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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분들과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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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등록일
2008-12-04 11:13:56
조회수
5251
개인적으로 안티 분들에 대해 미안함과 함께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한국교회가 낳은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연약한 성도들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왜곡시키는 면이 있는데, 그것을 분별하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모습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논리가 너무 빈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그들과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분들과의 논쟁에서 논리와 태도에 있어서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는 간격을 경험했습니다. 이후의 글은 논쟁과 그 이후의 생각을 통하여 정립한 내용들인데, 혹시나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올립니다.

안티분들이 요구하는 내용 중에 가장 첫 번째는 신 존재 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있다면 그것을 증명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아주 정당한 요구 같습니다. 그에 대해 저는 증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신 존재 증명의 사안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 증명하지 못하면서 신이 있다고 하느냐며 공박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렇다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 신 부재를 증명해보라고 합니다. 저는 신 부재도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증명의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의 논리를 따라서 반박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는 정당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증명하지는 않고 신 존재 증명의 책임만 있다고 강변합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상이한 주장을 할 때에 양자가 모두 자기 주장에 대해 증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증명하지 못하였다고 자기 주장이 옳은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안티분들은 대부분 이런 기본적인 사안조차 인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할 일은 자신이 하여야 함에도 상대방에게 감놔라 배놔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지구 주위를 하늘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에나 지금이나 사람이 보는 것은 똑같은데도-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말입니다. 그것은 천동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잘못 판단한 결과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군가가 자기 눈에 보기에 태양이, 하늘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보여서 천동설을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지하다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고집만 피운다는 핀잔을 들을 것입니다. 이미 지동설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신 존재나 신 부재는 모두 증명불가입니다. 증명의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증명의 사안이었다면 곧 증명 가능하였다면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어느 쪽에서든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였을 것이고 그 반대 주장을 펼치는 것은 무지하거나 억지를 부린다고 핀잔을 듣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동설이 증명된 오늘날에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증명이란 어떤 사항이나 판단 따위가 참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일을 뜻합니다. 신 존재에 대해 증명의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참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참인지 아닌지를 밝힌다는 것은 인간의 가진 능력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신 존재에 대한 사안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시간만 지나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무한대이지 않습니다. 비록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인간의 지성은 지속적으로 발달하였고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발달할 것이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거나 확인 가능한 것 안에서만 증명할 수 있다는 한계입니다.

예를 들어 1534년 오전 10시에 현재의 서울 경복궁의 한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명 가능할까요? 증명할 수 있는 길은 그에 관하여 역사적인 자료가 남겨져 있을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살았기에 무슨 일이 있은 것은 분명하지만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 신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가능할까요? 저도 그렇지만 이 글을 읽는 모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명백합니다. 자 그에 대해 누군가가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말하면 증명할 수 있습니까? 저는 증명하지 못합니다. 증명 가능한 분이 있으면 한번 증명해 보십시오.

인간의 능력은 무한대가 아니라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 안에서는 증명이라는 요구가 가능하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증명이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억지입니다. 그냥 각자가 자신이 받아들이는 대로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고 증명해보아라고 요구하는 것은 억지 아니면 무지입니다. 무지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현대물리학이 발전하면서, 특히 유명한 W.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서, 이 세상의 궁극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도구가 절대로 미치지 못하는 不可知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입증>되었다고 합니다. 물리학에서도 그러하니 신 존재에 관하여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신 존재의 유무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도구가 절대로 미치지 못하는 不可知의 영역입니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며 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냥 내버려두십시다. 신 존재를 증명하지도 못했으면서 그러냐고 윽박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냥 내버려두십시다. 신 부재를 증명하지도 못했으면서 그러냐고 몰아붙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냥 내버려두십시다. 언젠가는 밝혀질 수 있다는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하여 무한하게 신뢰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니면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서는 양쪽을 비판하는 회색 인간형의 처세술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들은 위의 전자를 향하여서는 개독이라고 말하고 후자를 향하여서는 덜떨어진 안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간에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말하고 살아가더라도 내버려두십시다.
그냥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선택한 것이고 그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살아가면 되는 것으로 받아들입시다.

사람이 미래에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현재 첫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바뀔 수 있습니다. 현재 두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이 첫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바뀔 수 있습니다. 현재 세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이 첫 번째, 두 번째, 네 번째로 바뀔 수 있습니다. 현재 네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이전에 경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네 번째에서 첫 번째로 바뀐 경우입니다.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가지의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에 있어서 바뀌게 되는 그 입장에서 그 어떤 증명이 이루어졌기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체험과 선택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다면 그 생각을 하루 속히 포기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는 신이 있다는 유신론이면서 그 신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입장임을 아셨으면 합니다. 신학을 공부한 목사님들 중에서 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며 주장을 개진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개인적인 체험이나 기독교인이기에 받아들이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들은 증명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이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신 존재 증명이 가능하였다면 성경에서 그 내용들을 아주 상세하게 적어 우리에게 전해지도록 했을 것입니다.


안티 분들이 주장하는 바로서 순환논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순환논리라면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일면 정당한 주장인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아닙니다. 순환논리라고 하여서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불경을 가지고 말하고 이슬람교에서 꾸란을 가지고 말합니다. 종교의 세계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대해서는 그렇게 지칭된 돌비석의 내용을 근거로 말합니다. 각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도 모든 내용이 주변 국가의 역사에 함께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주변 국가의 역사에 함께 기록되어야만 역사로서 정당한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기록된 내용과 다른 내용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에는 역사로서 받아들입니다. 다른 내용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있을 때에도 어느 쪽이 옳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님에도 안티 분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직 기독교에서 성경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순환논리라면서 반대를 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인 것입니다.


안티 분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을 연결시켜서는 동일시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해서 그 신이 행한 일의 하나입니다.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는 전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으로서 설화입니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설화라고 불립니다. 둘을 전혀 다른 상황이고 다른 문맥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증한 후에 그렇게 연결시키는 것은 옳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게 연결시키는 것은 넌센스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안티 분들은 기독교를 긍정할 만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들의 존재감을 박탈당하는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안타까움을 넘어서 안쓰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반대와 안티 활동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교회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변증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겨지기에 이렇게 생각을 나눕니다.
작성일:2008-12-04 11:13:56 122.128.147.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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