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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는 구원에 필수적이고 합당한 조건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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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태
등록일
2021-01-07 21:43:24
조회수
1807
성화는 구원에 필수적이고 합당한 조건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최갑종 교수님은 2020년 12월 13일자 답변 3번의 “크리스천에 합당한 성화의 삶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주장과 관련하여서
‘전자가 칭의와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이라면 후자도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칭의 없이 구원 받지 못한다가 옳은 것 같이 성화 없이 구원 받지 못한다 역시 옳습니다. 양자가 동등한 구원의 합당한 필수적 조건입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솔직히 좀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의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최갑종 교수님은 2016년 8월 15일 분당 한울교회 청년/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톰 라이트와 김세윤 교수의 일명 유보론적 칭의론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하셨더군요.
‘마찬가지로, 만일 누가 바울의 칭의/구원과 관련하여 “믿음에 의한 현재적 칭의/구원”과 “최후 심판에서의 성령에 의한 선행에 따른 최종적인 칭의 /구원”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확실성과 성도의 견인을 강조하는 믿음과 은혜에 따른 최종적인 의/구원에 관한 성경 본문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면, 성령에 의한 우리의 삶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나 탈락의 입장도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기고: 구원론/칭의론, 다시 생각하기
기자명 코닷 입력 2016.08.15 12:52 수정 2016.08.19 21:56 댓글 28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결국 교수님이 말할려는 요지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령에 의한 우리의 삶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에서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나 탈락을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부터는 간단하게 언급할 필요성으로 교수님의 주장을 일명 ‘성화구원론’라고 칭하겠습니다. 우리 삶에 따른 구원도, 탈락도 같이 말씀하고 있음으로 성화 구원론이라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최갑종 교수님은, 저에게 답변하면서 ‘구원의 확실성과 성도의 견인을 강조하는 믿음과 은혜에 따른 최종적인 의/구원에 관한 성경 본문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면’이라시며 성화구원론의 근거로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과 야고보서 2장 23절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 16장 1절, “칭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를 위의 주장의 근거로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과연 이 세 가지는, 교수님의 주장하는 근거인 성화구원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습니다.



1. 먼저 마태복음 7장 21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내용은 제가 연구하고 분석한 내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의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이 성화의 구원 혹은 행위의 강조를 뒷받침하는 말씀이라고 주장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그런가?.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은 성경본문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문단전체의 맥락을 살피고 그 맥락속에서 의미를 살피는 것이다. 이는 성경 해석의 기본이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단의 배경이나 의미와 달리 일부분이나 일부 구절만을 인용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바른 방법이 아니다. 한 구절을 따로 떼어서 문장의 의미를 말하면 성경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 만약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은 이단들이 성경의 일부구절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먼저 21절이 속한 문단을 15절에서 23절까지로 할 것인지, 더 넓혀서 27절까지로 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성경마다 상이하게 나눈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되도록 넓게 잡는 것이 오해를 줄이겠다 싶어서 7장 15-27절까지를 전체 문단에 속한 부분으로 하기로 했다.

먼저 이 본문이 거짓선지자라는 대상을 배경으로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심을 기억하면서 본문을 대해야 한다.

마태복음 7장 15-27절의 개요
먼저 이 말씀의 대상은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보면 제자들이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교훈하시고 가르치시는 상황인 것이다.
이 말씀의 위치는 5장부터 시작되는 일명 산상수훈의 끝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사실 그래서 25-27절을 분리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게 말씀 하셨다라고 하기 보다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삶에 전반에 대한 중요하고 필요한 말씀들을 전체적으로 또 핵심이 되는 부분들을 조목조목 말씀하셨다고 볼 때 굳이 같은 문단에 붙여도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아서 같이 하기로 했다. 번역본들도 이 부분을 같은 묶음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체문단은 15-27절이지만, 내용을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5-20절
21-23절
24-27절

각 문단의 요지
15-20절의 요지
핵심문장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16절, 20절)이다. 반복해서 강조하신다.
‘그’ 혹은 ‘그들은’은 거짓선지자를 말한다. ‘열매’는 그들의 행위를 의미한다. ‘알리라’는 그들이 좋은 선지자인지, 악한 선지자인지, 말씀속의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그들의 행위로 분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알리라는 분별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이 여기서 그들의 열매를 언급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열매는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이다. 나무가 없는 열매는 있을 수 없다. 즉 나무와 깊은 관계성을 암시하고 있고 이를 바탕에 깔고 있음을 기억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핵심중의 하나는 나무와 열매는 불가분리관계라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고 하나라는 것이다.
16절 17절 18절 19절은 나무와 열매의 깊은 연관성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다.
이 문단은 제자들에게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과 분별의 필요성을 교훈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선지자의 행위를 보면 그들이 좋은 선지자인지 못된 선지자인지를 알 수 있으니 분별하라는 말씀이다.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다. 바른 선지자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진리의 열매를 맺으며, 거짓 선지자가 이리같이 거짓과 탐욕의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19절은 21절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르침의 끝자락에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거짓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왜곡되고 변질되는 것을 경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도 항상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르침을 잘 받은 제자들도 거짓선지자로 말미암아 자신 뿐 아니라 신앙공동체에 심한 손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때문에 얼마나 피흘리며 싸웠는지를 서신들에서 확인 할 수 있다.


21-23절 요지
이 부분에서 말씀의 배경이 달라진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의 눈을 마지막 심판대 앞으로 옮기게 하신다. 이 문단의 요지는 거짓되고 위선된 불법을 행한 거짓 선지자들을 예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21절의 주여, 주여와 22절의 주여, 주여는 거짓선지자를 향한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말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22절의 주의 이름으로 행한 이 사람들의 일들이 그냥 보기에 불법적인 일들이 아닌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 노릇한 것, 귀신을 쫓아 낸 것, 많은 권능을 행한 일들이 그냥 보면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사역들이 아닌가?라고 생각 될 수 있는 사역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23절의 평가는 완전히 정반대다. 그들의 그 사역들을 불법을 행했다고 정죄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본문 가운데서 두 가지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15절의 거짓선지자들의 태도를 말씀하시면서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온다’라고 말씀하셨음이다. 즉 겉으로 외양으로 양처럼 행동하며 치장하며 다가온다는 말씀이다. 이는 이들이 행했던 선지자노릇, 귀신쫒음, 많은 권능행함이 진정한 믿음가운데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것 같은 겉으로는 선한 행위 인척을 하면서 속은 노략질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행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둘째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알지 못하니의 알지 못하니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씀이다. 구절의 원어단어를 찾아보면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에그논’ 즉 기노스코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 더구나 심판대앞에서 심판주로 서신 예수님께서 이들 거짓선지자들을 인지하고 파악하지 못해서 알지 못한다는 말은 절대 아님을 우리는 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는 말씀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이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예수님이 보내지 않은 거짓선지자였다는 말이다. 입으로만 주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님도 믿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즉 거짓 선지자, 못된 나무였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예수님의 소명도 받지 않고, 진정 예수님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만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행위를 하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일을 했다는 말씀이다.


24-27절의 요지
‘그러므로’는 앞의 말씀들의 결론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는 느낌을 준다. 바로 앞의 문단의 결론인지 전체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하시는 말씀인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알 것 같다.
핵심 구절은 25절이다.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이다. 주초를 반석 위 곧 예수 그리스도에 세운 이유(원인)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세웠기에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볼 내용은 ‘나의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 집을 반석위에 세운 지혜로운 자’를 같은 대상으로 말씀하셨다’라는 것이다.
생각해 볼 부분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를 왜 그 집을 반석위에 세운 사람과 비유하였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우리의 믿음의 삶을 세우라는 의미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하게 볼 단어는 세운이다. 세운은 아오리스트이다. 말씀을 행하는는 현재형인데 왜 세운은 아오리스트일까?. 더구나 예수님이 말씀을 덧붙여 설명하는 25절에서는 놓은을 아예 과거완료형으로 말씀하셨다. 또한 26절의 지은도 아오리스트이다.
의미를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세운 자라는 말씀이다. 세우고 있는 자가 아니라고 함을 유념해야 한다. 이미 세워진 자임을 아오리스트와 과거완료는 강조하고 있음이다. 즉 예수님의 관계안에 들어와 있는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측면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 21절의 의미를 살펴보고 해석해 보자.
중요한 것은 전체 문단의 맥락가운데서 21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진실된 제자가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이는 말씀을 행함을 통해 즉 현재 나쁜 성도인데 성화나 행위를 통해서 좋은 성도가 된다든지, 혹은 좋은 성도인데 행하지 못하여 나쁜 성도가 된다든지의 의미로 보면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행하는 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전체 문단의 뜻과 왜곡되어짐을 알아야 한다.
성화구원이나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행위를 강조하고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근거구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이 정말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지 분석해 보겠다.

21절을 좀 더 심도 있게 분석해 들어가 보겠다.
21절에서 주님의 말씀의 초점이 행하는 일일까? 행하는 자일까?
먼저 말하지만 원어는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명확하게 말씀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의 전반부는 해석에 어려움이 없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한다는 의미이다. 즉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후반부가 문제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의 성경이 말하는 바른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가 핵심이다.
첫째 의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 들어가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둘째 의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행하는 사람(존재) 즉 좋은 나무라야,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셋째 의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의 뜻으로도 해석가능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로 둘 다로 보는 견해이다.

이 셋 중에서 이 본문의 바른 의미는 어떤 것일까?.
좀 더 풀어서 해석을 해보자.
첫째 해석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가 있어야 (혹은 행하기가 되어야, 행하기가 나타나야, 행함이 있어야 등등)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풀어 볼 수 있다.
둘째 해석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곧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라야,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종하는 자라야 등등 천국에 들어가리라로 풀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21절의 의미가 행함에 초점이 아니라, 행하는 존재에 초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1절의 바른 해석은?
본문에서의 1차 대상은. 거짓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 입으로만 부르는 사역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행하는 사역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의미를 확장하여 일반 성도에게로 확장해서 적용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본다. 하지만 1차적인 상대는 사역자들임이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으로 확대해도 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행위에 초점을 맟추면 안된다. 열매는 나무에서 열리는 법이다. 본문은 나무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열매로 그들 곧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를 알리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역자들이 하는 행위를 통해서 그들이 참 선지자인지 혹은 거짓선지자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21절의 의미를 확대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곧 좋은 나무에 초점을 먼저 맟춘 말씀임을 명심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21절의 의미는,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좋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좋은 나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즉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역자(성도)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본문의 말씀이 단순하게 열매와 행위에 초점을 둔 말씀이 아니라 좋은 나무 즉 좋은 참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에 초점을 맞춘 말씀임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같은 상황의 말씀을 기록한 누가복음 6장 43-45절말씀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 본문도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분별에 대한 참고 말씀은, 마23장 3절에서 거짓선생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저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거짓선지자들의 관건은 말이 아니라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의 분별기준은행위이고, 그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는 기준도 행위라는 말씀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저들을 보실 때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지를 중요하게 보시고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


마 7장 21절이 행함으로를 말씀하는가?. 이 구절이 지금 행위의 doing을 말하는가?. 이것이 지금 업적을 말하는가?. 이것이 행위 성화로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가?.
이 구절은 존재를 말하고 있다. 순종하는 자, 행하는 자를 말씀하고 있음이다.
행함은 업적을 말하지만, 본문은 예수를 믿는 존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와 행함은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본문의 앞뒤로 존재를 말하고 23-27절도 존재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분별하는 것이 요지라고 할 수 있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열매는 혼자 열리지 않는다. 언제나 나무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참된 신앙을 가진 사역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속 즉 마음으로 노략질하는 이리의 본성을 가진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1절은 거짓선지자나 그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들을 주님께서 그날에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사실 사람은 거짓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그 심판의 날에 명확히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덧붙이는 말
21절의 의미가 왜곡되게 된 이유는, 한국교회 특히 목사님들이 잘못된 씨를 뿌림이 1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때까지의 목사님들의 메시지를 보면, 이 본문의 말씀을 문단의 정확한 의미를 반영하여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한 메시지가 많지 않은 것을 본다.
한국교회의 유명하다는 선배목사들의 메시지도 비슷했다. 이 본문에서 문단전체의 의미를 무시한체 21절을 주제로 삼아서 바른 신앙의 행위와 올바른 순종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많았다는 점이다. 본 문단의 요지인 좋은 나무라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에 초점을 맟추기보다는 좋은 순종에 초점을 맞춘 설교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의 대상은 거짓 선지자 즉 잘못된 영적 지도자에 대한 말씀임에도 일반 성도에 대한 메시지로 일반화한 면도 문제라고 본다. 1차적으로 잘못된 영적 지도자에 대한 말씀임을 먼저 명시하고 일반으로 넘어가는 수순이어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 메시지를 전해도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고 성경에 부합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듣는 성도도 메시지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핵심 포인트는 정작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 포인트가 이것이냐는 것이다.
이때까지 분석해 보았지만, 본문과 21절은 행위에 초점을 맞춘 말씀이 아니라, 나무 즉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 혹은 영적 지도자에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이렇게 1차적으로 이 말씀의 바른 의미를 잘 전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전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씨앗을 배경으로 현대에는 일종의 행위 혹은 성화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이 구절을 자신들의 메시지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상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확인되듯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산상수훈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지침서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심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셨다(마5:13-24).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그러면서 거짓선지자들을 분별하고 그들의 메시지를 주의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며 귀신을 좇아내며 천국의 능력을 경험하고 경이로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가장 큰 기쁨은 ‘너희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말씀하셨음은 이미 제자들이 천국백성이요 구원받은 성도들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21절을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리라’로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의 해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1절의 성경의 바른 의미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은 아니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진실한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2. 두 번째는 야고보서 2장 23절입니다.
이 본문은 이미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문단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이 성화구원을 말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이미 변 교수께서 하셨더군요.
*「그 말씀」 2001년 1월호 원고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
야고보서 2장의 주해와 적용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를 참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제목으로 인터넷에 치면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칼빈도 야고보서의 이해에 대한 부분을 기독교 강요3권 17장 11과 12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 부분만 더 덧붙이겠습니다.
야고보서 2장 21절에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4장 2절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앞에서는 없느니라’고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에 대해서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정반대로 말씀하고 있음입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내용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야고보서의 내용은, 행함?으로 칭의를 얻는 것을 말씀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이 행함이나 성화를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고, 행함?으로의 칭의 즉 행함?으로 의롭다 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행함으로 칭의 즉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성경도 이를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의미는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18절의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야고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행함이 아니라 행위를 통한 야고보의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행위를 통해서 그의 참 믿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절에서 아브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와 25절에서 기생 라합의 행위가 그들의 참 믿음을 나타내는 것임을 말씀하는 의미입니다. 이러므로 22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그의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창세기 15장 6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를 로마서 4장 19-22절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미 믿어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이 창세기22장에서의 이삭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다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말함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이는 변교수의 설명대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장을 말씀하고 있음입니다. 참 믿음은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논한, 마태복음 7장 15-2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과 같은 의미입니다. 좋은 나무에서 즉 참 믿음의 사람에게서 참 믿음의 열매는 맺힌다는 것을 말함입니다.

로마서 성경은 명확하게 이신칭의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확실하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5장 17절은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라고 하였고,
18절은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라고 하였으며,
21절도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함이니라’고 이신 칭의가 영생과 구원의 핵심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성경은 명확하게 이신칭의로서 구원과 생명에 이른다라고 말씀하지, 행위로서 성화를 통해서 구원과 생명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구절을 나는 확인 할 수 없습니다.



3.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 16장 1의 부분에 대해서
최교수님이 인용하신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 16장 1의 인용을 보고는 적잖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기독교 강요를 찾아보니, 교수님이 인용한 본문의 내용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나더군요. 영역본을 찾아 보니, 교수님은 대체적으로 성화를 우선하는 직역을 하셨고, 기독교 강요로 나온 책들은 칭의를 우선하는 의역을 했더군요. (라틴어 원본이 있고, 총신대교수가 번역을 한 게 있다는 데 구해 볼 생각입니다.)

먼저 교수님이 인용하신 내용과 제가 가지고 있는 강요의 책의 내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제가 참고한 책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사 기독교 강요 중권 P.347(원광연 옮김)입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3권 16장 1절, “칭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동시에 성화를 붙잡지 않고는 칭의를 붙잡을 수 없다.
(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붙잡음과 동시에 반드시 거룩함도 함께 붙잡게 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 : 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거룩하게 하지 않는 자를 의롭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 되는 법이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그가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그가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그가 거룩하게 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의와 거룩함이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한다. 우리는 둘을 구별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두 가지를 서로 뗄 수 없게 결합하신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먼저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의 거룩(성화)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를 소유하면 동시에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 : 13).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은혜들(칭의와 성화)을 누릴 수 있도록 그 자신을 주시기 때문에 그는 이들을 동시에 주신다. 한쪽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 없이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또한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칭의와 똑같이 성화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자기 자신을 주시지 않고는 이런 은혜들을 누리도록 하시는 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두 가지 은혜를 동시에 다 주시는 것이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나머지 하나가 없이는 절대로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에 행위도 함께 받으나 그러면서도 칭의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참된 진리인지가 분명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참여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데, 그리스도안에 참여하는 데에는 거룩함이 의로움에 못지않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으로는 칼빈이 성화구원을 지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칼빈이 3권의 16장을 쓴 본래 목적과 의도가 다릅니다. 다른 목적과 방향성을 가진 문단의 내용을 단편적으로 떼어서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또한 중요한 문제는 칼빈이 과연 기독교 강요 전체에서 성화구원을 지지하는 듯한 주장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다시 한 번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고, 지금도 살펴보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주장하시는 성화구원을 지지하는 듯한 내용은 찾기 어렵네요.

도리어 많은 부분에서 칼빈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a. 기독교 강요 3권 11장 13. 행위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그러나 은혜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행위의 공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가 믿음과 행위에서 비롯된다는 꿈같은 생각일랑 즉시 버려야 할 것이다’ p.273

b. 3권 11장 14. 중생자의 행위도 의를 얻는 근거가 될 수 없음
‘더 나아가서 앞으로 적절한 곳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들- 곧, 성화와 의-은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능력이 믿음에 있다는 문제를 거론할 때에는 행위는 -심지어 영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거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p.274

c. 3권 11장 17. 로마서 10장의 증거
‘또한 의가 복음을 통하여 제시된다고 말하므로 행위를 고려하는 것은 일체 배제된다’
‘보통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극히 완전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 계명들에 이를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율법의 가장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를 이끄사 사랑하시도록 하시지만 그 사랑이 우리의 칭의의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아무리 성자라도 사랑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니 그 불완전한 것이 어떻게 공로로 인정되는 근거가 될 수 있겠는가?’. p.277

d.3권 16장 3. 하나님이 영광과 그의 은혜가 선행을 일으키는 동기임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장 첫머리에 두지 않는다면, 행위를 말씀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를 먼저 흡수한 사람이라야만 거룩한 삶을 추구할 힘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p.351

e.3권 17장 10. 행위는 칭의로 말미암아 의로 인정받음
‘따라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행위의 의가 - 그 성격이 어떻던 간에 - 믿음과 값없는 칭의에 의존하며,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생겨난다면, 그 행위는 당연히 믿음에 포함되며, 또한 마치 그 결과가 원인에 종속 되듯이, 말하자면 행위가 믿음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를 높이는 나머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파괴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초래되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p.367

* 제가 확인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올립니다.




4. 마지막으로, 제가 생각하는 성화 구원론의 문제점입니다.
1)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사랑을 퇴색한다.
하나님은 이신칭의의 믿음으로 믿는 자를 후사가 되게 하심은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기 위함이라고 (로마서 4:16) 말씀하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 8-9).
‘만약에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함이니라’(로마서11장 6절).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로마서 5장 8절의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성화나 행위가 조건이 되면 온전한 하나님의 선물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다.

2)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전지 전능하심과 우리의 구속과 견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생명의 값으로 주셔서 구속하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하나라도 온전히 천국으로 이끌고 지킬 수 없다하면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30절, 로마서 8장 35절, 38-39절을 보자,

3) 성도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이름은 파라클레이토스이시다.
성령하나님은 우리 곁으로 우리를 돕고 인도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돕고 거룩하고 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셔서 함께 하신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심이 당신보다 더 우리에게 유익하다 하셨다. 왜? 성령은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26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성도가 중간에 탈락한다면,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우리를 도우심은 부족할 수 있다는 의미인가?. 예수님과 성령님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와 견인에 부족함이 있다고 봐야 하나?.
나는 성령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놓치는 경우는 있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절대 나를 놓치지 않음을 나는 믿고 신뢰한다. 그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심이다.


4) 성화구원론은 결국 행위구원론을 의미한다고 본다.
리폼드 신학 대학원의 신약학 교수인 가이 워터스 박사는 바울의 새 관점 학파 중 한 사람인 N. 토마스 라이트의 칭의에 대한 진술들을 검토해 보면, 그가 미래의 칭의를 일련의 과정으로 그리고 나아가 신자의 행위에 기초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아래는 워터스 박사가 라이트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칭의는 마침내 소유가 아니라 행위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칭의는 믿음에 근거해서 선언되는 반면, 미래의 칭의는 공개적으로(신자의) 전 생애를 통해 확증될 것이다’.
‘(칭의)는 사람이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어 살아온 전 생애에 기초해서...... 미래에 발생한다. 즉 그것은 바울이 재 정의한 의미의 견지에서 보면 ’행위‘를 근거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의 결과로서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생산된 것들에 기초하는 것이다.’
(가이 워터스 ‘칭의란 무엇인가’ p. 114, 부흥과 개혁사)

나는 이분들이 주장하는 성화에 대한 정의가 궁금하다. 이분들의 주장처럼 성화가 이미 칭의와 함께 또는 동시적으로 주어졌다면, 어떻게? 왜? 성화가 없을 수 있음을 말하는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결정적 성화론을 주장하는 존 머리 교수는 로마서 7장을 구원후의 성도의 모습으로 보면서 점진적성화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미 주어진 것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왜 주어졌다 하면서 있고 없고를 논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에 성화가 이미 주어졌고, 성화의 나타남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주장하면 안 된다고 본다.
좋은 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기 마련이다. 성령이 도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감동하시고 예수님의 생명이 그 속에서 약동하고 역사하는 데 생명의 열매와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시 지체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셨다. 깊이 파고 거름을 주고 기다려 보시겠다 하셨다. 사랑으로 도우시고 인내로서 기다리시는 주님의 배려깊은 사랑의 태도이시다.
그래도 만일 열매가 안 열리는 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이때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대면함이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본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질책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인지, 당신안에 참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아니라면 회개하시고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는 진정한 성도가 되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 권면이라고 생각한다.
성화나 행위 구원론자들은 마치 행위를 똑바로 하면 나무가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리 포도열매를 가시나무에 달아도 가시나무가 포도나무로 바뀌지는 않는다. 또한 포도나무에 엉겅퀴를 달아도 엉겅퀴 나무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 나무가 그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는 것이다. 열매가 나무를 바꿀 수는 없다.

5)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화 구원을 말하지 않았다고 본다.
칼빈은 행위는 믿음에 종속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화는 칭의의 기반위에서 시작되고 비롯된다고 말한다.
칼빈이 칭의와 성화를 구원의 동등하고 필수적은 조건이라고 기독교 강요에서 주장하는 것을 나는 확인하지 못했다. 기독교 강요 3권 16장 1의 앞부분에서 성화를 강조하는 부분이 있긴 하나 그 부분은 성도가 성화에 대한 중요성이 있다는 것이며 칭의와 성화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성화가 칭의같이 구원의 필수적이고 동등한 구원의 조건이라고 칼빈은 말하지 않는다.

6) 성화구원론의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이 과연 성화 구원을 두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마7장 15-25절, 야고보서 2장 등은 이미 설명하였고, 다른 구절들도 대부분 이견이 없지 않다. 특히 이 부분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신학적인 이해와 그 구절의 문단속에서의 이해와 해석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신학적인 이해와 지식과 견해가 바른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간접적이어야 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함이 기초요 기본이라고 본다. 만약에 신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을 본다면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주신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령을 언급하시며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장 26절)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경 본문을 통해서 본 이해의 눈이 시작점이 되는 것과 신학적인 이해의 눈이 시작점이 되는 것은 근원자체가 다른 것이다.

7) 왜 이런 주장을 할까? 배경에 대해서 추측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새관점학파의 주장에서 비롯된 관점의 구도를 이를 칭의와 성화에도 적용한 것은 아닌지 추정해 봅니다.
새관점학파들은 주장하기를 구약의 유대인들이 은혜로 택함받았지만 율법을 주심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역할로 주신것이라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즉 율법을 지킴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지요. 그리고 율법에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구요. 이런 구도를 신약의 칭의와 성화에도 적용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함을 받고 중생하였지만, 말씀에 올바른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림으로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라고 주장할 수 있음입니다.
김세윤교수가 칭의를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으로 강조하는 것도 이 맥락일 수 있다고 봅니다.
새관점학파의 주장과 그 문제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고 제기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최교수께서는 이 새관점학파가 제기하는 핵심부분들은 거의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새관점학파의 주장은 제가 보기에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이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구속을 믿는다면 이런 주장을 할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은 온전하고 완전한 구속입니다. 구속이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예수님의 것으로 다시 사졌습니다. 그래서 고전 6장 19-20절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하시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와 교회의 주인이심을 명확히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께 되사졌음은 소유가 주 예수께 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히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우리의 그리고 교회의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영원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다시 사셔서 당신의 소유가 되신 우리를 어떤 경우에 다시 뺏기게 되는 일이 있어 날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어떤 피조물이, 무엇이든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작성일:2021-01-07 21:43:24 183.107.23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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