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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교수님의 대답에 대해 다시 올립니다.

닉네임
전영태
등록일
2020-12-19 13:18:42
조회수
744
*
내용이 조금 많아서 두 번에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이번에 올리는 내용은 교수님의 2번 답변에 대해서입니다.


: 1. 로마서 7장 17절과 20절에 대한 질문의 답변에 대해서
두 번이나 교수님께 같은 질문으로 질문했지만, 교수님의 대답이 저에게는 별로 흡족하지 않습니다 . 제 질문은, 만약에 17절과 20절이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라면 어떻게 불신자에게 ‘자신속의 죄가 죄를 짓는 것이니 자신의 육신이 짓는 죄는 자신이 짓는 죄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답변은 그냥 ‘불신자이기 때문이다’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건 아마도 제 추측입니다만, 교수님께서 굳이 본 문단에서의 이원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에 나타나는 현상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 17절과 20절은 ‘내’와 ‘내 속’으로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내 속에 대해서 설명을 덧붙이면서 ‘내 속 곧 내 육신’이라고 명확히 이원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교수님이 언급하신 내용에서 “내”(‘에고’) 역시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자이며”(7:14),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7:18),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자”(7:19)이고, “내”를 “율법에서 벗어나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7:6),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고 오히려 영[성령]에 있는 자”(8:9)인 신자의 모습으로 볼 수 없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결국 교수님의 대답은 ’불신자인 이유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7절과 20절은 불신자에게 적용할 수 없는 구절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불신자를 향하여 ‘당신안에 있는 육신속의 죄가 죄를 짓는 것이니 이제는 당신이 짓는 죄는 당신이 짓는 죄가 아닙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학적으로도 성경적으로도 말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17절과 20절의 ‘내’는 불신자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교수님처럼 로마서 7장 14-25절을 구원전의 상황을 말함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의 가장 난관이 이 두 구절이라고 보여집니다.



2. 로마서 8장이 이원성을 말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대해서,
(로마서 7장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연구하고 있는 내용이 있어서 준비가 되면 올리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7장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교수님은 로마서 8장이 성도의 이원성을 극복한 이원성을 말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8장은 명확히 신자의 이원성을 말씀하고 있다고 봅니다.
교수님의 답변내용에서, 로마서 8장에서 신자의 이원성을 말씀하는 구절들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수님이 언급하신 구절들은, 신자의 이원성을 말하기 보다는 불신자일때와 신자일때의 상황을 말씀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음으로 해석에 따라서 신자의 이원성을 말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8장에서 이원성을 말씀하는 구절들은, 로마서 8장 11절, 로마서 8장 12-13절과 17절- 18절, 23절, 26절등입니다.
8장 11절의 ‘죽을 몸’은 성도들일지라도 죽음을 피할수 없는 몸을 입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성도의 몸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거듭난 성도의 육신속에 내재하는 죄 때문입니다. 이는 로마서 7장 24절의 ‘사망의 몸’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12-13절은 전체 정황이 이원성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2-13절과 같은 맥락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절과 18절의 ‘고난’은 거듭난 성도가 성도로 이 세상을 살아갈때의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도의 육신속의 소욕으로 인한 고난도 포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이원성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이미와 아니 사이의 부분으로 생기는 고난이라고도 할 것입니다만, 그럴지라도 육신속의 소욕도 이미와 아니사이의 긴장에 포함 할 수 있습니다.
26절에서 성령께서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말씀도 성도의 이원성을 충분히 설명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갈때의 부족함을 도우신다는 의미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구절은 ‘연약함’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로마서 8장의 이 구절들은 거듭난 성도속에 내재하는 신자의 이원성을 말씀하는 증거하는 구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로마서 8장은 여전히 성도의 이원성과 성도의 성화를 말씀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교수님은, 8장에서 성령으로 인하여 이원성을 극복을 말씀하시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일지라도 내재하는 육신속의 죄와 소욕으로 인해서 불신자와는 또 다른 영적전쟁이 진행중에 있음을 8장은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바울은 17절에서‘영(성령)으로서 몸의 행실(소욕등)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5장 16-17절은 이미 성도들인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믿음의 삶과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육신의 삶의 선택에서 오는 영적전쟁이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중임을 말씀하며 성령을 좇아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5장 25절에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성령으로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으로 동행하며 사는 것이 육신의 소욕을 이기는 성도의 승리하는 삶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3. 기노스코와 오이다의 구분에 대해서
성경을 읽어보면 두 단어는 거의 대부분이 단어의 뜻에 맞게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일부 두 단어가 중복 혹은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우의 예를 말씀하시며, 바우어 사전과 로마서 7:7, 고전2:11, 요14:7 (역시 요 8:55; 13:7; 14:17)등을 예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든 요14:7은 전부 기노스코를 사용하고 있음으로 교수님께서 잘못 인용하셨습니다. 다른 인용구절들은 잘 분석해 보면 대부분이 두 단어의 구별해서 쓰고 있음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우어사전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작성일:2020-12-19 13:18:42 183.107.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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