게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손무가 표현한 문구의 순서와 말하려는 의도다. 그는 첫 번째로 싸움에서 나보다 적()에 대한 정보파악이 우선임을 지적한다. 적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면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100%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님을 경계한다. 그렇게 할 때 적어도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패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두 가지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적실한 교훈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자.

 

1. 교회, 영적 자폐증 환자인가?

자폐증(自閉症) 환자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적인 현상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주변 환경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빛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혹시 이와 같은 자폐적 증상이 한국교회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세상에 어떤 악한 영적 기류가 흐르고 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기존에 했던 대로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며 정작 반응해야 할 부분에는 반응하지 못하는 무감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필자의 지나친 생각일까?

손무가 교훈한 두 가지를 적용해서 진단해보자. 먼저 생각할 것은, 교회가 영적 전투를 위해 적()에 대해 얼마나 알려고 하는가이다. 안타깝게도 불신자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노력만도 못한 것 같다. 필자가 볼 때 오늘날 이 사회와 교회를 파괴할 미혹의 영은 동성애와 이슬람이다. 만일 봉인되어 있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들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어느 아카데미 대표인 Y목사는 한국교회가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해 주도적인 혐오캠페인을 벌인다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개신교가 당면한 내부적 문제로 인해 사회적 신뢰도와 평판을 잃고 수세에 몰려 있는 와중에 이 주제들은 공세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이슈로 인식한 것이다.”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고 수세에 몰리니 그에 대한 반전의 수단으로 동성애와 이슬람을 이용하여 괴롭히고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불신자의 말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목사가 세속적 틀 이상을 보지 못하는 모습에 심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인간의 죄된 본성을 이해한다면 과연 동성애가 개인의 기호와 취향에서 멈출 문제일까?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신들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한다고 한다(1:32). 알면서도 행하고 그것을 조장하려는 동성애자들의 태도는 바울의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동성애가 가진 위험성은 동성애로만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다처, 다부일처, 근친혼, 수간 등의 전방위적 성적, 윤리적 부패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성적 타락의 범위와 깊이, 전염의 속도, 그리고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다. 우리는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이런 현상들이 목격하고 있다. 한국도 80년대의 인구정책의 실패로 인한 성비(性比)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2035년까지 젊은 남성들이 결혼하기 힘들다는 예측을 하고 있어 각종 성범죄와 더불어 동성애가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한번 열리면 걷잡을 수 없는 화마(火魔)가 될 것이다.

동성애자들이 볼 때, 동성애를 정죄하는 기독교는 눈엣가시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 파괴와 동성애 확산을 위해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그들은 먼저 1960년대 이후 탁월한 지성을 바탕으로 대학 강단부터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세대에 걸쳐 차근차근 동성애에 대한 친밀감을 갖게 만드는 Brainwashing , 세뇌 작업을 병행했다. 그렇게 지성세계에서 세뇌되며 자라난 세대들이 40여년이 지나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에서 수뇌부가 되었고, 엄청난 물질과 권력을 등에 업고 동성애 합법화를 위해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인 애플의 CEO 팀 쿡을 비롯하여, 구글, 나이키, 페이스북, 스타벅스 등 웬만한 다국적 기업은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반기문 UN사무총장도 그들의 홍보요원이다. 한국의 교육부는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까? 최근 성교육 정책 변경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세뇌되고 있다. 상황이 심각한데도 교회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마음이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역시 신비할 정도로 무지하다. 피곤을 느끼고 회피하려 한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도 심각할 정도로 무지하다. 사실 이슬람과 동성애는 공존할 수 없는 관계다. 이슬람 경전에 의하면 동성애자들은 죽여야 할 혐오의 대상이다. IS가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지 않는가. 그럼에도 무슬림들이 동성애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함이다. , 소수자의 인권보호의 내용에 종교를 포함시킴으로써, 비윤리적, 폭력적 특징을 가진 이슬람을 비판하지 못하게 하려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소수 종교인 이슬람이 다수 종교가 된다면 과연 동성애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슬람국가에서 보듯이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동성애자들처럼 이슬람도 오래 전부터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요 기독교와 뿌리가 같은 종교라는 식으로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켜 왔다. 그 결과 우리의 아이들은 Academic IslamPublic Islam의 실체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나마 최근 들어 이슬람의 실체를 바르게 인식해 가고 있음은 천만다행이지만 여전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에 있다.

 

2. 교회, 죽어가는 우물 안 개구리인가?

손무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지금 적에 대해 무지한 상태다. 적을 모른다는 말은 곧 자신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뜻이다. 제아무리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 있다 해도 이런 상태에서는 전투의 승패는 결정난 것이다. 실패는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자폐증의 두 번째 특징인 반복적 행위라는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 신학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허망하게 힘을 잃어가고 있다.

최근 들어 신학계의 학술발표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 내용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복음, 칭의, 언약, 율법, 성화, 교회, 종말 등 다양하다. 이런 주제들은 필요한 것이고 그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은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세계에 안주하여 힘을 소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더 많이 알고, 누가 더 고상하게 표현하는가를 자랑하며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신학적 논쟁들은 역사적으로 옷만 바꿔 입고 나올 뿐이지 동일한 내용들의 반복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죄인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뻔히 알면서도 힘을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소진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어 안타깝다.

최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전가교리에 관한 책이 인기 순위 탑을 점하는 것을 보며 아쉬움을 갖는다. 신학생들이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기초적 신학 지식이었던 내용들에 열광함은 무엇을 뜻할까? 신학교가 복음조차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수많은 학술논쟁을 반복하면서 정작 복음조차 정립시켜 주지 못한다면 신학 강단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말로 교회를 우물 안 개구리 만드는데 신학교가 한몫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 나온 사명자들이 신유와 축사와 기복신앙에 근거한 거짓복음에 마음이 가는 것은 필연적 현상일 것이다. 필자의 생각이 지나친 생각일까? 시대적 흐름도 꿰지 못하고 활력 없는 신학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교회를 침체시킨다면 철저한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3. 지금이 바로 신학자들이 분연히 일어설 때다

한국교회의 문제가 신학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학자들은 학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위클리프, 루터, 츠빙글리, 칼빈, 존 후스, 청교도와 같은 신앙의 선구자들은 하나같이 학문과 영성을 겸비했던 신학자들이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었고, 진리를 파수하고 교회를 지키려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았다. 순교를 각오한 신앙의 선배들이다. 오늘의 신학자들은 유럽과 미국교회의 실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서구교회의 현재는 한국교회가 수년 내에 마주할 미래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그동안 보여 온 그들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과 주제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큰 교회와 교회정치에 줄을 서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고 신학자가 해야 할 선지적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신학자들이 왜 일어서야 하는가? 그들이 일어서야 그들의 우산 아래 있는 미래의 사명자들이 일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교회의 영적 무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한 우호정책과 분위기가 형성되는데도 입을 닫고 항거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용 신학자이며, 기독교가 혐오 대상으로 내몰려 역차별을 받는데도 교회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벙어리 신학자요 가장 비겁한 삯군이다. 교회 없는 신학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참된 신학자는 교회와 진리파수를 위해 전방에 나서야 할 때는 분연히 나서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는 위기의 때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는 탁월한 지성을 불태울 용기가 있어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신학자는 누구보다 종말론적 시각에서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 역사를 거스르며 교회를 흔들려는 악의 세력이 무엇인지 주목해야 한다. 교인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법제화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한 학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누구보다 교회의 허물과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영적 대적은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오고 있다.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하다. 큰 일이 터지고 난 후 사후약방문의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손자병법이 말하듯이 철저한 준비가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위태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회가 있음에도 기회를 선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것이다.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성경적이고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영적인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누가 그 선구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박광서 목사는

인하대(B.A.)와 고려신학교(M.Div.)를 졸업했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석사(Th.M.)학위를 받고, 백석대 대학원에서 청교도로 박사(Ph.D.)학위를 받았다. 그는 급격한 세속화와 진리의 상실로 인해 신음하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변혁시킬 수 있는 글로벌 영적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하나님의 꿈을 불태우는 행복한 목사이다. 현재 부천 역곡 소재 큰사랑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차세대 리더 양육가이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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