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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의 이중성과 그들이 주장하는 상호내재

닉네임
이인규
등록일
2011-01-06 19:54:43
조회수
4646
지방교회의 이중성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복음주의이며, 자신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라고 하면서 한기총에 재심사를 요청하였다. 과연 그들이 기독교인가?
아래 글을 보라, 그들은 기독교를 사단, 음녀라고 비난한다.

-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이 문제를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9쪽)
 
-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사람이심을 시인한다. 또 이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오늘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53쪽)
 
- 마찬가지로 교회 시대에서 그분은 이러한 이기는 무리들을 기독교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 분은 오직 그분의 회복 안에서 소수의 이기는 자들을 찾아낼 수 있다. 계시록 14장은 비록 많은 이들이 구원받았지만 이기는 자들은 다만 144,000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67쪽)
 
-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삼일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은 삼일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재하심의 실제이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비밀. 24쪽)

- 기독교에 속지 말자. 기독교에는 숱한 허사가 많고 특히 교회는 그렇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거의 실제적이지 못하다. 신약계시에 따르면 교회, 그리스도의 몸은 지역[지방]교회 로서 표출된다. 내게 지방교회가 없으면 내 교회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교회는 지방교회 안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미국 지방교회 홈페이지 내용)
 
지방교회는 자신들만이 유일한 참 교회라는 차별성과 배타성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를 거짓, 사탄, 바벨론, 음녀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여 지방교회가 복음주의에 충실한 곳이라면 기독교는 사탄이 세운 교회가 됨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 가라지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큰 나무는 오늘날의 기독교계를 의미한다. 누룩은 이교도의 모든 관습, 세상적인 것, 죄있는 것, 우상숭배를 의미한다. 여자는 로마 천주교, 심지어 기독교계까지도 의미하며, 악한 자는 사단 자신이다. (위트니스 리, 왕국, 265쪽)
 
- 음녀들의 어미는 변절한 교회이므로 그 여자의 딸들인 그 음녀들은 어느 정도 변절한 로마 천주교의 가르침과 실행들과 전통을 붙잡고 있는 기독교 안의 모든 각종 종파들과 단체들 임에 틀림없다. 순수한 교회생활에는 변절한 교회로부터 전수한 악이 전혀 없다.(위트니스 리, 교회 391쪽)
 
- 참된 지방교회들은 순수한 금등대들인 데 반하여,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 교파들과 독립단체들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기독교계는 완전히 순수성을 잃은 큰 혼합물이다. 이 혼합물이 큰 바벨론을 구성한다.(위트니스 리, 교회 390쪽)
 
- 계시록 17장4절과 5절에서 우리는 변절한 기독교계의 참 상황을 본다. 밖의 모습은 단지 전시일 뿐이다. 내적으로 변절한 기독교계는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들로 가득 차있다. 그 여자는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극도로 불결하다. 이것이 곧 교회의 타락의 최종완성이다.(위트니스 리, 교회 391쪽)
  
기독교를 사탄이라고 정의하는 지방교회에서, 한기총과 교단의 이대위에게 자신들을 재평가하여 달라고 요청한다는 자체가 웃을 수 없는 코메디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탄이며 음녀라고 부르는 기독교에 자신들도 동일한 복음주의 사상을 갖고 있으므로, 자신들을 재평가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뒤로 돌아서면 즉시로 웃음을 보이며 그들의 긴 혀를 낼름 거릴 것이다.

상호내재란 무엇인가?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게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요14;10, 11)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in) 거하는 복합적인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다. 자칫 문자적으로 생각하면,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서로의 몸을 자신의 안으로 삼키는 것을 연상시킨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거하는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성경구절이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야기시켰던 문제의 구절이었다. 이것을 초대교회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셋이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윤무(輪舞)를 뜻한다.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 차라리 당당한 양태론자가 되라고 충고하고 싶다. 자신들의 주장마저 감추고 위장하는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의 후예라고 할 수 있을까?

상호내재에 관하여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288쪽)

위트니스 리는 성부하나님 안에 성자예수님과 성령이 함께 동시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분리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안에서도 성자예수와 성령님이 함께 동시존재했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도 하나님과 성령님이 함께 동시존재했으며,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죽으실 때에도 그 안에 하나님과 성령님이 함께 동시존재했다는 것이다. 물론 부활후 영 안에서도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이 동시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즉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과 성령도 함께 동시존재하게 되므로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되고 만다.
또 예수님이 성부하나님에게 기도를 하실 때에, 자기가 자신의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를 한 것이 된다.
그래서 위트니스 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1#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쪽)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2# 그러므로 요한복음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은 땅에 계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 그 분은 땅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셨던 분이시기도 했다.(하나님 323쪽)

이것이 한 인격 안의 동시존재인가? 한 분은 땅에 계시고 한 분은 하늘에 계시는데 어떻게 동시존재라고 말하며, 어떻게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은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이것은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별도의 설명을 할 것이다)

초대교회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사용하였던 “상호점유”(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는 서로가 서로의 안에 거하는 형태를 의미하였던 단어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요소, 혹은 세 성분이 한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이러한 주장은 훗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양태론으로 발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물론 지금도 지방교회, 베뢰아등은 이러한 양태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들은 초대교회 교부들도 이런 주장을 갖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정통신학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부들이 갖고 있던 주장이었으므로, 정통삼위일체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다시 말하여 초대교회 교부들의 주장이 곧 정통삼위일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을 교회사적인 교리를 공부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 용어는 삼위일체 이론이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존재했던 용어로서, 상당한 비판을 받았던 용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즉 그 "페리코레시스"라는 "상호점유"란 개념은 위격의 구별성과 위격의 상호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의문과 비난을 받았던 견해이었다.
성자는 성부에게 기도를 하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파송시키며, 성자예수는 성부에게 온전히 바쳐진 화목제물이 되며, 성부 하나님은 그 제물을 온 인류의 대속물로서 온전히 받으셨다.....이렇게 인격적으로 상호구별되어지는 삼위가 한 인격, 한 장소안에 동시존재하는 삼위라고 한다면, 상호관계가 가능한 인격적인 구별이 도저히 설명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아래의 글을 인용하지 못할 것이다.

#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87쪽)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는 상호점유는 세 휘포스타시스(위격)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초기이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즉 세 위격이 상호점유(페리코레시스)라는 형태로 동시존재한다는 주장은 상호간에 구별되는 인격에 대한 성경구절을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비판을 받았던 주장이라는 것이다.

# 개념적인 면에서 그들은(갑바도기아 교부들) 휘포타시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에서 그 용어는 우리가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연상하는 충만한 의미상의 발전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2쪽)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 중 한 사람이었던 바실은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본인은 상호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다만 본인이 믿고 지지하는 상호내재란 성경적인 개념의 상호내재이며,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이며, 지방교회의 것과 다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실제 예를 살펴보고,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가 무엇인지 살펴 보겠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많은 사람은 모두 한 인격일까? 많은 사람이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하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인한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뜻하는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종이나 자주자와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한 인격이며 한 장소에 동시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한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을 보면 확실하게 나타난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30)

바울과 빌립보교인은 서로가 안에 거하는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뜻하였는가? 아니면 한 믿음 안에서의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의미하였는가?
감옥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안에 인격적으로 동시존재하며, 빌립보교인들의 인격이 바울의 인격 안에 동시존재, 상호내재하였는가?
과연 그들은 한 인격이었는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 유기체적인 연결을 의미하였는가?

즉 앞에서 말한 요한복음의 상호내재는 “인격 안의 인격”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유기체적인 영적교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구래서 상호내재는 상호침투, 상호교류라는 동적인 개념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에서 상호내재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확인하자.

오픈2 주석성경:(신약 172쪽, 173쪽)
[요14:9]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듯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뜻한다. 곧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 그분의 뜻, 계획>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는 구별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심을 말한다.

[요14:20] 내가 아버지 안에....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친밀한 <영적결합>을 의미한다.

오픈2 주석성경은 박형용교수, 유재원교수, 윤영탁교수가 감수한 책이다.
신학자들과 정통신학에서는 “상호내재”란 "본질적인 하나" 혹은 "유기체적인 영적연합"을 의미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즉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연합”을 의미한다.

웨슬레목사도 역시 상호내재를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주장한다.
웨슬레는 그 상호내재를 "일치" 혹은 "단일성"으로 해석하며, "구별된 인격"을 주장한다.
또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였다. 즉 "단일적인 본질의 일치"와 “구별된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성부와 성자가 성령과 함께 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유명한 조직신학자인 웨인그루뎀도 다음과 같이 상호내재를 설명하였다.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루이스 벌콥은 지방교회와 같은 신인합일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C. 신비적연합의 그릇된 개념들. 2. 신비적 오류:
다른 위험한 오류는 신비적 연합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 신비주의자들의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신비적 연합에는 본질의 연합이 있으며, 거기에는 한편의 인격성이 단순히 다른 편의 인격성으로 합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는 두 개의 구별된 인격들로 남아있지 않는다.(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199쪽)

또 지방교회의 주장이 오류가 되는 성경적인 증거가 있다.

요한복음14:10을 상호내재의 근거로 본다면, 다음 성경 구절은 성부, 성자, 성도를 포함하는 상호내재가 되어지지 않는가? 지방교회는 성령을 제외한 성부, 성자, 성도의 동시존재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곳인가?

"그 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이 성경구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믿는 성도들의 삼위일체"가 된다고 해석하는가?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란 성부와 성자와 성도의 동시존재를 의미하는가?
그래서 성경본문은 유기적인 연합에 의한 단일성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에 거하고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2;24)

상호내재란 같은 믿음, 같은 사랑, 같은 목적으로 연결된 유기체적인 영적인 연합을 가르킨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예수가 Master(주)가 되심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예수라는 뿌리에 연결된 가지가 되므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10)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아래의 성경구절이 전혀 보이지 않는가 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믿음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서로의 안(in)에 거하는 상호내재가 되는 것이다.
상호내재가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같이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었으며, 특이하게 성경을 달리 해석하여야만 알 수 있는 뜻이 아니며, “믿음으로 인한 연합”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하셨으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전7:15-17)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이 되어진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두 인격이 한 인격으로 합체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창기와 같은 성적 탐욕을 가진 동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창기와 실제적인 연합이나 한 몸, 한 인격이 아니라, 영적인 동질성을 말하는 것이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실제로 두 몸이 한 몸으로 변화하는가? 그렇다면 창기는 수백 수천 인격이 함께 동시존재, 상호점유하는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한 영이 된다는 것은, 실제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인 영적 연결을 뜻한다.
즉 창기와 합하는 자가 창기와 한 인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같은 영적인 동질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실제로 한 인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영적인 동질성을 가진 사람이 되며, 그것이 “연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상호내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삼위일체라고도 불리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역사를 살펴 보아야만 한다.
초대교회의 갑바도기아교부들이 주장하였던 상호내재에 대해서 알아보자.

# 갑바도기아 모델의 장점부터 얘기하자면, 상호점유론으로 대표되는 사상은 의심할 바 없는 진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에 횡행하던 이단들에 대항한 싸움에서 천재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라 묘사할 수 있는 중요한 기여였다. 갑바도기아 모델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위격 들 각각이 서로 혼란이 없이 충분한 신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91쪽)

물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셋을 대표하는 한 본질을 동시에 보는 것이며, 그 순서에 따라서 세 인격을 차례대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을 위격들의 상호점유[co-inherence of the persons: 헬라어로는 perichoresis, 라틴어로는 circuminsessio]라고 한다. 원래,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상호교류나 상호순환, 혹은 상호상통이라는 개념(영적 교류)에 가깝다.
원래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라는 단어는 오리겐의 종속설과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제시된 단어였다.
즉 성부라는 주격 안에 종속적으로 성자와 성령의 인격이 있다는 오리겐의 주장에 대항하여,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것을 수정하기 위하여 “페리코레시스”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갑바도기아 삼위일체론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의 본성은 성부의 위격 안에 인격화 되었다는, 혹은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는 용어를 쓰자면, 위격화되었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오리겐의 기본원리였다. 그러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 기본원리를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게 생각하였다. 오리겐은 성부를 세 휘포타시스 가운데서 첫번째로 생각한 데 반해,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2위가 성부에게 나오듯이) 제3위가 성부에게서 직접 방출했다고 말하는 편을 선호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4-185쪽)

이제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는 예수와 성령이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이단들의 주장에 대해서 결정적인 성경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주었고, 또 한편 오리겐의 종속설에 대항하여 제시된 것이었다.
이 용어는 삼위일체가 전개되고 발전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진보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 휘포스타시스는 삼위가 구별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문을 일으켰고, 그래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페리코레시스는 성공적인 삼위일체 이론이 아니었다는 평을 받게 된다. 지방교회는 페리코레시스가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정통삼위일체라고만 주장할 뿐, 다음과 같은 부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6-187쪽)

또 상호내재 혹은 동시존재하므로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는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다음의 글에서 명백하게 밝혀진다. 초대교회의 양태론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음을 아래 글에서 여러분들은 알게 된다..

# 힙폴리투스의 글에 의하면 그들은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하나님을 때로는 아버지로, 다른 때는 아들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투스에 의하여 주장된 우주적 모나드와 같다. 그 모나드가 분할과 불분할, 창조와 피조, 죽음과 불사등을 동시에 가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적으로 하나로 존재한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한분이다. 아들은 독자적 실체를 갖지 않는다. 단지 한 입에서 나오는 음과 소리처럼 <아버지와 한분으로 존재한다>. 처녀의 자궁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 자신이며, 결과적으로 자기의 아들이 되셨다. 그리고 그가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06쪽)

아버지와 이들이 동시존재하며, 하나님 자신이 처녀의 자궁에 들어갔다고 하는 초대교회 양태론지들과 아래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처녀의 태속에 들어가셨고, 하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였다는 견해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여 보라.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의 신비는 다메섹의 요한에 의하면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는 양태는 성자와 성부가 성령 안에 거하시는 양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호 김명용교수)

과연 지방교회가 페리코레스시스(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였으므로 정통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결국 구별되는 삼위(세 인격)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의 삼위란 이름만 구별되는 삼위이며 한 인격, 한 실제, 한 영을 가르키는 것이.....다음 위트니스 리의 글들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288쪽)

즉 장소적으로 항상 동시존재하며 항상 상호내재한다는 개념은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그것은 구별된 삼위의 인격적 교류와 상호작용을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트니스 리는 한 영, 한 인격, 한 하나님, 한 실제를 말하고 있다.

#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하여 준다. 그러면 몇 가지 인격이 우리 안에 있는가? 셋인가, 하나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삼일(三一)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하나님의 경륜, 16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290쪽)

초대교회의 양태론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진짜로 구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명칭만으로 구별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결국 아버지가 아들로, 아들이 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위트니스 리도 동일하다.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 터툴리안은 경륜주의가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오해에 반대했는데,그것은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에서 알게 된 견해였다. 프락세아스는 알려져 있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가르침에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어떠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 이러한 유형의 경륜주의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성부에 대한 계시였으며, 성육신에서 승천에 이른 시기는 성자에 대한 시대였고, 오순절 이후부터의 시기는 성령에 대해 계시하는 시대라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1쪽)

위트니스 리의 양태론은 변형된 양태론이다.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양태론보다 더욱 위험하고 더욱 이단성이 높은 변형적 양태론이며, 그들이 위장하고 감춘다는 점에서 그들은 매우 위험한 이단이다
그가 삼위의 상호내재를 주장한다고 하여,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장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상호내재가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한 바 있었다고 하여 지방교회가 양태론이 아니고 주장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주장이다.

#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신데 세 가지 얼굴을 갖고 세 가지 역할을 한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고대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양태론 이단에 매우 근접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실상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의 매우 어두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유감스럽게도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이 되었는데, 이는 어거스틴(Augustinus)이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면서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기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세 하나님께는 독자적인 개체성을 부여하기보다는 한 분 하나님의 내적 분리를 통해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만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시다고 가르쳤다.(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호 김명용교수)

아래 성경구절을 보면 동시존재가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이 곧 밝혀진다.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상호존재, 동시존재하는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혹은 부어주시는 하나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고, 부음을 받으시는 예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 되어있으며, 붓는 성령도 삼위가 내재 되어있단 말인가?
누가는 삼신론자인가? 아니면 구위삼체론자인가?
위트니스 리의 아래 글을 보시면 그는 상호존재, 동시존재를 주장하므로 그는 구위삼체론자가 된다.

#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14장26절에 의하면 삼일성의 첫 번째가 세 번째를 보내셨다. 그러나 세 번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 분은 두 번째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15장26절에 의하면, 세 번째는 첫 번째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번째에 의해서도 보내심을 받았다. 세 번째가 오셨을 때 그분은 두 번째로 첫 번째와 함께 오셨다. 하나가 보내심을 받을 때에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가 올 때 모두가 오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190쪽)

# 터툴리안은 경륜주의가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오해에 반대했는데,그것은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에서 알게 된 견해였다. 프락세아스는 알려져 있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가르침에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어떠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자이며, 지방교회 역시 양태론자이다.
그들이 자신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지방교회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교리와 사상은 초대교회부터 이단적인 주장으로 있어왔던 양태론과 기독론, 인간론에 근거를 하고 있으며, 그러한 논리가 곧 그들의 신인합일이라는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작성일:2011-01-06 19:54:43 121.140.4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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