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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도 안된 상황에서 임시노회를 열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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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등록일
2008-06-27 12:15:43
조회수
25069
지난 23일에 저의 제명을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당사자가 참석하지도 못했는데, 제명을 결정하였습니다.
노회 서기 목사님은 소집서를 “보내었을텐데”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받지 못했습니다.
이전의 모든 임시노회 소집건을 다 받았는데, 이번에는 받지 못했습니다.
개혁주의 정치 원리의 어떤 부분에서 이런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 지켜야 할 것을 끝까지 지키고 고쳐야 할 것은 즉각적으로 고치며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리이든지 생활 방식이든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전 존재 곧 전 인격과 전 삶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자신들을 탈출시키신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한 우상 숭배가 오늘날의 교회에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식으로는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존재하지조차 않는다면 그 사건이 오늘날의 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는데, 오늘날의 교회와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오늘날 교회에게 어떻게 연관되어지는가?
저는 성경의 하나님과 다르게 이야기하면서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신자는 그 은혜로 절대적으로 지켜주셔서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신다면 절대 견인의 하나님은 옳습니다.
반면에 당사자의 믿음 곧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영원한 구원이 절대적으로 보장되고 당사자가 그 은혜를 받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잃게 될 수 있다면 절대 견인의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외형적으로 광야의 이스라엘과 달리 고상하지만 결국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런 설명에 긍정적인 의미의 충격을 받는 분들도 계시고 반발과 분노를 느끼시는 분들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그 나름대로는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하면서 계명에 여러 생각들을 덧붙여서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지자들과 예수님은 아주 강력하게 정죄하셨고 그에 대한 반발과 분노로 이스라엘은 핍박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현재의 중심이 어떠하느냐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과 온전히 일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반드시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바른 해석이 바탕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성경으로 불경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 해석에 있어서 본문의 내용이 뒤집힐 수는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은 암호가 아닙니다.
성경 해석은 그 문자의 의미를 바르게 밝히는 것이어야지 문자의 내용을 뒤집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표면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도 어떤 측면에 대한 강조로 인한 것이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믿음으로 선 너 곧 로마교회에 경고하면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으면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0-22)고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으로 선 너란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롬 1:7)입니다.
그런데 해석의 결과가 믿음으로 선 사람에게는 그러한 일이 없다는 것이라면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성경 해석은 암호 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가 가라지를 집어넣어서는 찍히는 바는 가라지에게 해당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자기 마음대로 변개시키는 악행입니다.
가라지는 믿음으로 선 사람들이 아니기에 여기에 끼일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합니다(딤전 1:18-19).
디모데는 거듭났기에 착한 양심을 가졌고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요구된 믿음이란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요구된 착한 양심이란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 사도는 이 착한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바울 사도의 진술은 이들도 거듭남으로 갖게 되는 착한 양심과 영접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전제 하에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정관사를 통하여 디모데에게 요구한 것과 동일한 착한 양심과 믿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석의 결과가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라면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와 상충하지도 않습니다.
절대적 견인의 근거로 제시되는 모든 본문들은 그 말씀을 듣는 성도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내 양은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동사는 모두 현재형이기에 현재적으로 듣고 현재적으로 주님께서 알며 현재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안다는 것은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체험의 차원으로 교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현재적으로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토대로 영생이 주어지고 영원히 멸망치 않으며 주님에 의해 절대 보호를 받습니다.

성경에서는 나무와 연결하여 거듭난 이를 좋은 나무라고 말씀합니다.
그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방법은 현재적으로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물과 영양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쁜 나무는 공급 자체가 없기에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거듭난 이들이 좋은 나무로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름으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뿌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공급되는 생명수와 영양분을 공급받음으로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는 비유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는 사실을 밝히는 가르침의 방편인데, 사실과 일대일로 대응하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와 사람은 결정적인 한 가지 차이가 있는데, 나무는 뿌리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는데 반해 거듭난 사람은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나무 비유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되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 전제를 읽지 못하고서는 나무와 사람을 동일시하여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것이 절대적 견인론입니다.

소요리문답은 믿음을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현재적으로 듣고 주님께서 현재적으로 알며 현재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바로 그분을 의지하는 것으로서 믿음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현재에 원하시는 바를 따르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무나 당연하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8-9)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으며 썩어진 것을 거둔다(갈 6:7-8)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성령님의 역사가 선행되기에 당사자가 의지함으로 곧 믿음으로 다르게는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절대주권의 하나님이십니다.
절대주권에 대한 바른 고백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규정한 바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은 절대주권을 말하지만 행동으로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칼빈식의 예정론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정을 넘어갔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초칼빈주의의 경우에 그것은 칼빈주의에서 생겨난 한 열매입니다.
칼빈주의에 의해서 결코 생겨날 수 없는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여지를 담고 있었기에 생겨난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은 초칼빈주의가 생겨날 여지 자체가 전혀 없습니다.
초칼빈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은 칼빈주의가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따라서 교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바에 대해 침묵하고 저를 제명한다고 상황이 종료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돌들이 소리지르게 하셔서라도 진리를 전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명백한 진리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여 정당한 절차가 없이 제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교회 현실이 안타까우면서 야속합니다.
작성일:2008-06-27 12:15:43 211.189.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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