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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의 양태론을 비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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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등록일
2011-01-06 19:33:51
조회수
4847
필자는 고신교단이 아니다. 물론 이단을 20년째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현재 한장총 협동상담위원(소장, 최병규목사)으로 있으며, 기이협의 전문위원, 현대종교 이단상담자문위원으로 있으며, 교회와신앙에서 객원칼럼을 쓰고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 교인들은 필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이곳에 필자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삼위일체를 비판하는 글을 올려 놓았다. 그것도 양태론자가 정통삼위일체를 삼신론이라고 비난하는 용기가 대단하다.

아래 지방교회 교인이 고신교단의 신문인 코람데오닷컴에 들어와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양태론을 옹호하고 지지한다는 자체가 놀랍다. 게다가 그동안 토론방은 글을 쓸 수 없도록 하여 필자가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지방교회 이단들이 정통삼위일체를 비난하는 글을 보고도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 토론방을 풀어주신 코람데오 닷컴에 감사를 드린다. 이번 기회에 지방교회가 과연 어떤 이단인지 그 정체를 낱낱히 밝힐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가 아니다.
신관에서 양태론자일 뿐 아니라,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 성경론에서도 그들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들의 구원론은 신인합일이며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지방교회가 누구인가?
지방교회는 고신(1991/41/이단), 통합(1991/76/이단), 합신, 합동에서 이단으로 발표한 곳이다.

그들이 정통삼위일체를 삼신론이라고 비판하는 그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며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는 변명을 한다는 자체가 놀랍다.

2000-2001년을 전후하여 월간지였던 교회와 신앙지는 특집으로 수개월 동안 최삼경목사와 지방교회 조동욱외 일인과 지상공개토론을 하였다.
그 이후 “교회와 신앙”의 홈페이지의 게시판은 언제나 지방교인들로 시끄러웠다.
그래서 교회와 신앙지는 게시판을 지방교회, 안식교회, 일반 이단등 게시판을 몇 개의 전용게시판으로 분류하여 그들의 토론을 허용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지방교회의 게시판에서 몇몇 난상토론이 있었다. 그곳에서 지방교회 한명이 교회와 신앙지에 공식토론을 요청하였고, “교회와 신앙”지에서는 필자에게 토론을 권유하였으며, 필자는 이를 수락하여 2001년 여름에 교회와 신앙측은 전용토론방을 특별히 만들어 주었고, 필자와 김성일이라는 지방교회 교인은 일대일의 공식 토론을 시작하게 되었다. 토론은 약 3-4개월 동안 행하여졌으며, 지방교회측은 계속 글을 올리는 기간과 태도, 방법, 주제등에 관하여 사전에 약속한 것을 계속 위반하게 되었고, 결국 삼위일체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마침내는 다른 주제(구원론, 종말론, 교회론등)의 토론으로 지속되어가는 과정에서 지방교회측은 더 이상 토론을 할 수 없다고 일방적인 기권으로 중단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다.

최근, 지방교회는 인터넷이란 매체를 통하여 활발하게 지방교회를 알리고 선전하여왔다. 그들의 홈페이지는 상당히 많으며, 홈페이지에는 교육을 받은 전문 운영자들이 있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왔다.

그동안 지방교회와 토론을 한 사람들이 몇분(최삼경목사, 양승욱목사, 필자등) 있었는데, 지방교회는 토론에서 매우 이상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그동안 약 10년이상을 많은 이단들과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특히 지방교회가 사용하는 토론방법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매우 비열한 방법이었으며, 이단이라고 불리지만 도저히 신앙인의 방법이라고 볼 수 없는, 더군다나 이단이라고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당당함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비열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 토론은 논리적인 내용에 대한 성경적 토론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교리를 위장하고 감추며, 오히려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며, 토론자를 삼신론자라고 공격하는 수법을 사용하며, 또 신학자들의 문헌과 서적을 왜곡시켜 부분적으로만 인용하여 다른 의미로 바꾸는 수법을 사용한다. 왜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추종하는 교리와 사상을 굳이 위장하고 감추면서 토론에 임할까?
그동안 그들이 사용한 수법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들의 삼위일체론(삼일신론)이 양태론적 삼위일체가 아니라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을 하고 오히려 일반교회측의 토론자를 삼신론자라고 비방함으로서, 그 토론을 지켜보는 초심자들이 혹시 착각을 하게 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국내외로 유명한 몇몇 신학자들의 조직신학책 몇권만 참고하면 이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된다. 지방교회는 토론하는 상대자마다 삼신론자라고 비난하며 공격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양태론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둘째, 자신들의 삼위일체론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 초대교부들의 교회사적인 주장을 인용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초대교부들의 주장은 삼위일체가 발전되어져가는 과정의 논리임을 알아야만 하며, 이러한 논리들이 궁극적인 정통삼위일체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 경륜적 삼위일체등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져가는 과정중에 있는 시대적인 용어일 뿐이며, 그러한 견해는 중심적인 신학이 아니었으며, 궁극적인 삼위일체론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삼위일체 형성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하는 수법이다.

셋째, 이들은 자신들의 양태론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조작하기 위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나 양태론을 주장하는 극소수 신학교수들의 견해를 전통적인 신학인것으로 위장하여 소개한다. 그러한 극소수의 주장이 전통적인 삼위일체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함이다.
때로는 국내외로 유명한 신학자들의 책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그 책들의 내용에서 전체적인 의미와 전혀 다른, 부분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내용만 골라서 선택적으로 인용함으로서 그 책들이 지방교회의 삼일신론과 동일한 것처럼 위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방교회는 이종성박사의 책과 차영배교수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지방교회의 삼일신론이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종성박사와 차영배교수, 김명용교수, 김영재교수등이 교회와 신앙의 특집기사(2001년 10월호)에서 지방교회는 분명한 양태론이라고 직접 비판함으로서, 그동안 이 신학자와 교수의 글을 인용하며 자신들이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하던 지방교회의 주장이 얼마나 거짓인지가 밝혀진 적이 있었다. 또 토론을 하다보면, 한국교회에서만 삼위일체가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물론 세계의 저명한 신학자의 책을 인용하면 이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된다.
실제적인 예를 들자면, 캘빈의 주장 중에서 오해를 받을만한 한마디만 골라 찾아서 부분적으로 올려놓든지, 웨슬레의 주장 한마디만 인용하여 부분적으로 올려놓고, 캘빈과 웨슬레도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인 양태론과 같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이런 수법은 그야말로 한마디로 기가 막힐 정도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 정식으로 문헌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반박하면,더 이상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수법이다.

넷째, 자신들의 위장적 조작이 통하지 않게되면, 일반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비성경적이며, 자신들의 양태론적인 교리가 더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삼위일체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토론은 오히려 바람직하며 이러한 토론은 이들의 주장이 비성경적임이 곧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여의치 않으면 일반교회의 신학을 “교리주의”라고 비난하는 둥, 이러한 지방교회의 주장은 자주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그동안 자신들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해 온 것이 모두 거짓임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이라고 계속 우기다가 그것이 발각되자, 일반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교리주의라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교리가 없는가? 그들은 양태론이라는 교리를 갖고 있으며, 그들이야말로 100명이면 100명이 모두 그들의 지도자(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와 무조건 동일한 교리를 추종하는 그야말로 교리주의인 것이다. 항상 이단들은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고, 그들의 지도자의 개인적인 교리와 신학사상에 무조건 맹종한다.

일반적인 성경적 진리 토론의 경우을 보면, 이단이라고 불리는 곳도 완전 사이비단체가 아닌 다음에는 그들 자신도 나름대로 성경적이라고 믿으며, 자신들의 견해를 당당하게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지방교회와의 토론에서 보면, 지방교회의 토론방법과 태도는 신앙인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 위장, 모함과 왜곡에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일반 교회의 유명한 신학자의 책을 지방교회의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책들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할 수 있는가? 그들은 스스로가 일반 교회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보는지, 그들의 유치한 수법에 그들의 영혼의 정체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느낌이었다.

지방교회의 자료가 미비한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지방교회와의 토론을 정리하여 볼 필요성을 느껴서, 정리를 해보았다. 필자가 토론 끝에 내린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1.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2. 지방교회의 구원론, 인간론, 기독론, 종말론, 교회론등의 사상과 교리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것과 전혀 다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교리와 사상이 전통적인 기독교라고 위장하고 왜곡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단들보다도 더욱 위험한 집단이다.

먼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면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른 교리와 사상까지도 모두 정리하여 볼 계획이다.
먼저 지방교회를 알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론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또한 전통적인 교회의 올바른 삼위일체와 양태론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삼위일체란 성경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으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불구하고, 성경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에서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 양태론이다.
양태론을 쉽게 설명하자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한 인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필자는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되어진다.
이러한 비유는 한 실존적인 인격의 세가지 양태(Mode)를 보여주며, 이러한 것을 단일신론적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이단적인 주장이다.
본인의 세 양태, 사장과 권사와 가장이라는 사역적인 직분은 상호간에 인격적 교류나 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세 양태가 동일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역적인 분류를 곧 경륜적삼위일체(경세적삼위일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4세기 무렵에 잠시 있던 견해로서 물론 현재 우리가 인정하는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십자가 이후로는 성령의 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양태론인데,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간의 인격적인 교통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진다.
또 삼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하는 세분의 신(하나님)이 각각 분리되어 계시다는 주장인데, 다시 말하자면 세분의 신을 믿는 이러한 주장은 삼신론이 되고 만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분의 분리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주장하므로서, 최근에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단일신론은 오직 성부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대표적인 곳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가 이에 속하며, 구약성경만을 인정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이 되고만다.
또한 몰몬교와 같이 다신론을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으며, 더욱이 누구나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통일교도 성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런데 지방교회 역시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 중에 하나이다.

그동안 삼위일체론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오랫동안 삼위일체에 대해서 좀 쉽게 설명하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때로는 한 물방울이 셋으로 갈라지거나 다시 하나로 합하여지는 것을 삼위일체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삼위적인 양식을 물과 수증기와 얼음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욱 혼란만 가증시킬 뿐이며, 양태론적인 자들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물에 대한 비유 외에도,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비유하여 삼위일체를 동일한 수박의 다른 형태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혹간은 삼각형의 세 내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세상의 어떤 물질에 대한 유비와 비교할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삼위일체를 아주 쉽게 이해하기 위한 위의 여러가지 유비는,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에 약간의 도움은 줄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바람직한 설명은 결코 되지 못한다.
특히 지방교회는 물과 수증기, 얼음의 비유를 하고 있으며 그리고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삼위일체를 비유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의 세가지 명제는 아래와 같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인간의 논리적인 이해를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이해가 어렵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일단 기록된 그대로 정리하여, 삼위일체라는 논리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란 논리가 먼저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그것을 반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교회사를 공부해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아래의 세가지 명제는 가장 성경적인 사항이다. 즉 세가지 명제를 만족하는 삼위일체가 정확한 삼위일체가 되어진다.

1)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이시며, 각 삼위는 상호관계적인 면에서 서로 구별되어짐으로서 인격적인 교통을 나눌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본질적이며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유일한 한분이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에 그렇게 언급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세 위격은 인격적인 구별은 되지만, 본질적으로 분리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삼위일체를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하나의 신성을 공유하는 세 인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정통신학이 말하는 대표적인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내용이다. 정확한 책명과 페이지수를 밝혔으므로 누구든지 찾아 확인할 수 있으며, 이것을 올리는 이유는 지방교회가 자신들의 양태론을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므로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기때문이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81쪽)
우리가 보통 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한 신성(godhead)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한다. 이 서로 다른 셋은 상호관계라는 관계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이해하여야만 본질의 동일성과 이 셋의 구별이라는 형식이 만들어진다.

(아가페 성경사전 776쪽)
삼위일체론이 바탕을 두고 있는 성경의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세 위격이 각각 하나님(신)으로 인정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세 위격들 가운데서 각각 구별된(distintion) 모습으로 나타난다.

(같은 책 788쪽)
삼위일체론 정립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한가지의 내용은 세 위격들 사이의 상호작용(그러므로 서로 구별이 가능하다)에 관한 내용이다. 특히 예수님과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대상인 아버지(the Father)와의 상호작용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마26:39)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상권 366쪽)
왜냐하면 각 위격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각 위격 간의 차이는 존재의 차이가 아니라 관계의 차이이며, 그럼에도 각 위격은 실제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같은 책, 347쪽)
양태론의 결정적인 결함은 성경 여러곳에 나타나 있는 삼위간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혹은 그것들을 단지 환상일뿐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이 입장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가 함께 계셔서 성부께서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는 비둘기같이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해야 된다. 또한 예수께서 성부께 기도하신 모든 경우들을 환상이나 제스츄어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성자와 성령에 관한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양태론은 속죄의 핵심을 잃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대속의 희생제물로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진노를 담당하셨으며, 삼위를 대변하는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고 만족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된다.

(같은 책, 333쪽)
하나님이 삼위이시라는 말은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그리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세분이 각각 다른 인격체임은 앞에서 인용한 여러 성구에서 이미 살펴 보았으며 신약성경에는 그 외에도 많은 구절이 있다.

(루이스벌콥의 기독교신학개론 85쪽)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계시의 교리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은 교리이며, 인간이성으로서는 발견할 수 없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분이시나, 이 한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여러 사람들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오히려 신적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자기 구별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 조직신학 262쪽)
이 사실은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고 또 일반적으로 합의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사벨리안 체제는 결코 어떤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부에 의해서 보냄을 받고, 그에게서 오며, 그에게로 돌아가고, 그의 명령을 받고, 그의 뜻을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 의해서 사랑받고, 그에게 기도를 하며, 당신이란 대명사를 사용하고 또한 그에 대해 언급할 때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칭호를, 아버지와 아들에 역시 포함되어있다.

일반적으로 위의 책들은 정통신학을 대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얼마든지 더 국내외의 신학서적을 소개할 수도 있으며 자료는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면 양태론에 대해서는 정통신학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뒤에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의 실제적인 주장을 그 책명과 페이지 수를 밝히며 소개한다.
본인이 양태론에 대해서 정통신학서적을 참고하려는 이유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많은 단체들이 언제나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양태론이 정통신학인 것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물론 성경적인 설명도 충분히 할 것이다)
양태론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삼위가 각각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하나님 자신이 성자 예수로 오셨고, 성자 예수가 십자가 이후 성령으로 오셨다는 주장은 분명한 양태론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양태론은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려는 열정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입장은 한분뿐이신 하나님에 관한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구절이나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구절들을 통해 지지를 얻는다" (같은 책, 347쪽)

"싸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87쪽)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본체가 자신을 나타날 때의 세형상을 가르키는 것이라 하였다.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 신복윤교수)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이제 유명한 신학자들의 교과서적인 신학서적의 내용을 살펴 보았다. 이제 무엇이 올바른 삼위일체이며, 무엇이 양태론인지 충분히 분간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필자와 최삼경목사를 삼신론자라고 하였던 지방교회측은 차라리 이종성박사와 루이스벌콥도 삼신론자이며, 웨인그루뎀도 삼신론자이며, 하지, 제럴드브레이, 성경사전의 저자도 모두 삼신론자라고 하여야만 할 것이다.
지방교회는 이제 그만 자신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하지 말고, 누가 더 성경적인가를 토론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명실상부한 지방교회의 지도자인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하여보자.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의 하나님 297쪽)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전형적인 양태론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가지의 세 단계” 혹은 “세 방면”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태론을 설명하는 신학서적을 보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계속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살펴 보자.

#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55-56쪽).


# 왜 그 분의 경륜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세 인격들이 필요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분의 하나님이다. (하나님 363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290쪽)

위의 글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아예 위트니스 리는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와 정통적인 가르침과 해석에서 벗어났다고 주장을 한다. 마치 삼위일체와 양태론에 대한 정의와 판결을 위트니스 리 개인이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언급된 명확한 계시에 근거한 정통적인 가르침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도 한 하나님이요, 아들도 한 하나님이요, 성령도 한 하나님으로서 세 하나님이 단체적인 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한다(하나님 282쪽)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하나님 287쪽)

지방교회의 주장은 양태론이다. 아니 적어도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양태론이 분명하다.
어느 누가 보아도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마리아의 태 속에 들어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예수로 이땅에 와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지방교회의 주장이며, 어느 누가 보아도 이것은 전형적인 양태론이 분명하다.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와 다르다고 말할 자신이 있는가? 지방교회가 위트니스 리와 다르다고 답변할 수 없다면, 지방교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아니라고 솔직히 말해야만 한다.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288쪽)

이들은 자신들의 삼일신론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상호내재”를 주장하는데, 이 개념은 세 위격의 “동시존재”를 의미한다.
즉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이 함께 있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 있으며,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기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상호내재의 개념은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의 개념과 다르다.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하면 양태론을 모면해 볼까하는 궁리끝에 나온 것으로 보이며, 더욱 오류와 모순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그동안 보았듯이, 위트니스 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세 단계와 세 방면으로 보았으며 한 인격, 한 실제의 세형태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 삼위가 하나님 안에 동시에 공존하는 성분이나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의 다음 주장을 살펴보자.

#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14장26절에 의하면 삼일성의 첫 번째가 세 번째를 보내셨다. 그러나 세 번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 분은 두 번째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15장26절에 의하면, 세 번째는 첫 번째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번째에 의해서도 보내심을 받았다. 세 번째가 오셨을 때 그분은 두 번째로 첫 번째와 함께 오셨다. 하나가 보내심을 받을 때에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가 올 때 모두가 오는 것이다.(성령. 190쪽)

지방교회의 주장대로 상호내재를 한 인격 안의 동시존재로 생각하여보자.
이들의 주장은 오류가 곧 드러난다. 그렇다면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셨는데, 보내시는 성부하나님 안에서도 삼위가 상호내재하고, 보내심을 받은 성자와 성령에게도 각각 삼위가 상호내재한다면, 삼체구위가 되고만다. 삼체구위가 아니라면, 어떻게 상호존재, 동시존재인 삼위가 분리되어 파송되어질 수 있는가? 이들의 주장은 곧 오류로 밝혀진다.
위트니스 리는 예수와 성령(부활의 영)은 상호내재가 아니라, 한 인격의 하나님이 거치는 두 단계 혹은 두 과정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거치는 과정과 단계가 어떻게 상호내재가 되어지는가? 달리 말하자면, 상호내재되며 동시존재되는 삼중적인 존재가 어떻게 하여 거치는 단계와 과정이 되어지는가?
한 인격안에 분리되지 않고 상호 동시존재하는 세요소가 어떻게 서로 파송을 할 수 있는가?
지방교회가 말하는 삼위란 거치는 과정과 단계를 말하는가? 아니면 한 인격 안에 동시존재 혹은 상호내재하는 요소나 성분을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주장은 양태론을 더욱 이상하게 변형시킴으로 더욱 모순되게 할 뿐이다.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 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또 이들에게 있어서 구약의 하나님의 영과 신약의 성령과 부활후의 영(생명주는 영)이 그 개념이 다르다. 만일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성령)과 성부하나님이 각각 공존하여 동시사역을 한다면 한 인격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령이 각각 공존하여 동시사역을 한다면 한 인격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단계와 과정을 거치고 변화하여 최종완결된 것이 부활후 영이라는 주장이다.

#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지만, 그것은 최종 완결된 영이 아니다. 여호와의 영과 성령도 최종 완결된 영도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최종 완결된 영이 계시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 후였다. 이 영은 창세기의 하나님의 영, 구약의 여호와의 영, 마태복음 1장의 성령과 다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7-28쪽)

지방교회의 삼일신론은 전통적인 삼위일체와 전혀 다르다. 이들은 이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어느 전통적인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의 영과 성령과 부활후 영이 다르다고 말하는가?
이들에게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닌,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주장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위트니스 리라는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더욱이 자신들의 주장이 전통적이라고 주장하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견해가 전통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방교회는 자신이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다고 고백하는 위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가?

#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78쪽)

위트니스 리는 자신이 양태론이라고 고백한다. 비록 양태론자이지만 그래도 당당하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주장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며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방교회는 아래의 주장과 같이 아들과 아버지와 영을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위트니스 리를 이단으로 공포할 수 있는가? 혹은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의 견해는 다르다고 변명할 수 있는가?

#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 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성령42쪽)

지방교회가 정의하는 상호내재란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그 개념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던 불완전한 견해였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 상호내재등의 논리는 모두 삼위일체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존재하였던 견해일 뿐이며, 실제로 그러한 견해는 모두 양태론이라는 위험한 논리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다음은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자신들도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 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 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이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쪽)

위 글을 읽고 지방교회도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고 생각할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글을 읽어보자....

(경륜적과 본질적인 설명)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이들이 말하는 용어를 파악하면 이들의 주장은 전혀 어렵지 않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란 실제적인 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인 분류일 뿐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단지 사역적으로만 구별된다는 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즉 그들이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으로만 구별되어진다는 것이다.
정통신학이 말하는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삼위, 상호관계를 갖는 삼위는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자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지방교회는 초대교회 교부들도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여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는 정통삼위일체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종성박사의 교회사적인 삼위일체론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허위조작인가 곧 알 수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란 이미 4세기 이후에 자취를 감춘 이론일 뿐이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경륜적과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위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들은 본질적으로는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 자료를 보면 이 상호내재란 개념이 바로 양태론으로 발전하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개념이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면 안된다. 상호내재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여야만 한다. 그렇기에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상호내재라는 개념이 비판을 받아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필자주: 초대교부)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필자주:양태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 상호점유(필자주: 상호내재)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87쪽)

다음은 상호내재를 말하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주석성경을 살펴보자.
오픈2 주석성경은, 박형용교수, 유재원교수, 윤영탁교수가 주석의 감수위원으로 적혀 있다.

오픈2 주석성경:(신약 172쪽, 173쪽)
14:9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듯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뜻한다. 곧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 그분의 뜻, 계획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는 구별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심>을 말한다.
14:20 내가 아버지 안에....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친밀한 영적결합>을 의미한다.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발전해갔던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삼위일체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양태론이란 논리는 항상 등장했으며, 그 양태론은 2000년 교회사동안 언제나 위험하고 이단적인 주장이었으며 양태론이 정통삼위일체가 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 개념적인 면에서 그들은(갑바도기아 교부들) 휘포스타시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르게 발전시
키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에서 그 용어는 우리가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연상하는 충만
한 의미상의 발전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2쪽)

#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 3세기 초에 터툴리안은 인격들(persons), 얼굴들(faces), 가면들(masks)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빌어서 세 위격, 한 본질(Three persons, One essence)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후 같은 세기의 사벨리우스는 터툴리언의 개념으로부터 약간 애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양태론(이는 문자적으로 아버지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성부고난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는 신고난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과 같은 개념으로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켰다. 그는 세 개의 구별된 실체들이 한 신성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성부의 형태, 성자의 형태, 성령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참조: 물, 얼음, 수증기와 같이 유사성을 갖는 세 인격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가폐 성경사전 779쪽)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헬라어 “프로소폰”은 라틴어의 “페르소나”라는 말과 같이 그 어원이 얼굴, 모양, 또는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의미하였다. 한 배우가 세가지의 가면을 쓸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대에서 한명의 배우가 서로 다른 세 사람의 가면을 쓰고 다른 역을 맡을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인격의 하나님이 세 역할, 즉 창조자로서, 구속자로서, 성화자로서의 삼중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즉 영어적으로 볼 때에 한 인격적 존재가 경륜적(사역적)으로 세 역할을 하였다고 오해될 수 있었으므로, 그러한 견해가 곧 양태론으로 발전하는 위험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앞에 올렸던 위트니스 리의 글을 다시 상세히 읽어보라....그러면 누구나 지방교회는 양태론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사상을 위장하면 할수록, 필자는 더욱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양태론이 왜 이단적인 주장이 되는가?
예수님이 곧 성부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이라고 주장하는 양태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성경적인 답변을 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양태론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격적 구별이 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예수와 그것을 속죄제물로 온전히 받으신 하나님이 동일한 인격이 되고만다. 즉 기독교의 십자가 대속의 개념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다음은 양태론이 모순이라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인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인가? 경륜적으로 질문한 것이 결코 아니란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2)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사였는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바쳐진 제사였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상호존재과 동시존재를 주장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 제사로 바쳐지기 위해 예수님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어진다.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이다......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바쳤으며 누가 그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았는가?

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4)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22:43).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를 본 것인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본 것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되었다(동시대에 공존하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말한 "내 주"는 곧 예수이시다..... 다윗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를 구별하였으며 예수님이 직접 구약의 이 말씀을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삼신론자인가?
만일 인격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다윗은 세 인격을 어떻게 구별하였을까?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이 장차 거쳐야 할 두 번째 단계를 구별하여 보았는가? 신약에서 예수님은 그 문장을 유대인들에게 친히 직접 말씀하셨다.

5)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하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6)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키는가? 바울은 삼신론자인가?

7)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인가?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안에서 들려오던 예수님 자신의 소리인가? 복음서의 기자들은 삼신론자들인가?

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인가? 스데반은 삼신론자였는가?

9)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10)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아니면, 부어주시는 하나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고, 부음을 받으시는 예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으며, 붓는 성령도 삼위가 내재되어있단 말인가?
혹은 자신이 자기에게 자신을 부어주셨는가?
누가는 삼신론자였는가? 아니면 구위삼체론자였는가?

지방교회는 인간론, 기독론(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견해도 전통적인 기독교와 전혀 다르며 초대교회부터 있어왔던 이단적인 주장들을 추종한다.
또한 신론뿐 아니라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 인간론도 모두 전통적인 기독교의 것이 아니다.
또 부활관과 천국관도 전혀 다르며 모두 극단적이며 부분적이다.
예를 들자면 심지어 그들은 단체구원을 주장하며, 믿음이 아닌 행위구원을 주장하며, 죽어서 가는 장소적인 천국의 개념도 부정하며, 실제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거듭남, 부활, 영생이라고 주장한다.
또 위트니스 리의 성경해석은 심한 알레고리(풍유)로 왜곡되어있다. 어떤 경우에는 누가 보아도 전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유치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라는 첫단추를 잘못 꿰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언급하는 성경적인 기록을 모두 달리 해석하여야만 하는 위트니스 리로서는 무리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위트니스 리는 스스로 지방교회가 기독교와 다르다고 수없을 만큼 그의 책에서 반복하여 말하고 있으며, 카톨릭과 기독교를 사탄의 교회, 음녀, 바벨론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으므로, 여느 이단과 동일한 배타적이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의 후계자들은 - 이중의 얼굴을 가진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오늘도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지방교회는 토론을 할 때에, 차영배교수의 책을 인용하곤 한다. 그런데 차영배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 해 전에 최삼경 목사와 윗트니스 리측이 교리논쟁을 했다. 그 때 최삼경 목사가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임을 밝히자, 반대로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최삼경 목사를 삼신론자라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결국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본다. 최목사가 논쟁 중에"윗트니스 리의 주장처럼 한 분 하나님(성자) 안에 다른 두 분 하나님이 들어와서 한 인격이 된다고 한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태론이다‘,"그리고 성자 하나님만 육신을 입었다"라고 한 것을 가지고 삼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양태론적 눈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 아닐 수 없다.”(차영배교수)
작성일:2011-01-06 19:33:51 121.140.4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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