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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죠지 "나라이 임하시오며" (2-1)

닉네임
임채호
등록일
2021-01-01 17:57:36
조회수
433

나라이 임하시오며

-헨리 죠지 연설문-

 

2021. 1. 1. 개평교회 임채호

우리는 방금 모든 기도 가운데 가장 경건하고 가장 신성하며 가장 보편적인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릴 적에 배운 이 기도는 감미롭고 부드러운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때로는 마음을 실어서, 때로는 건성으로 주기도문을 수없이 암송해 왔습니다. 오랜 세월 날마다 시간마다 이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나라이 임하시오며!” 그러나 과연 그 나라가 임하셨습니까? “하나님 말씀의 선포로 번성하는기독교 도시인 글래스고우가 대답하기 바랍니다.

나라이 임하시오며!” 수세기 동안 날마다 주일마다 이 기도를 올려왔습니다. 그런데 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 기독교 도시라고 불리는 글래스고우에서 125천명이나 되는 하나님 자녀가 단칸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만으로는 안됩니다.

나라이 임하시오며우리는 기도하고 기도하였습니다만, 그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지체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나라는 결코 임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라고 불리는 종교와 고대 세계에 전파되었던 기독교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고대 기독교는 부패한 구 문명 속에 새롭고 고귀한 생명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을 위해 예정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세상이며, 하나님 나라는 선한 사람들이 죽으면 하나님이 데리고 가실 다른 어떤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는 착한 미국인이 죽으면 프랑스 파리로 간다고들 말하는데,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증거하신 전능한 사랑의 아버지이시고 이 세상을 권능으로 붙들고 계신 그분은, 이 세상의 고통과 불행을 보시면서도, 능력을 가진 사람이 좌절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 걸 보시면서도 , 평화와 사랑과 풍요와 행복의 나라를 가져다주지 않으려는 괴물 같은 신일까요? 하나님은, 좋은 일을 해 주십사 빌고 구슬려야 하는 제멋대로인 독재자일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드리는데, 하나님은 전능자이시지만 당신의 나라를 혼자서 구현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 그리스도가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나라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동인형도 아니고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동물도 아닌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져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지성적인 존재이자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지성적인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이 뜻을 행하는 나라가 아닙니까?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은 누구도 지옥에 보내신 적이 없으며 마귀들이 지옥으로 가는 것은 천국보다 지옥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이만큼 심오하고 진실하며 기독교 철하과 일치하는 말은 없습니다. 악한 영들은 선한 영이 다스리는 곳에서는 불행할 것입니다. 악한 영은 불의를 고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정의가 법인 곳에서는 비참해질 것입니다. 하나님도 지성적인 존재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깨뜨리지 않고서는 인간에게 선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결코! 절대로 없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그리스도가 이 기도를 가르치실 때, 그 구절을 그저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동시에 노력해야 함을 말씀하시고자 했습니다.

기도! 기도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적절한 옛날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마차꾼이 마차가 진흙탕 속에 빠져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신에게 마차를 끌어내 달라고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마차는 그곳에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이 세상은 기도를 반복한다고 해서 진흙탕에서 마차를 끌어내고 빈민가에서 빈곤을 끌어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기도해서 결과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강압적인 명령으로 다스리는 폭군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전하려 하신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에서는 인간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통과 불의를 보고는 하늘에 아버지는 계시지 않으며 하나님이 존재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이런 일을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너무 피상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위해 어떻게 합니까? 자녀가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식을 경호원으로 둘러싸려고 하겠습니까? 이 세상과 인생의 법칙을 알고 있는 아버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키운다면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자립적인 인간이 아니라 응석받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중 한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합시다. 수영을 배우지 않았다면 익사하고 말 것입니다. 육지에서 너무 먼 바다에 빠졌다면, 근처에 배와 같은 탈 것이 없는 한, 수영을 할 수 있건 없건 익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물고기처럼 헤엄칠 수 있도록 창조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성이 의도하시는 목적에 맞도록 인간의 신체를 훌륭하게 만드신 터에, 우리를 물고기처럼 헤엄치게 만드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자연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어떤 지성이 전능하다고 해도, 지성 자체와 모순되고 자신의 법을 무력화하는 조치를 취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뒤에는 틀림없이 하나의 커다란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 뒤에는 인간의 지성보다 훨씬 위대한 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극히 조금이기는 하지만, 그 위대한 지성을 닮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분이 우주를 창조하시는 데 활용한 그 능력 즉 사물을 적응시키는 능력을 우리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선박 도시 글래스고 항에 정박해 있는 저 거대한 선박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움브리아 호, 에쿠투리아 호, 뉴욕 호, 파리 호 등, 대양을 오가는 거대한 기선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배가 물살을 가르며 항해하는 바다에는 고래를 비롯한 각종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물고기는 시저가 영국으로 건너올 때도 있었고 고대 브리턴 사람들이 처음으로 가죽배를 띄우기 전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현대인은 당시 사람들보다 수영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물고기보다 빠른 속도로 대양을 횡단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성을 사용하여 얼마나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 왔는지 또 물건을 제작하는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발달해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기선이라는 기계장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되어 바다 밑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와 어느 정도 유사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건너갈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합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제작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목적에 수단을 적응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에 수단을 적응시켜 대서양을 엿새 만에 횡단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단칸방에서 북적대는 수많은 가구가 존재하는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인간이 성취한 업적을 생각하고 난 다음, 오늘날 부의 한 복판에 참담한 빈곤이 존재하고 고도의 현대문명 속에서 무지, 약점, 불의가 존재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임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바로 그 능력, 즉 더 높이 상승할 수 있는 능력은 필연적으로 바닥으로 추락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땅은 모든 인류에게 주신 선물

우리 아버지! 우리아버지! 누구의 아버지라고요? 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기도문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입니다. 특정 종파나 특정 계층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모두의 아버지, 공평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에게 나라가 임하시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입술로 그렇게 간구합니다! 무릎을 꿇고 그분에게 기도할 때, 그분은 우리 아버지“, 모두의 아버지, 우주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제도는 그분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그분은 세상을 만드신 우리 모두의 아버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땅위에 두시고 땅으로부터 생존물자를 얻도록 하신 아버지입니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 모든 물자, 인간의 노동을 투입하여 가공할 모든 원료를 땅에서 구할 수 있게 하신 모든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면, 모든 사람, 창조주의 모든 자녀는 그분의 하사품에 대한 동등한 사용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 법률에는 땅이 하나님의모든 자녀가 아니라 오로지 소수의 특권층이 사용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 서부 지방에서 대화체 작품이 하나 출판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작품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소년과 아버지가 벽돌 공장을 방문했을 때 나눈 대화입니다. 소년은 벽돌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그 흙투성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왜 흙을 주무르는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묻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난 소년이 이번에는 벽돌공장의 주인에 관해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인은 벽돌을 직접 만들지 않고 직공들을 시켜 소득을 얻는단다.” 그러자 소년은 공장 주인이 공장 소유권을 어떻게 취득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주인이 공장의 터를 만들었는지를 묻자 아버지는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어쨌든 주인이 공장 터의 소유권을 갖는 것은 정당하다고 하나님의 법에 전적으로 부합한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당연히 주일학교 학생으로 교회에 다니는 소년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성경 말씀을 바꾸어 하나님이 벽돌공장 주인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로 바꾸어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불경스러워 보이지만 제가 경솔하게 꺼내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성한 주제를 경솔하게 다루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가끔은 충격을 통해 깊이 있는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기독교의 교훈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오시어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그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모두 전능하신 아버지, 편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라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합법화된 불의, 하나님 자녀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권리를 부정당하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를 가르치는 바로 그 사람들 중 다수가 이런 불의를 지지하며, 심지어는 불경스럽게도 그것이 창조주의 계획과 의도라고 주장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버지 되심을 말하면서, 창조주의 명령에 의해 날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수백만의 사람에게 제공할 땅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합니다. 이런 자칭 그리스도인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자선을 베푸는 자기만족을 갖도록 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말합니다. 글래스고우 외에도 대서양 양쪽의 대도시에서는 날마다 수십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하여 하나님 세상에서 추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 자녀들이 하나님 명령에 따라 세상에 왔지만 땅이 충분하지 않고 공기와 음식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신이 이런 존재라면 저는 절대로 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두려움 때문에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신을 증오할 것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충분한 땅이 없다니요! 문명 세계의 어느 나라든지 둘러보십시오. 땅이 충분하고도 남아돌지 않습니까?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고요? 실업 상태의 노동과 놀고 있는 땅을 보십시오. 세계 도처에서 자연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 인간의 불의로 생겨나는 죄악과 불의와 고통과 타락을 창조주의 탓으로 돌리는 기독교는 무신론보다 훨씬 나쁩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며 성령을 거스르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지난주에 묵었던 한 호텔에는 백 명 이상의 손님들이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한 사람이 일어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하사품에 대해 감사하도록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모든 식사 시간에는 잘 차려진 음식에 대해 감사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먹을 것을 구하려고 일하지 않고 앉아서 기도를 시작했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지금까지 기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식량은 하나님의 하사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기를 요리해 주시지 않으며 야채를 손질해 주시지도 않습니다. 또 접시를 놓거나 식탁보를 깔아 주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노동을 통해 생산하고 물자를 조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성경에도 씌어 있고 자연의 모든 현상에서도 드러나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노동을 통해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노동 외에는 어떤 것에도 선물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노동에 필수불가결한 천연자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천연자원은 한 사람에게만, 혹은 몇 사람에게만, 혹은 한 세대의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연자원은 하나님이 전 인류에게 주시는 선물이자 하사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문명국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소수가 하사품을 독차지하고서는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대다수는 하나님의 하사품에 자신의 노동을 투입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문명세계에서는 노동 계급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빈곤층이 되는 반면, 스스로 정직한 노동을 한 적이 없는 사람과 자신처럼 정직한 노동을 하지 않은 조상을 두었다는 사실을 뽐내는 사람들이 노동 생산물을 차지하면서 흥청거리는 기막힌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계속>

 

 

작성일:2021-01-01 17:57:36 115.160.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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