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가정교회’는 우리 시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래서 필자에게도 미국 휴스톤의 서울 침례교회 최영기 목사로 부터 시원된 ‘가정교회’제도에 대한 교회사적 일람을 청하였으나 솔직히 필자는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 글 후반부에도 암시되겠지만 필자는 대학에 적을 둔 교수로서 신학대학원에 속한 교수와는 달리 교단 교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의무감에서도 비교적 자유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한국교회나 교단 현실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교단은 단 한 번도 고신대학 교수들에게 의견을 묻거나 연구를 위임한 일이 없고, 신학적 석명이나 해명, 혹은 평가는 신대원 교수회에 위임하여왔다. 이런 현실에서 필자는 연구의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한 논란의 현실에서 멀찍이 서 있었고, 침묵의 미덕에 익숙하게 되었다. 특히 이견이 용인되지 않는 교단 현실에서 고신의 교사이기보다는 한국교회의 교사가 되고자 노력해 왔다. 필자는 가정교회 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점에 대해서도 어떤 주장을 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란다.

  

이 글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가정교회’에 대해 집중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가정교회에 대한 어떤 기대를 한다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단지 이 문제와 관련된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헤아리는데 도움이 되는 교회 구조의 발전 과정을 설명한 소품일 뿐이다. 필자는 이런 방식으로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이런 초기 기독교의 교회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글 후반부에는 현금의 가정교회에 대한 필자의 몇 가지 생각을 첨기하였다. 필자의 논점 이탈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


1.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였을까?: 초기 3세기 동안의 교회구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모여서 예배와 교제, 성례를 행하고 신앙의 길을 갔을까? 오늘의 예배당과 같은 집회소로서의 교회당은 언제부터 생겨나게 되었으며 어떤 발전의 과정을 거쳐 갔을까? 이와 같은 의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공식적인 집회소로서 예배당 건물이 발견된 것은 256년 유프라데스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였다. 고대도시 두라(Dura)를 헬라인들은 유로포스(Europos)라고 불렀는데, 이곳은 영국군대에 의해 1920년 발굴되었다. 그 후 프랑스와 미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발굴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굴로 간주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기적인 집회소로 판단되는 교회당이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이 교회당 건물은 256년 이전에 건축되었는데, 칼 볼츠1)나 베인톤2)은 230년 혹은 232년경의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주택이었으나 후일 교회당으로 개축된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에는 욕조가 딸린 작은 세례실이 있어 이 집회소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 유적은 현재는 미국 예일대학 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처음 발견된 이 교회당이 230년경에 예배처소로 개조된 것으로 본다하더라도 이것은 일반화된 것은 아니므로 적어도 예루살렘에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이래 상당기간 동안 독립된 교회당 건물을 갖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오시에크(Carolyn Osiek)와 발취(David L. Balch)는 적어도 첫 150여년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예배를 위한 독립된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단지 필요한 경우 기존의 이용가능한 장소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3) 브래드리 블루(Bradley Blue)는 그의 “사도행전과 가정교회”(Acts and House Church)라는 글에서 4세기 초 곧, 콘스탄틴이 최초의 바실리카라는 교회당을 세우기까지 약 300여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독립된 건물로서 교회당이나 예배 처소를 갖지 않고 가정집에서 회집하는 가정교회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4) 이것은 블루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의 변천과정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교회당을 소유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이 가정집을 중심으로 회집하고 바울의 개종자들이 가정 중심의 공동체를 형성해 간 것은 회집할 다른 장소가 없었다는 불가피성 때문이 아니라(not by default alone)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유효한 장점들, 예컨대 안전이나, 공동식사와 교제를 위한 주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5)

  

리차드 크라우다이머(Richard Krautheimer)는 기독교회의 설립에서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받는 4세기 초까지(30-313)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처소, 곧 가정교회에서 바실리카까지는 3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쳐 왔다고 주장했다.6) 첫 번째 시기는 대략 150년까지인데 이 급진적인 발전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신자들의 가정집이었다. 두 번째 시기는 대략 150년부터 250년 어간인데, 이 시기는 개인 주택을 개조하여 전적으로 집회소로 사용하는 시기였다. 3번째 시기는 대략 250년에서 313년까지인데, 콘스탄틴에 의한 바실리카 교회당이 세워지기 전으로서 사적이든 공공의 것이든 큰 건물이나 홀이 집회소로 대두된 시기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개인의 가정집에서 개조된 가정집으로, 보다 넓은 홀이나 건물로, 그리고 바실리카교회당으로의 변천을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런 변천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초기 가정교회

어떤 점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별도의 집회소를 생각하지 않았고, 특별히 자신들의 종교적인 활동을 위해 건축된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다.7)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교회는 믿는 자들로 구성되는 것이지 건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8) 이들에게 있어서 에클레시아는 이름 그대로 ‘모임’(會)이었지 건물을 의미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시급한 과제는 제자삼은 일, 곧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증거 하는 것이었지 가시적 집회소로서의 가견적 교회당을 세우는 일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었고, 성도들의 모임이었지 건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교의 관행처럼 신전(temple)과 같은 종교적 목적을 위한 별도의 건물 취득을 추구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정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던 보다 우선하는 이유였다. 이런 의식에 영향을 준 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였다.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는 이 땅에서의 제도로서의 교회당을 요구하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별도의 예배처소에 대한 암시나 요구가 없다.

  

둘째, 이 당시는 가정(house) 혹은 가문(household)은 하나의 기본적인 정치 단위였기 때문에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했고, 특히 안전을 보장하고 있어 신교(信敎)의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았던 이 시대에 회집하기 좋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9) 이 점은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 양식이나 발전에 지대한 의미를 주고 있다. 이 당시 ‘가문’이라고 할 때 그 가속(家屬)은 직계 가족 만이 아니라 노예나 해방된 노예, 일꾼, 때로는 소작인이나 동업자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조직이었다.10) 이들에게 있어서 가정집은 그리스도인들의 안전과 공동식사 등 신자들의 교제에 유용한 환경이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선교활동에서 이런 가정 중심의 복음운동의 다양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11)

셋째, 초기 그리스도인들, 특히 4세기 이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탄압받는 공동체였고, 교회 공동체 이름의 합법적인 제산 취득이 용이하지 않았다.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이들은 왕왕히 정치적인 집단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Cristianou,j,, christianos)으로 불렸는데, 이 말이 라틴어라는 점에서 로마인들에 의해 불려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라틴어로 그리스도당파(partisan of Christ)라는 정치적인 용어였다.12) 초기 그리스도인들인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인 집단으로 간주되었다는 중요한 증거를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저들의 불확실한 법적 지위 때문에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예배당과 같은 제산의 취득은 시급한 요청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는 개인주택이었다. 이것은 오늘의 중국에서의 경우처럼 탄압받는 시대에서 교회의 생존 모델이기도하다. 그 후 신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오직 예배를 위해 봉헌되는 주택이 필요하게 되었고, 앞서 언급한 바처럼 두라-유로포스에서 교회당이 발굴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초기 기독교회는 가정교회로 출발하였다는 점이다.13) 신약성경과 가버나움, 로마, 켄트(Kent)에서 발견한 고고학적 증거는 이 점을 분명하게 증거 해 준다.14) 신약성경에는 여러 지역에 가정교회(domus ecclesiae)15)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여러 흔적들이 있다. 그러나 한 지역 내에 가정교회들이 수나 가정교회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정보는 매우 빈약하다.16)

  

예루살렘에서의 가정교회

우선 사도행전 1장에서 5장 사이에 보면 첫 기독교 공동체는 가정교회로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데, 특히 2:43-47, 4:32-37, 5:12-16, 5:42을 보면 이들은 개인 집에 모였음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들어가..... 다락에 올라가니(εἰς τὸ ὑπερῷον)..... 그 모임에는(ἐπὶ τὸ αὐτό) 약120명이 모였다”고 했다(행1:13-4). 누가는 이 곳을 마가라고도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했는데, 이곳이 예수님의 승천 후 11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였던 다락방(행1:13)이었고 맛디아를 선출하고(행1:26)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행2:2).


그런데 누가는 사도행전 2장 1절,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에서 ἐπὶ τὸ αὐτό를 사용하고 있는데, ἐπὶ τὸ αὐτό를 쓸 때 누가는 (행1:15, 2:1, 고전11:20, 14:23에서 보는 바처럼) 의식적으로 어떤 장소에서 회집된 그룹을 지칭하던지, 아니면 사도행전 2장 47절에서와 같은 일반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의미하던 간에 ‘기독교공동체의 모임’(the assembly of the Christian community)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ἐπὶ τὸ αὐτό라는 표현은 1세기와 2세기 교부들의 문헌에서도 계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누가가 이 표현을 통해 의도했던 의미를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17) 즉 이들이 회집했던 ‘한곳’은 개인의 가정집이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은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암시되거나 시위되고 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바울의 기독교 박해를 보도하는 사도행전 8장 3절에서, “바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여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기록에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th.n evkklhsi,an th.n evn ~Ierosolu,moij, 행8:1)를 탄압할 목적으로 “각 집마다 찾아다닌 것”(kata. tou.j oi;kouj eivsporeuo,menoj)과 “남여들을 끌어 간 것”은 남여들로 구성된 가정교회의 성격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모였던 바로 그 ‘집’으로서, 이곳은 은밀한 가정교회였음이 분명하다. 이곳은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던 곳”으로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였다.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가 이곳으로 찾아간 것을 보면 이곳은 예루살렘의 주된 집회소였음을 암시하고,18) 천사가 이곳까지의 길을 안내한 일이나(행12:10), 로데라는 여종이 영접하려 나온 일(12:13),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집에 모여 있었다는 점(12:14-15)과 베드로가 놀란 성도들을 진정시킨 일(12:17), 특히 헤롯 아그립바의 군대가 출옥한 베드로 수색에 실패한 점은 이곳은 예루살렘의 여러 가정 교회 중 가장 중심되는 집회소이자 은밀한 가정교회였음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투옥 및 출옥과 관련한 이 본문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이적적인 석방에 대해 보고한 후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VIakw,bw| kai. toi/j avdelfoi/j)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eivj e[teron to,pon) 갔다”(12:17)는 기록은 야고보가 중심이 된 다른 가정교회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점은 제3의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19)

  

흥미로운 사실은 예루살렘에 다수의 가정중심의 그리스도인 집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의 교회, 곧 예루살렘교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누가가 장로 또는 감독을 해 지역의 개별적 집단과 관련시키지 않고 그 도시에 관련시키는 것을 볼 때 분명하다(행14:23, 20:17).20) 이 점은 바울의 경우에도 동일하다(딛1:5). 바울이 한 지역, 특히 로마시의 경우에 복수의 가정교회가 있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서신을 보내지 않고 하나의 서신을 그 도시에 보낸 것은 그 모든 가정교회는 오직 하나의 로마교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이 가정교회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지 않고  연합되어 한 지역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방 지역의 가정교회

가정교회에 대한 흔적은 사도행전 13장 이후에도 산재해 있지만21) 바울서신에는 보다 분명하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정 중심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베소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중심이 된 가정교회가 있었다. 이 점은 바울의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한다”(avspa,zetai u`ma/j evn kuri,w| polla. VAku,laj kai. Pri,ska su.n th/| katV oi=kon auvtw/n evkklhsi,a,)고전16:19)는 언급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린도에는 하나의 지역교회와 여러 가정교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고전1:14)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던 인물(행18:8)임을 고려해 볼 때 자기 집이 가정교회로 제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이오는 “온 교회 식주인”(the host of the all the church, 롬16:23)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에 후의를 베풀었던 인물이었다. 이 점은 가이오의 집이 가정교회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to.n Stefana/ oi=kon) 세례를 베풀었는데(고전1:16), 스데바나의 집은(th.n oivki,an Stefana) 아가야지방의 첫 열매라고 소개한다(고전16:15). 그의 집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자”라는 바울의 언급에서 그의 집이 가정교회로 제공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는 하나 이상의 교회가(살전5:27),22) 라오디게아에도 하나 이상의 가정교회가 있었음(골4:15)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23)


가정교회와 관련한 바울 서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울은 로마시에 적어도 세 개 처 이상의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롬16:5, 14, 15).24)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문안의 편지인 로마서 16장은 일종의 추신으로서 초기 가정 교회에 관한 중요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함께 일했던 26명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문안하고 있는데,25) 이 문안은 개인이나 가정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에 대한 그룹들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16장에는 적어도 3개 처의 가정 교회들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th.n katV oi=kon auvtw/n evkklhsi,an, 롬16:6)이다. 지도자가 유대인이어서, 아마도 유대인 기독교인의 가정교회인 것으로 보인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처럼 장막을 만드는 사람으로서(행18:3), 특정 지역에 정주(定住)하지 않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였다.26) 즉 본도에서 출생한 그는 로마에 거주하다가 클라우디우스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고린도로 이주하였고(행18:2) 다시 에베소로 옮겨갔으나(행18:18), 다시 로마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 부부와 접촉하게 되었고, 이 부부 집에서 가정교회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부는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이거하여 그곳에 다시 가정교회를 세웠다(고전16:19). 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로 이거하였고, 그곳 자신의 집이 가정교회로 제공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아순그리도, 블레곤, 헤메, 바드로바, 허마, 그리고 그들의 형제들을 포함하는(tou.j su.n auvtoi/j avdelfou,j) 가정교회이다(롬16:14). 이들 모두의 이름이 헬라어라는 점이서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앞의 세 명은 동부 그리스 출신이고, 바드로마와 허마는 로마의 노예 이름이라는 점에서 노예이거나 해방된 노예였을 것이다. 아순그리도, 블레곤, 헤메, 바드로바, 허마로 대표되는 신자들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의 가정교회는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의 자매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하는 모든 성도의 교회이다(롬16:15). 율리아는 라틴 이름이고, 나머지는 모두 헬라어 이름이다. 율리아는 ‘해방’이라는 라틴 이름을 얻은 헬라인 노예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빌롤로고와 네레오는 로마에서 흔한 노예의 이름이다. 네레오가 그의 자매를 알았다는 사실은 그와 그의 자매가 해방된 노예의 후손이였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그래서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의 자매 올름바로 대표되는 신자들은 다른 ‘성도들’과 함께 하나의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의 3개 처의 가정교회 중 첫 번째는 대다수가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였으나, 다른 두 개처의 가정교회는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노예나 해방된 노예들로 구성된 이방인들의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세 개 처의 가정교회 중에서 다른 두 교회는 주안에서 아리스도불로의 식솔들과 나깃수의 식솔들을 나타내는 10절과 11절에 소개되어 있다. 이들 종들이나 자유민들은 그들 자신의 가정을 중심으로 회집했던 것이다.


말허비는 바울의 목회서신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가정 중심의 공동체였고 가정교회 형태였다는 점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고 이해했다.27) 바울의 후기 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목회서신에서는 이단의 출현과 가정에로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는데(딤후3:16, 딛1:11), 이 서신에서는 ‘오이코스’와 그 동족어가 매우 빈번히 나오고 있다(딤전3:4,5,12,15; 5:4,8,13,14; 딤후2:10; 딛1:7,11 등).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고 있고(딤전3:15, 딤후2:20), 직분자의 자격을 말할 때마다 가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딤전3:4-5,12, 5:4). 이런 가정에 대한 강조가 당시 교회가 가정교회적 형태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보고 있다.

  

어떻든 신자의 가정집을 집회소로 하는 가정교회 형태는 2세기 중엽이나 2세기 말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28) 이 경우 집을 소유한 비교적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권속들의 후견인(patron)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정집의 경우 회집할 수 있는 인원은 50여명 미만이었을 것이다.

  

112년 경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는, 기독교의 확산을 보고하면서 “이 미신의 전염성은 도시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마을과 농촌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했는데,   블루는 이런 가정중심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갈리리 해변에서 시작된 기독교운동을 로마의 변방까지 신속하게 확장하게 했던 유효한 요인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29) 


2) 그 이후의 변천

그러다가 2세기 중엽을 거쳐 가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집회소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데, 기존의 개인의 가정집을 수리, 확장, 혹은 개조하여 전적으로 종교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교회(domus ecclesiae)가 대두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보다 편리한 회집과 예배를 위한 자연스런 발전이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두라 유로포스에서 발견된 가정교회였다. 이 가정교회는 두 방 사이의 벽을 허문 직사각형의 구조로서 5.15X12.9미터의 크기의 65명에서 75명까지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30) 이런 변화와 함께 기독교 예배는 가정교회적인 환경과는 다른 공적인 예전에 따라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건물을 개조하거나 확장하여 보다 넓은 홀로 변천하는 이 시기의 집회소를 미카엘 와이트(Michael White)교수는 aula ecclesiae, 곧 “교회의 홀”(hall of the church)이라고 불렀다. 즉 aula ecclesiae ‘교회의 집’(house of the church)이란 의미의 domus ecclesiae 혹은 하르낙이 Saalkirched라고 불렀던31) 그 이후 시기의 집회소를 칭하는 말이었다. 와이트에 의하면 가정집의 개조에서 콘스탄틴 시대의 바실리카로의 전환이라는 일반적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도리어 그는 aula ecclesiae가 어떤 지역에서는 5세기까지 잔존했던 곳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32)

3세기 말까지는 여전히 개조된 가정교회가 중심을 이루지만 크라우다이머(R. Krautheimer)의 지적처럼 약 250년을 경과해 가면서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249년에 황제가 된 데시우스(Decius)는 기독교가 별로 전파되지 않는 다뉴브 강 유역인 북부 출신으로서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로마의 예 명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은 로마가 옛 신들을 버린 결과로 보아 이교의 부흥을 의도했다. 이것의 그의 종교정책의 기반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에 적대감을 가지고 250년부터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순교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배교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증명서(libelli)를 발급하는 등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했으나 251년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데시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친구 발레리안(Valerian)이 황제가 되어 전임자의 정책을 고수했다. 그도 곧 야만인(페르시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가 260년 황제가 되었다.

  

갈리에누스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확대되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면서 기독교에 대한 통제나 박해가 유효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해제함으로서33) 디오클레티안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가 재개되기까지 교회는 40년 간 비교적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260년 이후 약 40년 동안, 특히 270년에서 303년까지 개종자들이 늘어났고, 그 필요에 따라 여러 지역에 별도의 집회소로서의 교회당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집회소로서의 교회당 건축사에서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Gallienus)는 260년 혹은 261년에 발표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해제하는 그의 칙령34)에서 “박해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예배장소’(place of worship)에서 떠나야 한다”고 말할 때(ὅπως ἀπὸ τών τόπων τών ϑρῃσκευσίμων ἀποχωρήσωσιν. ... ) ϑρῃσκευσίμω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단어(ϑρῃσκεύσιμος)는 약 6천만어에 달하는 헬라어 단어 중에 유세비우스의 기록에서 오직 단 한번 밖에 사용되지 않는 단어(hapax)인데, 여기서 말하는 ‘예배의 장소들’은 그랜트의 해석처럼35) 예배를 위해 독립적으로 세워진 교회당이라기보다는 가정교회 혹은 그 다음 시기의 집회소였던 보다 확장된 가정 교회였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250년을 경과해 가면서 여전히 가정교회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고 점차 별도의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3세기 중엽이후 점차 별도의 집회소로서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데, 유세비우스는 303년 이전에도 과거의 건물에 만족하지 않고 건축기금을 사용하여 모든 도시에 보다 큰 교회당을 세우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36) 이 진술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콘스탄틴 이전 시대에 이미 어느 정도의 교회당 건물, 곧 바실리카들(basilicas)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그랜트는 지적하고 있다.37) 그러나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은 없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에클레시아 라는 용어가 회(會), 혹은 모임으로만이 아니라 적어도 270년 전후부터는 건물을 칭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VIII권 2장은 ‘교회당의 파괴’를 취급하고 있는데,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재위 284-305) 황제는 재위 19년, 곧 303년 9월에 칙령(βασιλικὰ γράμματα, an imperial letter)을 내려 교회당을 파괴하고, 성경을 불사르게 하는 등 혹독한 박해를 시작하였고, 고위직에 있는 신자들을 공직에서 축출하고 공민권을 박탈하는 등38) 박해가 약 10년간 계속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교회를 '기도하는 집'(house of prayer, οἴκους  ἐζὕψους)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교회당의 파괴를 말할 때 교회당을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ς)라고 말함으로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후일에는 건물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39) 이 점은 이보다 약간 앞선 3세기 말 교회당의 파괴를 말할 때도 유세비우스는 에클레시아를 사용하고 있다.40) 


3) 바실리카의 출현

313년 기독교의 공인, 곧 밀란 칙령은 그리스도인과 기독교회의 날들과 일들(days and works)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동시에 교회당 건축에도 엄청난 변화를 주었다. 밀란칙령의 내용은 다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독교를 공인과 함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기독교회들과 묘지, 기타 재산을 돌려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 기독교회는 불법의 집단이 아니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고, 공개적인 활동이 보장되었다. 기독교는 점차 제국의 종교로 변모되어 갔다. 

  

기독교의 공인 당시 제국 내의 기독교 인구는 약 10%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41) 곧 그 수효는 크게 증가해 갔다. 콘스탄틴의 전임 황제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듯이 콘스탄틴도 유사한 이유에서 기독교에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4세기 초 가정교회들의 파괴, 그리고 새로운 재건의 필요성은 기독교 인구의 증가와 함께 교회당의 건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재산이나 유산을 기증 받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므로 새로운 형식의 교회당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틴 이전의 예배당은 단순하고 소박한 개조된 가정집에 불과했으나, 콘스탄틴과 그 후계자들이 건축한 교회당은 소위 ‘바실리카’(Basilica)라고 불리는 직사각형의 규모가 크고 찬란한 건축양식이 나타났다. 바실리카42)란 벽으로 둘러 싸여 있는 직사각형의 초기 교회당 건축양식을 의미하는데, 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개방된 홀(hall)이 있고, 줄을 맞추어 기둥이 세워져 있는(列柱) 건축형식을 의미한다. 이런 양식은 기독교 이전 시대 아탈리아나 로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었는데, 줄을 맞추어 세워진 기둥 위에 지붕을 덮은 공공건물이나 시장 등이 그것이다. 호주 시드니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퀸 빅토리아 빌딩과 같은 건축양식을 의미한다. 이제 교회는 기존의 바실리카를 교회당으로 사용하거나, 바실리카형식의 교회당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블루의 지적처럼 4세기 초의 바실리카의 출현은 교회당 양식 혹은 기독교 건축사의 분수령이 된다.43)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교회 건물들은 3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아트리움(atrium), 회중석(naves) 그리고 성소(sanctuary)가 그것이다. 아트리움은 벽돌에 의해 둘러싸인 사각형의 형태를 띤 입구이며, 회중석은 바실리카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며, 성소는 회중석 끝에 위치하였고 그 바닥이 한층 높았다. 성소에는 예식을 주관하는 목회자들을 위한 좌석이 있었는데 감독을 위한 좌석을 ‘보좌’(cathedra)라고 하였는데 이 단어로부터 ‘성당’(cathedral)이라는 용어가 파생되었다.


워드-퍼킨스(J. B. Ward-Perkins)는 콘스탄틴 이전 시대의 기독교회에는 콘스탄틴이나 그 이후 시대 바실리카의 모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볼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고, 로마의 캘리안 언덕 위에 세워진 성 존 라테란(St. John  Lateran)교회는 황제의 지휘 하에서 세워진 최초의 견고한 교회당(the first substantial church)으로서 기존의 주장과는 달리 초기 기독교의 전향적인 형태의 바실리카로 건축되었다고 주장한다.44) 이 교회당은 314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45) 그러나 흔히 315년 경 두로에 세워진 바실리카는 가장 대표적인 교회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교회당의 건축은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변화였고, 그 후 콘스탄틴은 로마에 7개처에 교회를 건축하고, 콘스탄티노플에는 '성스러운 평화'라는 이름의 세인트 아일린 교회당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베들레헴에 성탄교회를, 그리고 감람산교회도 건축하였다. 제국의 중요도시에는 큰 교회당이 건축되었는데, 이러한 정책은 자기 이름을 남기고자 했던 콘스탄틴과 그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지금은 이 당시에 건축한 교회당이 거의 파괴되었지만 그 기본 구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증거들이 남아있다. 문제는 이런 외형적인 교회당의 웅대함과 찬란함 속에 진정한 경건과 믿음은 점차 사라져 갔다는 점이다. 크리소스톰과 같은 교부는 이런 외적인 치장을 경계하고 있었다.


2. 가정교회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현금 논란이 되고 있는 가정 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수적 성정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여 교회의 수적성장을 제일의적 과제로 지향하여 왔다. 이런 현실에서 형성된 교회 구조는 다른 많은 가치들을 상실했다. 무엇보다도 대 교회 구조 속에서 교회의 진정한 교제가 상실되거나 약화되고 전도나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구조를 상실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교회구조에 대한 요구가 표출되었는데 그런 한 가지 현상이 가정교회라고 생각된다. 이런 현상은 교회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런 일이라고 하겠다. 또 가정교회가 다락방전도운동, 빈야드 운동, 열린 예배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논란을 와중에 있다. 이 점 역시 자연스런 현상이다.

  

근본적으로 교회구조, 목회형태는 불변적인 어떤 고정된 구조나 체제는 아니다. 목회 형태의 경우, 오늘의 정착목회가 있기 전에 바울이나 사도시대의 순회(巡廻) 혹은 순행(巡行)목회에서 잠정적인 기간을 거쳐 오늘의 정착목회로 변화를 겪어 온 것이다. 목회자들도 자급목회에서 과도기를 거쳐 현재의 형태로 변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

  

물론 장로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지만 장로교회의 신학과 예배, 의식 등 장로교회의 예배와 교회구조도 16세기를 거쳐 제도화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나 목회자가 부족할 때 잠정적 직분으로 독경사(Reader)가 있었고, 장로교 치리제도를 지향하면서도 잠정적인 감독 제도를 유지했던 경우도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새로운 제도는 항상 상당한 저항과 반대에 직면했다. 그 한 가지가 영국교회적 상황에서 조지 휘필드에 의해 시도된 옥외집회(open air preaching)였다. 18세기 중엽의 성직주의적인 영국교회에서 볼 때 옥외집회는 기독교의 속화이자 교회 구조의 파괴였다. 엄청난 비난이 있었으나 휫필드는 1739년 2월 17일부터 옥외집회를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 저조한 예배참석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지만 예전적 형식주의에 빠져 복음화의 사명을 망각한 현실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동시에 자신(부흥운동)을 반대하는 영국국교회의 벽을 넘는 방안이기도 했다. 휫필드는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전도하며 옥외에서 설교하였던 예수님의 설교를 옥외집회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했으나, 당시 교회는 복음의 변질을 초래한다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당시 교회로서는 상상도 못한 방법이었으나 옥외설교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구체적인 예가 브리스톨 근처 킹스우드(Kingswood)지방 광부들에게 향한 설교였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약 2만명이 운집할 정도로 전도의 실효를 시위하였다.46) 당시 교회가 무관심하거나 무시했던 광산 도시에서의 회개와 회심의 역사는 일순간에 영국교회를 긴장시켰다. 1739년 4월에는 런던에서도 야외설교를 시작하여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다.47) 당시 교회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나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 1780-1847)는 야외설교의 시행을 ‘공격적 방법’(aggressive system)이라고 칭했다.


가정교회 운동은 셀교회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있었던 여러 목회방식 중의 하나로서 일종의 목회 프로그램이라고 생각된다. 변화된 환경은 새로운 목회 방식을 요구하는데, 가정교회는 이런 현실의 반영이고 이런 방식 또한 한 시대의 유행일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가정교회’가 침례교 목사에 의해 시원하였고 그것이 침례교적 배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회중주의적 제도이며 장로교회에서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전통적 교회 구조와의 단절이 강조될 수 있다는 점, 직분과 사역의 괴리 혹은 장로교 치리회 기능의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는데, 이런 점들에 대한 보완을 통해 기존의 교회 구조나 제도가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한 점들을 효과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효과적인 교회 형태로 수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가정교회가 가져온 가장 큰 거부감은 사실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행정적인 문제였다. 즉 기존 치리회의 권위를 약화시킨다는 지적이었다. 기존 직분자들의 역할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구역 제도를 활성화하는 방안으로서의 가정교회는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이 ‘가정교회’를 독립적이고 완전한 교회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가정교회라는 소그룹을 교회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지 교회에 속한 소그룹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다고 할 수 없다. 이럴 경우 교회 안의 교회가 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가정 교회'는 구역구조의 쇄신이자 보완의 성격이 강한데, 가정교회라는 용어 자체가 상당한 혼란과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을 겸허히 수용하고 발전적으로 보안해 가면 ‘가정교회’는 우리 시대 교회에. 특히 성도간의 교제의 회복, 불신자 전도 등 전도기능의 회복 등 초대교회적 교회관을 회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복하지만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지 않는 채 현대 교회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제도로 보완해가면서 장로교 제도 안의 가정교회(용어도 고려해 볼만하다)로 건실하게 발전하도록 보완해 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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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 볼츠(박일영 역), 「초대교회와 목회」, (컨콜디아사, 1974), 97.

2) R. H. Bainton, The Church of Our Fathers (The Westminster Press), 3장 참고.

3) Carolyn Osiek and David L. Balch, Families in the New Testament Worl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33. 이 점은 Richard Krautheimer가 그의 Early Christian and Byzantine Architecture (NY: Penguin Books, 1979), 24-25쪽에서 가정한 교회당 건축의 첫 단계의 기간과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

4) Bradley Blue, "Acts and the House Church," The Book of Acts in Its Graeco-Romam Setting, eds., David W. J. Gill and Conrad Gempf (Eerdmans, 1994), 120.

5) Ibid., 121.

6) R. Krautheimer, “The Beginning of Christian Architecture," Religious Review 3 (1939), 144-59. Blue, 124에서 중인.

7) 이 점은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는데, 특히 A. J. Malherbe, Social Aspects of Early Christianity, 68-9,  R. M Grant(김쾌상역),  「초기기독교와 사회」(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159.

8) Robert M. Grant, Early Christianity and Society (London: Collins, 1978), 149. 그랜트는 이런 입장의 견해를 피력하는 초기(교부) 문헌으로는 Clement, Stramata, VII, 28-29. Minucius Felix, Octavius, 32.1를 소개하고 있다.

9)  Malherbe, 69.

10) Wayne A. Meeks, The First Urban Christians, 75-76. 이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로마군대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의 집’이었다. 고넬료는 "온 집으로 더불어"(su.n panti. tw/| oi;kw| auvtou)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으로서(행10:2),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tou.j suggenei/j auvtou/ kai. tou.j avnagkai,ouj fi,louj)을 모아 베들로의 설교를 듣게 했는데 그가 이해한 "온 집"(pa/j o` oi=ko,j)은 직계가족만아 아니라 그의 휘하의 종이나 노예까지 포함하는 가속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속을 의미하는 라틴어 familia는 법적 통제력을 지닌 이의 직계 가족만아 아니라 그 하속인을 포함했다. Carolyn & Balch, Families in the New Testament Worl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287.

11) 그 예로 사도행전16:15, 31ff. 17:6, 18:1-8, 롬16:3ff. 고전1:14-16, 16:19, 몬2 등을 들 수 있다.

12) ‘그리스도인’이란 말(Cristianou,j, christianos)는 라틴어이다. 만일 헬라어였다면 그리스도(christos)의 형용사형은 christesios 나 christites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문법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그런데 christianos로 된 것을 보면 이것은 로마식 표기임을 알 수 있고, 로마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이렇게 불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즉 기독교인들을 정치적 당파 혹은 정치적인 집단(a political partisan)으로 이해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 점은 마치 아우구스트스(Augustus)를 따르는 이를 아우구스티아노스(Augustianos, 혹은 Augustianus), 곧 아우구스트스의 정파(a political partisan of Augustus)로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정치적인 용어였기에 신자들은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았고, 적어도 2세기 중엽까지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 흔적이 드물다.

13)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에 대한 연구의 선구적인 인물은 플로이드 필슨(Floyd V. Filson)인데 그는 1939년에 발표한 “초기 가정교회의 의의”(The Significance of the Early House Churches,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LVIII, 105-112)이라는 논문에서 가정교회에 대한 연구는 5가지 점에서 사도시대의 교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해석했다. 첫째, 그리스도교회의 예배가 유대교의 관행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는 사도시대 초기부터 유대교와 뚜렷이 구분되는 그리스도교적 예배와 식탁교제를 가능 케했다는 점, 둘째, 가정교회는 바울서신과 초기 기독교 문서에 나타난 가정생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 셋째, 한 지역에 몇 개의 가정교회가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은 사도 시대에 일종의 당파적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는 점, 넷째, 가정교회의 상황에 대한 연구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회적 신분에 대한 빛을 던져 주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교회 정책의 변천과정은 가정교회에 대한 연구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F. Filson, 109-112). 종합적으로 말하면 필슨은 가정교회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도시대의 교회상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14) 이와 관련된 주요한 기록으로는 Bradley Blue, "Acts and the House Church," The Book of Acts in Its Graeco-Romam Setting, eds., David W. J. Gill and Conrad Gempf (Eerdmans, 1994), 19-22가 있다.

15) 문자적으로는 ‘교회의 집’(house of the church)이란 말인데,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Adolf Harnack으로 알려져 있다. L. M. White, Building God's House in the Roman World: Architectural Adaptation among Pagans, Jews and Christians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154. n 36. 흔히 이 용어는 개인 가정집(private house church)에서의 회집에 이은 가정교회의 두 번째 단계를 칭하는 용어로서 가정집을 개조하여 전적으로 집회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 경우의 가정교회를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domus ecclesiae, oikos ekkesiae, titulus는 근본적으로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titulus는 특히 법률적인 용어였다. 

16) A. Harnack,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NY, 1908), 442ff.

17) Bradley Blue, 132. 예를 들면 바나바서신(The Epistle of Barnabas, 4.10)에서는 함께 모이는 신자들을 ἐπὶ τὸ αὐτό συνερχόμεγοι라고 말했다. 익나티우스는 “회집된 신자들”(assembled believers)을 칭하는 의미로 이 표현을 자주 썼다. 그는 에베소교인들에게 보낸 편지(Epistle to the Ephesians, 13.1)에서 함께 나아오는 신자들을 권면하면서 ἐπὶ τὸ αὐτό γίνεσθε라고 썼다. 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the Magnesians, 7.1)에서도 신자의 ‘모임’에서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ἐπὶ τὸ αὐτό μία προσευχή.....라고 썼다. 이 말은 하나의 공동 기도라는 의미가 아니고, ‘모임에서 하나의 기도가 있게 하라’(in the assembly, let there be one prayer...)라는 뜻이다(Bradley Blue, 132, footnote 49).

18) F. F. Bruce, The Book of the Acts (Eerdmans, 1979), 251. 

19) Filson, 106.

20)  Malherbe, 70.

21) ‘가정’은 바울의 목회사역의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자였던 바울은 집집마다 들어가 그리스도인들을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고(행8:3), 회심한 후 바울은 다메섹의 유다의 집(행9:11, 17), 데살로니가의 야손의 집(17:5), 드로아에 있는 집(20:8), 에베소의 여러 집(20:20), 가이샤라 빌립의 집(21:8), 예루살렘의 나손의 집(21:16)에 기거하고 가르치고 환대를 받았다. 이런 집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집회 장소였을 것이다. 참고, John Stambugh and David Balch, The Social World of the First Christians (SPCK, 1986), 139.

22)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5장 27절에서,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avnagnwsqh/nai th.n evpistolh.n pa/sin toi/j avdelfoi/j)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시내에 하나 이상의 가정교회 그룹이 있었다고 인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말허비는 데살로니가 시내에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가정교회 그룹이 있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말허비,「초대기독교의 사회적 이해」(대한기독교서회, 1994), 146. 각주 28. 참고. 

23) Malherbe, 70, Ernst Lohmeyer, Die Briefe an die Kolosser und an Philemon (Göttingen, 1956), 169ff. W. G. Kümme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Nashville, 1965), 238. 큄멜은 골로세서 4장15,17절과 빌레몬 2절에 근거하여 골로새에는 두개의 가정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킴멜은 눔마(Nympha, 4:15)가 골로새 시내에 살았다고 보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녀는 라오디게아에 살았다고 보고 있다.

24) E. A. Judge, The Social Pattern of the Christian Groups in the First Century (London: The Tyndale Press, 1960), 36; Malherbe, 70; Sanday & Headlam, Epistle to the Romans, 421을 참고할 것.

25)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대한 정보를 위해서는 Earle E. Ellis, "Paul and His Co-Workers," New Testament Studies, XVII (1971), 437-452, P. Lampe, "Roman Christians," 216-230을 참고할 것.

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한 성경 기록으로는 사도행전18:1-3, 18, 26, 고린도전서16:19, 로마서 16:3 등이 있다.

27) 말허비, 143-4.

28) Carolyn Osiek and David L. Balch, 35.

29) Blue, 120.

30) Carolyn Osiek and David L. Balch, 35.

31) L. M. White, 22, 128, 155 n.49.

32)  L. M. White, 23-24. Carolyn Osiek and David L. Balch, 236.

33) Eusebius, VII, 12.1. "Short after this Valerian was reduced to slavery by the barbarians, and his son having become sole ruler, conducted the government more prudently. He immediately restrained the persecution against us by public proclamations, and directed the bishops to perform in freedom their customary duties,"

34) 요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인용된 칙령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The Emperor Caesar Publius Licinius Gallienus Pius Felix Augustus to Dionysius, Pinnas, Demetrius, and the other bishops. I have ordered the bounty of my gift to be declared through all the world, that they may depart from the places of religious worship. And for this purpose you may use this copy of my rescript, that no one may molest you. And this which you are now enabled lawfully to do, has already for a long time been conceded by me. Therefore Aurelius Cyrenius, who is the chief administrator of affairs, will observe this ordinance which I have given."  Eusebius, VII, 12.1.

35) Grant, Early Christianity and Society (London: Collins, 1978), 149.

36) Eusebius, VII. 1. 5.

37) Grant, 150.

38) 이 점에 대한 기록은 Eusebius, The Ecclesiastical History Vol. II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258-259를 보라. “It was in the nineteenth year of the reign of Diocletian, in the month Dystrus, called March by the Romans, when the feast of the Saviour's passion was near at hand, that royal edicts were published everywhere, commanding that the churches be leveled to the ground and the Scriptures be destroyed by fire, and ordering that those who held places of honor be degraded, and that the household servants, if they persisted in the profession of Christianity, be deprived of freedom. Such was the first edict against us. But not long after, other decrees were issued, commanding that all the rulers of the churches in every place be first thrown into prison, and afterwards by every artifice be compelled to sacrifices.”

39) Eusebius, 258, 259.

40) Eusebius, 226, 227

41) Norman H. Baynes, Constantine the Great and the Christian Church (Oxford: Oxford Univ. Press, 1931), 4.

42) “The early Christian Basilica may be defined as a more or less momumental hall with two (occasionally four) longitudinal colonnades, clerestory lighting, and at the far end of the central nave, an apse. This was the norm that admitted of a great many variations of detail." J. B. Ward-Perkins, “Constantine and the Origins of the Christian Basilica," Papers of the British School at Rome, 22 (1954), 78.  Blue, 121에서 재인용.

43) Blue, 121.

44) J. B. Ward-Perkins, 85. J. C. Davies,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Early Christian Church Architecture (London: SCM, 1952), 특히 2장을 참고할 것

45) R. Krautheimer, Early Christians, 37f.

46) Iain Murray, "Whitefield in the Jerusalem of England," Banner of Truth (Jan, 1971), 17ff.

47) George Whitefield's Journals, 1960,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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