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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이해] (Biblical and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Salvation) (0002)

닉네임
PAUL
등록일
2023-09-11 01:07:09
조회수
118
[구원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이해] (2)
(Biblical and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Salvation)

서 론
(INTRODUCTION)

구원(salvation)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 지도 십수 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원론에 관한 신학의 통일된 견해가 없고,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믿을 수 있는 통일된, 분명한 메시지(unified clear˗cut message)가 없어서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본의 아니게 신학적, 신앙적인 논쟁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래, 세상 사람들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저서인 “4 대우상론”(Four Species of Idols)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그리고 플라톤(Plato)의 “동굴의 알레고리”(Allegory of Cave)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중심(nave)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완고한 선입 관념(preconception)으로 인한 확증편향(confirmation˗bias)에 고착되어 세상만사는 물론, 성경 말씀까지도 확증 편향성에 의해 스스로 해석하고, 그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와 같이 확고한 교리(doctrine)로 굳어져 있어서 도무지 자기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기독교 교회사(the history of Christian church)에서 교리논쟁 중에, 구원론(soteriology)에 관해서 계속된 논쟁(controversy)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논제(論題) 중의 하나가 바로 신자가 “한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가?” 아니면 “이미 받은 구원에서 인간의 행위에 따라 탈락할 수도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이 구원에 관한 논쟁은 신학적으로 5세기경 펠라기우스(Pelagius)와 어거스틴(Augustin)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으로 시작하여, 중세 이후에는 알미니우스(Arminius)와 칼빈(Calvin) 사이의 논쟁으로 이어져 왔고, 오늘날에도 이들의 후예들에 의해 탁상공론과 같은 논쟁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 신학자들의 교리 문제 (성경해석의 문제)

크리스천의 구원 문제에 관하여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사람들이 바로 신학자(교수)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자들에 의하여 성경이 해석되고 교회 회의(종교회의/교단총회)를 통해 교리(doctrine)가 형성되고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무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의 신앙을 위하여 성경 말씀을 신중하게 다루어 성경적 교리 형성에 최선을 다할 사명이 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은 신학자들에 의해 해석된 성경 말씀과 교리로 교육받아 무장하고 나가서 교인들을 교육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이단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신학자들에 의해 잘 못 형성된 교리를 배우고 나가서 교인들을 잘 못 가르치고 인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2. 목회자들의 사역 문제 (성경 교육의 문제)

목회자(목사)들은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교인들을 교육하고 성경 진리로 무장시킬 사명이 있으므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신학교에서 키우고 나와서 교인들에게 신중하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 교인들은 거의 절대적으로 목회자들의 성경해석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잘 못 가르치고, 잘 못 인도한다면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받은 신학훈련은 물론,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면서도 끊임없이 성경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물론 성경해석을 위하여 신학 서적들과 성경해석을 위한 참고서, 특히 훌륭한 성경 주석들을 통하여 자신의 성경해석을 안전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3. 교인들의 신앙 문제 (성경 말씀 적용의 문제)

교인들은 목회자들의 설교와 성경 교육을 통해서 영적이며 윤리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자들을 통하여 잘못된 성경해석이나 잘못된 교리에 의하여 훈련받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영적 사활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성경과 신학 지식에 따라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가 야기된다. 이는 말씀에 따라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반면에, 잘못된 신앙생활에 빠져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원에 관한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비성경적, 신학적 이단이나 최악의 경우 신학적-신앙적 이단으로, 결정적으로 멸망 당할 수도 있으므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교육을 받아야 한다.

문제 제기
(STATEMENT OF SOME PROBLEMS)

1. 한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가?

이 문제는 구원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질문 중 하나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예수를 믿고 칭의를 받아 중생한 사람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는가?”라는 뜻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영원히 보장된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보장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주로 오거스틴(Augustine)과 칼빈(Calvin)의 입장은 “이미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라는 입장이고, 펠라기우스(Pelagius)와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이미 받은 구원이라도 영원히 보장되지 않는다”라는 입장이다. 이같이 오늘날도 한번 얻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견해와 한번 받은 구원이라도 영원히 보장되지 않고 잃을 수도 있다는 견해로 나누인다. 이것이 구원론에 있어서 칼빈주의(Calvinism)와 진보적 자유주의(Liberalism)의 차이점이다.

2.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구원에 대하여 “이미 받은 구원은 취소될 수 없다”라는 견해와 “이미 받은 구원이라도 취소될 수 있다”라는 두 입장이 팽팽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이는 앞의 질문의 평행문 기법으로 반대형식의 질문이다. 칼빈주의(Calvinism)에서는 “이미 받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라는 입장이며, 반면에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에서는 “이미 받은 구원이라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에 따라 취소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칼빈주의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주권(God’s absolute sovereignty)으로 한번 주신 구원의 선물은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고, 알미니우스주의에서는 하나님께서도 인간에게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man’s free will)에 따라 죄를 범하면 이미 받은 구원이라도 취소하신다는 뜻이다. 물론, 일반적인 칼빈주의에서는 인간의 책임(responsibility)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해하지만, 극단적인 칼빈주의(Hyper-Calvinism)는 인간의 책임을 무시한다.

3. 구원은 종말론적인가?

신학적으로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창조와 함께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아날로그(analogue)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신학적인 전문용어인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이라는 구도(frame)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알파(α)와 오메가(ω)가 되시는 하나님의 본성에 의한 것이며 아날로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원리의 문맥들이 모두 이 공식(formula)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날로그 방식으로 보면, 창조에서 시작하여 종말에 이르는 “사건의 순서”(order of events)로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면서도 디지털(digital) 방식으로 들여다보면, 시간(time)과 공간(space)을 초월해서 “주제의 연속”(sequence of topics)에 따라 극적(dramatic)으로 신비롭게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조(creation)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원(salvation)에서도 이러한 원리가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아날로그(analogue) 방식으로 질서정연하게 전개되면서, 디지털(digital) 방식으로 한 폭의 그림(big picture)과 같이, 그리고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 약동하는 한 편의 드라마(drama)와 같이 창조론적이면서도 종말론적인 구조(eschatological framework)로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4. 구원에 대한 칼빈주의 입장은?

칼빈주의(Calvinism)는 물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사상”(God-centered thought)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고부동하게 전제하고, 모든 신학적 주제들(theological issues)을 거기를 출발점(starting point)으로 하여 문제를 전개하고 풀어나간다. 물론, 칼빈주의 신학의 대전제(presupposition)는 “하나님의 절대주권”(God’s Absolute Sovereignty)이며, 모든 신학의 주제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자(the Absolute)로서 인간과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Creator)와 통치자로서 그의 피조물(creature)인 인간과 세상만사를 자신의 절대주권으로 작정(decree)하시고, 예정(predestination)하시며, 섭리(providence)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Elohim/Godhead)께서 세상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실 때(창 1:1), 누구와도 상의(intercommunication)하시지 않으셨고, 다만 삼위일체 하나님(Triune God)께서 내적 교통(intra-communication)을 통하여, 창조의 컨셉(concept/idea)에 따라 인간과 만물 창조를 독단적으로 작정(decree)하시고, 예정(predestination)하시고, 섭리(providence)하시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홀로 한 분으로 계셨고, 절대자(the Absolute One)이시기 때문이다. 구원론에 있어서 칼빈주의의 독특한 주장은 알미니우스주의와 달리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총은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믿음도 알미니우스주의와 달리 인간의 자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 있는 은총의 선물(the gift of grace)이다(엡 2:8).

5. 구원에 대한 알미니우스주의 입장은?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는 “인간의 자유의지”(Man’s free will)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중시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본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제를 출발점으로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극단의 알미니우스주의자 중에는 창조론까지도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의 원리를 개입시키려 한다. 알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중시한다. 그러나 웨슬리안 알미니우스주의(Wesleyan Arminianism)에서는 예지-예정을 주장하고 이중 예정 외에 많은 부분에서 칼빈주의와 유사하다. 특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신인협력설(synergism)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의와 같이 구원론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이 전제는 칼빈주의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만 후속으로 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시는 구원 사역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알미니우스의 영향을 받은 웨슬리(John Wesley)도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서도 후속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 구원의 은총을 거부할 수 있고, 그럴 때 구원에서의 탈락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을 내리시지만, 그 구원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한다. 물론, 이 믿음은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믿음의 성격과 다르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gift)이지만, 알미니우스주의에서 말하는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인간의 “선택”(choice)이다.

6. 구원에 대한 중립적 입장은?

구원에 대한 중립적인 입장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사이에서 중간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 중립적 입장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의 중도 입장을 취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의 타협을 모색하려는 태도이다. 중간입장은 때에 따라 이쪽과 저쪽을 다 수용하는 경향으로, 어떤 의미에서 중간지대에 서 있다는 뜻이다. 확실한 정체성이 없다는 의미도 된다. 좀 혹독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없으므로 기회주의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타협주의는 어떤 부분에서 양편의 교리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다. 그들의 교리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으로 틀에 박혀있으므로 성경을 올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확증편향의 틀(frame)을 깨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또 다른 확증편향의 틀을 만들거나. 이들 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같이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오직 “성경”을 말한다. 오직 “성경적”(Biblical)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피상적으로 기존 정통신학자들의 주장과 같으나, 그 배경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신학을 거부하나 후자는 건전한 신학을 성경해석의 훌륭한 도구로 삼는다. 이에 대하여 후에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성경적”이라는 원칙을 자신들의 전유물같이 생각하나 이는 독선에 불과하다.

한 예로, 어떤 분이 구원의 조건을 논하는 중에 믿음과 행함을 조화시킨 성경적 복음이란 어느 한 편으로 기울어지면 안 되고 모두를 아울러야 한다고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라면서도, “행함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선한 행함이 없으면 그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여 자가당착의 논리로 결국은 알미니우스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피상적으로 “믿음”과 “행함”은 상충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 어느 한 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역설적인 진리이므로, 이를 어떻게 조화롭게 설명하는가이다. 구원 문제 역시 야고보가 말한 대로,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고 하심을 얻는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이다. 물론, 야고보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말은 행함은 반드시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다. 행함(works)이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faith)이 행함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윤리 도덕이에 있어서 성인이라는 공맹이라도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아브라함이나 모세도 자신의 율법으로 결코 쿠원얻은 수 없다고 했다.(롬 3:20; 4:2).

7. 구원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은?

개혁주의 구원론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사람들과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언약에서 성립된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에서부터 출발한다(Berkhof). 개혁주의(Reformed)는 원론적으로 루터와 칼빈의 견해를 취한다. 그러나 칼빈주의 보다도 성경 말씀의 역사성(historicity)에 좀 더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면에서 개혁주의는 칼빈주의보다 좀 더 개혁적이다. 더 나가서 개혁주의는 전 세계의 전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포괄적으로 다룬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로의 구원과 그 방편이 되는 믿음으로 구원 받음과(엡 2:8) 동시에, 구원받은 성도의 행함도 강조한다. 물론, 칼빈 자신은 제네바(Geneva)의 역사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행사하는 개혁을 주도했고, 특히 기독교강요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교리 면에 있어서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는 같지만, 역사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는 개혁주의가 좀 더 적극적이다(Paul). 그러므로 칼빈주의 구원론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따른 것이라며,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다양한 논리로 적극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이 부분에서 칼빈 자신과, 그 당시 시대적 상황과 오늘날 칼빈주의자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개혁주의 입장인 필자의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받은 구원에는 믿음과 행함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와의 상관관계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지만, 인간의 자유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상대적 개념으로 볼 때, 이 둘은 상충하여 충돌하게 되며, 이 충돌을 피하려고 할 때, 어느 한 편으로 기울게 되거나 양자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는 아무리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범위를 넘어 자유를 행사할 때,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범죄로 심판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은 절대적이며, 인간의 자유(human freedom)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에 인간이 도전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선지자들이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 사람들의 불평을 일축했다(사 29:16). 물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닮은 인격적인 인간이기에 하나님께서 기계나 목석같이 다루지 않고 인간의 의견을 수렴하시게 되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허용적 작정(βουλή)이라고 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여 년 여정의 과정(process)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의미한다면, 처음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결정은 궁극적 작정(θέλημα)에 속하며 이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허용적 작정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허용되나, 궁극적 작정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허용되지 않는다.

아담과의 하나님의 언약은 허용적 작정에 속한다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의 언약은 궁극적 작정에 속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양들은 절대로 잃지 않으시고 마지막 날에 반드시 찾으신다는 것이다(요 6:39-40). 구원론에 있어서 “중생”(regeneration)은 궁극적 작정에 따라 구원이 끝까지 보장되나, “성화”(sanctification)는 허용적 작정으로 인간의 행위에 따라 죄를 범하면 징계(chastening)를 받게 되고,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의 투쟁이 지속되다가 죽음과 동시에 영의 성화가 완성된다. 물론, 인간(영육)의 성화는 영육의 분리에서 완성되며,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human body)에서 영화(glorification)로 절정에 이른다. 이 문제에 관하여 후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며, 구체적으로 주석 신학(exegetical theology)에서 성경 구절들을 상세하게 해석하고 충분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작성일:2023-09-11 01:07:09 76.33.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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