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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태목사님의 재문제 제기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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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b Jong Choi
등록일
2020-12-13 04:02:11
조회수
841
전목사님(*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글의 내용상 신학을 공부하신 목사님으로 여겨져 목사님으로 호칭합니다)의 문제 제기에 대한 재답변

1. 우선 제 글에 대하여 다시 문제를 제기해 주신 열정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거듭 밝힌 바 있지만 로마서 7장의 해석 문제는 교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난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7장이 성화의 과정에 있는 신자의 내적 갈등 혹은 이원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과, 아직 중생하지 않은 비크리스천, 혹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 혹은 모세의 율법을 여전히 칭의와 성화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유대인 신자로 보는 입장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저 자신의 경우도 고신대와 고려신학대학원 재학시, 그리고 미국 개혁신학대학원과 캘빈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전자의 입장에 섰고, 1983년도에 고신대학보에 후자의 입장을 주장하는 화란의 헤르만 리덜보스의 견해를 반박하는 논문을 투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5-86년에 프리스톤신학대학원에서 바울 신학자 크리스천 베이커교수와 로마서를 함께 공부하다가 후자의 입장이 로마서 본문은 물론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역사적 상황과도 잘 부합하다는 확신이 들어 후자의 입장으로 선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후자의 입장과 만찬가지로 전자의 입장 역시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 누구도 내자신의 해석만이 옳고 상대방의 해석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이분법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2. 로마서 7:17, 20절에 대한 목사님의 해석과 저의 해석이 다른 이유도 목사님은 전자의 입장에 서고,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17절과 20절의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이다”고 말하는 그 “내”(‘에고’) 역시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자이며”(7:14),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7:18),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자”(7:19)로 보고, 그 “내”를 “율법에서 벗어나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7:6),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고 오히려 영[성령]에 있는 자”(8:9)인 신자의 모습으로 보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번 제 글에서 재차 언급하였지만 저는 로마서 7장의 주제는, 그 “내”를 크리스천으로 보든, 비크리스천으로 보든 인간의 이원성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바울이 7장에서 말하고 있는 중심 주제는 율법, 좀더 좁혀 말한다면 나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도울 수 없는, 오히려 죄의 도구가 되어 결국 나를 절망으로 이끄는 율법의 무능력으로 봅니다. 바울이 7장에서 나의 이원성, 곧 하나님의 법을 섬겨 죄를 짓지 않으려는 나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죄의 법을 섬기는 나(7:14, 25)를 언급하는 이유도 율법이 이러한 나의 이원성을 극복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시킨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러한 이원성은 8장에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극복됩니다. 바울은 8:1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율법과 죄로 인한)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을 한 다음, 2절에서 그 이유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7:25a의 ‘하나님의 법’과 평행)이 죄와 사망의 법(7:25b의 ‘죄의 법’과 평행)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즉 7장의 나의 이원성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지 못한 율법의 무능력이 그리스도를 통해 극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8:3-4에서 그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원문의 뜻은 ‘율법이 육신으로 인하여 연약하여 할 수 없는 무능력을’)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그리고 속죄제물로 보내사 그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다...”
전목사님은 7장에서 말한 죄를 짓지 않으려는 거듭난 나와 현실에 있어서 육신으로 죄를 짓는 나의 이원성(7:17, 20, 21, 23, 24, 25)을 로마서 8:10, 12-13, 17, 23, 26; 12:1-2, 갈 5장 등등 많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집필한 로마서 8장 주석과 이미 출판된 갈라디아서 주석(2016년, 이레서원)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진작 로마서 8장은 7장과 같은 이원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7장을 결론 내리는 25b절은 “그러므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반면에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나의 이원성을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나’와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나’가 계속 평행선을 달립니다. 후자에 대한 전자의 승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8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게 된 신자는 더 이상 7장의 이원성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8:5-9에 있는 ‘육신을 따르는 자’와 ‘성령을 따르는 자’는 한 사람의 이중성을 가리키지 않고 다른 두 종류의 삶을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사망을 가져오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8:5,6),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고(8: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8:8). 반면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더 이상 육신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신자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지배 아래 있는 자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거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신자라 불려질 수 없습니다(8:9). 한 사람은 육신과 성령을 동시에 따르거나 섬길 수 없습니다. 물론 신자도 성령이 아닌 육을 따르는 삶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육을 따르는 삶을 살 경우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8:7),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신자됨을 포기하는 자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신자는 그 성령이 신자됨을 유지시켜 줍니다(8:14-15). 그러므로 8장의 신자는 지속적으로 이원성을 피할 수 없는 7장의 나와 동일한 자로 보기가 힘듭니다.
전목사님은 7장에서 신자의 이원성을 말하기 위해 바울이 7:15의 헬라어 ‘기노스코’와 7:14의 ‘오이다’의 의미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노스코’는 “관계적, 인격적인 앎과 관련될 때 사용한다고 전제하고, 15절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의미는 “내가 인격적으로 내가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 “내”는 불신자가 아닌 신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고전 헬라어에서 일반적으로 ‘오이다’는 직접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완전하게, 전체적으로 아는 앎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반면에 ‘기노스코’는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점차적으로 아는 앎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만 그 의미가 중복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참고, 바우어의 『신약과 초기 기독교 문헌 헬라어 사전』, 3판, 199-201, 693-694). 하지만 신약의 저자들, 특히 바울과 요한은 두 단어를 같은 의미를 가진 동의어처럼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같은 장 7:7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기노스코’).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오이다’). 역시 고린도전서 2:11에서 “사람의 일을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오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기노스코’).”요한복음 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14:7에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기노스코’)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오이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기노스코’) 또 보았느니라”(역시 요 8:55; 13:7; 14:17).

3. “크리스천에 합당한 성화의 삶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거듭 말하지만 성경은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갈 2:16; 롬 3:28, 30),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엡 2:8). 그러나 성경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 7:21).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얍 2:23)라고 말합니다. 전자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후자도 그러합니다. 전자가 칭의와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이라면 후자도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칭의 없이 구원 받지 못한다가 옳은 것 같이 성화 없이 구원 받지 못한다 역시 옳습니다. 양자가 동등한 구원의 합당한 필수적 조건입니다. 개혁신학의 기반을 형성한 칼빈이 그렇게 보았습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3권 16장 1절, “칭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동시에 성화를 붙잡지 않고는 칭의를 붙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 : 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거룩하게 하지 않는 자를 의롭게 하지 않는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그가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그가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그가 거룩하게 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의와 거룩함이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한다. 우리는 둘을 구별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두 가지를 서로 뗄 수 없게 결합하신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먼저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의 거룩(성화)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 : 13).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은혜들(칭의와 성화)을 누릴 수 있도록 그 자신을 주시기 때문에 그는 이들을 동시에 주신다. 한쪽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 없이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또한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칭의와 똑같이 성화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거룩함에 동시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 어느 순간에도 성화 없이 칭의나 칭의 없이 성화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칼빈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칭의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똑같이 성화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바울도 고린도전서 6:11에서 고린도 신자를 가리켜,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이미 구속되어졌고, 거룩하게 되어졌고, 의롭게 되어졌다”(헬라어 원문 직역)고 하면서 신자는 구속과 성화와 칭의를 동시적으로 받은 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화를 칭의 앞에 둠으로써 성화 없는 칭의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 “성화의 주체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의 문제
칭의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로부터 오는 은혜요 선물인 것처럼 성화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받게 되는 칭의와 달리 성화는 종종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명령법의 형태를 취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6:19에서 바울은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빌립보서 2:12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룩함에 이르고, 구원을 이루는 주체는 분명히 신자입니다. 동시에 빌립보서 2:13의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의 말씀처럼 신자의 이 책임적인 행위는 성령을 통해서 신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였던 존 머리 교수는 그의 책 [구속:성취와 적용. *이 책은 제가 고신대학원 재학시 이근삼 조직신학 교수님이 필독서로 소개하였던 책입니다], 148-149에서 성화에 있어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일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일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일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일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일하기 때문에 중지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일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그 관계는 엄격하게, 마치 하나님은 그 자신 편에서 일하고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에서 일하기 때문에, 양쪽의 합동과 협력이 요구된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같은 협동의 종류가 아니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우리 역시 일한다. 그러나 그 관계는 하나님이 일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한다는 관계이다. 우리 편에서 구원을 위해 일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결과이다...여기서 우리는 우리 편에서 모든 받을만한 행위에 대한 설명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자발적인 행위에 대한 격려를 가진다...우리가 계속해서 능동적으로 일하면 일할수록, 우리는 더욱 더 모든 활력적인 은혜와 힘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존 머리 교수는 성화의 주체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이냐, 사람이냐의 2분법으로 접근하지 않고 통전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은 100% 하나님의 사역이고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 역시 100% 신자의 책임이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신비입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목사님의 사역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길 빕니다.
작성일:2020-12-13 04:02:11 73.122.23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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