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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장로 하나님 뜻 논란, 신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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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등록일
2014-06-17 09:09:59
조회수
6062
문창극 장로 하나님 뜻 논란, 신학적 접근

김영수 장로
고려신학대학, Midwest. Univ. 수학, 고신대 前사무처장


하나님의 뜻 논란은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전제된다.

문창극의 발언 요지와 동기는 신앙심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필자의 일관된 견해는“사상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는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문창극의 발언은 신의 존재와 신의 주권적 사상을 믿는데서 부터 출발한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시점에서 책임 있는 기독교 지도자나 신학교 교수, 목회자의 한마디 언급 “말의 유희”는 혼란을 넘어 엄청난 파문과 개혁주의 신학을 허무는 사태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는 점이 우려된다.

역사적으로 어거스틴, 심지어 칼빈 역시도 플라톤의 사고 영역에 서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칼빈은 인간이 영원을 사모하는 본성에 의해, 하나님을 지각(perception)하고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인간을 종교적 존재라고 보았다. 우리는 모든 인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의식을 발견하며, 인간은 이런 의식을 피할 수 없다.(Ⅰ.3.2)고 한다.

기원전 플라톤(427~347)은 이데아의 세계, 형상이론, 선천적인 지식 등을 논하면서 영혼불멸을 주창하고 인간이 종교적 존재라는 점을 언급했었다.
칼빈은 플라톤적 사고를 가진 반면, 바로 다음세대는 플라톤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조한 사실을 보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전환은 제네바에서 칼빈을 계승한 베자(Theodore Beza, 1519~1605)에게서 분명히 들어난다. 베자의 아리스토텔레스的 사고 구조는 후기 개혁신학의 전반적인 성격(개혁주의 스콜라 신학과 ‘청교도주의’)에 칼빈의 사고 구조(수정된 신플라톤 주의)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칼빈이 세세한 부분 각론에서 플라톤을 따랐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후기 개혁 정통신앙(또는 ‘스콜라 신학’) 역시 철저히 아스리토텔레스 주의 노선에 섰다는 견해도 아니다.

플라톤은 수평보다는 수직을 더 지향했으며, 원인적이기 보다는 직접적이었다. 플라톤은 신(데미우르고스)의 존재에 대한 내재적 논증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본체론적 세계”를 강조하였다. 어거스틴, 안셀무스, 데카르트 역시도 그랬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직보다는 수평을 지향한다. 직접적이기 보다는 원인적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모든 증명은 인간의 과제로 남겨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론적 논증을 강조한다. 신의 존재를 우주론적으로 증명한다. 제1운동자(Prime Mover), 목적인(Final Cause), 필연적 존재(Necessary Being), 최고 존재(Highest Being)라는 사고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연역적인 연구에 관심이 있었다.
우주론적 증명이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자연이 존재하는 이상 그것의 창조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자연계의 인과 관계에 따라 거슬려 올라가서 결국 제일원인으로 신의 존재를 설정한다.

문창극 총리후보가 믿는 신은 본체론적 증명으로서의 신이거나, 우주론적 증명의 자연신이 아니다. 그는 성경의 유일한 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인이다. 따라서 그의 강연 전체를 두고 보면, 어떤 하자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문창극은 강연에서“식민지배,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발언을 강연 말미에 덧붙였는데, 이를 문제 삼고 논란을 일으키게 된 것은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데서 출발한다. 문제는 이를 두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신학적 성향이 노출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발언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

구 분
반 응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박영돈 교수는 발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논리적 비약이라고 반박한다. 극단적으로는 하나님을 악과 불의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발언은 부정적 성경 해석학의 기본에서 한참 멀어 있는 것이다. “일제 침략과 남북 분단”에 대한 하나님의 뜻 운운은 결과적으로 정당성과 필연성을 부여 받게 됨으로 사람들을 격분하게 만든다.
논리적 비약이다. 미국의 패권주의적 역사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방인들이 다수를 접하고 있는 특정 국가에서 그대로 적용한 것은 성경해석의 기본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종윤 목사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는 일제의 식민지배나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의 강연이 일반인에게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고 진단한다. 문창극 장로가 갖고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역사 인식은 기독교 신학적 입장에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았다. 이종윤 목사는 문창득 장로의 발언은 총론적인 면에서는 신앙적, 신학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는 문창극의 발언 자체는 기독교 역사관에 비춰 볼 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함석헌의 견해와 동일하기 때문에 지지한다고 말한다. 함석헌의 문헌을 근거로 제시한다.



박영돈 교수 사상∣

박영돈 교수가 문창극의 발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신학적 사상과 입장이 외부로 표출된 중요한 사안이다. 그는 그리스도 신학대학을 졸업하였고, Trinity University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점에서 고신의 선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신학적 기초에 상당한 문제점이 발견된 사례라고 진단한다. 이는 개인의 사상이 아주 중요하다고 보는 대목이다.

“문창극의 발언은 논리적 비약이다.”라고 한 점
논리적 비약이란, 논리나 사고방식 따위가 순서나 차례 등의 단계를 따르지 않고 뛰어 넘는 것을 의미하는데 문창극의 발언은 역사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방법으로서의 강연이었다.

“하나님을 악과 불의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라고 한 점
그렇다면, 악의 발원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인데 상당히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부정적 성경 해석학의 기본에서 한참 멀어 있는 것이다.” 라고 한 점
“부정적 성경 해석학”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일반적인 성경해석학은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이 전제돼야 하는데, 문법적 해석은 단어의 어원, 구문론, 문맥이 중요하다. 따라서 문창극의 발언 요지를 살펴보면 문법적인 문제에 별로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정당성과 필연성을 부여 받게 됨으로 사람들을 격분하게 만든다.”라고 한 점
문창득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의 정당성, 필연성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민족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고난을 통해 척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미국의 패권주의적 역사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라고 한 점
미국이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라크의 후세인에 대항하고, 아프칸 사태 등에 개입하여 불의한 침략과 독재자를 통제한 일을 두고 한 말 같은데, 박영돈 교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도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미국의 핵우산이 없다면 우리는 항상 불안할 따름이다.

“이방인들이 다수를 접하고 있는 특정 국가에서 그대로 적용한 것은 성경해석의 기본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방인을 비롯한 제국의 나라들도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다는 것은 우주와 만물의 주권적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종윤 목사 사상적 배경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웨스트민스터(M. Div.) 신학교와 영국 세인트 엔더류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 웨스트민스터(M. Div.) 출신 목사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다면 “고신신학”이 도전을 받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이상규 교수 사상 ∣

이 교수의 함석헌 인용 및 언급은 실수였다.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은 새 종교, 하나의 종교, 참 종교가 필요하다다는 사상이다. 함석헌의 무교회주의는 교회무용론 및 至高의 선은 기독교의 신 개념과는 거리가 먼 흔적들이 다분히 있다.
함석헌 사상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만민을 교회당으로 모으는 것, 즉 교회주의가 그리스도의 본의는 아니다.
② 무교회주의는 역사적이다.
③ 무교회주의의는 교권에 반대한다.
④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이다.
⑤ 조직적 교회는 비그리스도 적이다.
⑥ 누구나 성경정해를 할 수 있다.
⑦ 삼위일체론 세례, 성찬 등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의식은 미신이다.
⑧ 신앙은 오직 하나뿐이다.

함석헌의 교회론은 유물론자들보다도 더 비판적이며, 마르크스 엥겔스의 종교 발생론과 유사한 설명을 하고 있다. 함석헌의 사상은“종교는 하나다.”는 사상에 근거한다. (출처 : 두란노 빛과 소금, 한승헌 1990. 8)

역사신학자 이상규 교수는 개혁주의 신학사상이 아주 투철하므로 함석헌 문헌 인용 하나를 가지고 그를 평가하는 것은 이르다고 본다.

문창극이 말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주권이 개인, 가정, 국가에 하나님의 섭리로 나타난다는 점을 인정한 발언이라고 본다. 따라서 비록 이단성이 있는 문제의 인물이나 공자, 석가모니 등도 한두 마디는 쓸 만한 말을 가끔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고 기독교 목사나 신학자가 설교나 논문 등에서 긍정적 인용을 통해서 변론을 펴는 것은 기본의 문제이며, 유심히 들여다보면“가짜”와 동일한 사상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뜻 섭리는 영원 전, 만세전에 우주와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다. 하나님 주권 사상이 바로 섭리를 인정하는 신학사상 이다.

섭리(攝理 providence)의 어원은 창세기 22장 8∼14절, 아브라함이 100세에 약속의 기업으로 얻은 이삭을 모리아산 꼭대기까지 사흘 길을 가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고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어린양을 준비해 두었다는데 근거하고 있다. 이를 '여호와 이레'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이 바로 '섭리'라는 개념이다. 라틴어 역에서 이 문구를 '데우스 프로비데트(Deus providet)'라 하여 섭리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창조사(創造事)와 계약사의 중간 영역에 배려되어 있고, 이점에서 섭리론은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결단이 내재되어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요한복음5:17)고 말씀하셨다. 섭리란,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통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의 뜻을 이루는 하느님의 활동 행위(사역)이다

신앙고백서 상의 섭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v. i.)에 나타난 섭리∣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 하느님은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해, 그리고 무오(無誤)한 예지와 자유롭고 불변한 하느님 자신의 뜻에 따라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의 활동과 사물들을 유지 감독하고, 처분 지배해서 그의 지혜와 권능, 정의와 선 및 은혜의 영화로움을 찬양하게 하신다."고 했다.

계몽기 이후의 근대 신학에서는 '이신론'의 형태를 취했는데, 여기서 자연신학이 섭리신앙의 대용품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주의 신학에서는‘인간 중심의 섭리론’으로 기울어져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20세기부터는 다시 성경의 섭리신앙을 새로운 형태에서 해석,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에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자유의지(free will) 론∣

자유의지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힘, 능력을 말한다. 서양철학은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양립 가능론과 양립 불가론으로 나누어지는데, 양립 불가론은 다시 결정론과 비결정론으로 나뉜다.
자유의지는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으로서 외적인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내적 동기나 이상에 따라 어떤 목적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중점적으로 논하면서, 인간 행위의 책임 한계성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란

칼빈 신학의 특징은 전문 용어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명료하지 않고 모호성이 있다. 그는"하나님께로 부터 오지 아니한 것은 무엇이든 칭찬할 가치가 없다."(Ⅲ.14.2.) 고 단정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듭나지 못한 자들 가운데도 칭찬할 만한 것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모든 덕의 능력과 효과를 성령 하나님께 돌리기 때문이다.(Ⅰ.13.18.) 그러면서도 그는 "거듭나지 않고는 성령께로 서 온 것을 지닐 수 없다" 고 말한다.(Ⅱ.3.1.)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초점을 맞춘 권능의 신학으로 성결과 위엄, 신실과 은혜, 사랑과 자비의 신학이어야 한다고 상기시키면서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위로도 소망도 확신도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모든 질의와 궁금증에 대해 때로는 정확하게 답변해 주지를 못하며,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한다. 그는 성경이 가라하는 곳까지 가며, 멈추라고 하는데서 급정거를 하는 것처럼 즉시 정지한다. 그러므로 조직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 자신의 사견을 중심으로 상황을 전개하지 않는다.

칼빈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신경에 서명하라는 페트루스 카롤리(Peter Caroli)의 요구를 거부했다. 칼빈이 니케아 신조의 문구를 자유롭게 비판했다는 점을 상기 해보면, 국한되고 한정되는 것은 “성경”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칼빈이 어떤 교권이나 권위 앞에서도 이에 순응하지 아니하고 서명을 거부한 데에는 교리, 신학, 신조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세기에 들어서 많은 신학자들이 자신의 소견으로 신학을 고정시키려는 듯한 태도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칼빈 교리에 있어서 섭리(providence)란, 하나님이 세상 또는 우주에서 행하시는 항구적 보편적 행위를 뜻한다. 섭리는 예정교리로 대변된다. 하나님은 창조자이며, 영원한 통치자요, 보존자이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밀한 명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깊이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시고 자신의 은밀한 의지로 결정 하신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Ⅰ.18.1)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하나님이 그렇게 뜻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뜻이 만사의 원인이므로, 나는 그분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원천으로 파악했다. 그 섭리의 권능을 성령님께 다스림을 받는 선택된 자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유기자(deserter, 遺棄者)들도 순종하지 아니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Ⅰ.18.2.)라고 한다.

칼빈은“참으로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과 대치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아니한다.”고 결론 짓는다.((Ⅰ.18.3.) 고 말하면서 “인간의 지혜는 무엇이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유순함(docility, 배우려는 태도)으로, 그리고 적어도 오류를 찾으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칼빈은“우리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분이 먼저 아버지로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그분을‘아버지’로 보는 사람들은 그분의‘전능하심’에 의존하며 위로를 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원칙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 어느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절대적 권능과 작정적 권능의 차이점
절대적 권능(potentia absoluta)과 작정적 권능(potentia oridinate)∣

칼빈은 하나님의‘절대적 권능’개념을 배척하는데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절대적 권능’을‘작정적 권능’에 대한 위협으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대한 위협으로, 따라서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께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따라서 칼빈 신학에 있어서 권능(potentia)은 절대적 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았다.

물은 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가? 하나님께서 인간과 자연을 대상으로 친히 내리신 결정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전화선 전주는 왜 똑바로 서있는가? 하나님께서 그것이 그 자세를 유지하도록 적극적으로 붙드시기 때문이다.(Ⅰ.16.4.) 섭리는 일반적일 뿐만 아니라 특수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눈, 예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손 또는 영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칼빈에 있어서 절대적(absoluta)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능이다. 하나님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하시는 것이 아닌 그리고 성경에서 하신 계시를 떠나서 인간이 가설을 세우는 것은 위험하고 무익하다고 단언한다.
칼빈에 있어서는 이런 개념들에 비추어 하나님은 작정적 권능 - 친히 정하신 권능에 의해서 섭리⋅예정⋅성례⋅성육신 등 모든 신학적 주제를 다루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작정적 권능은 신실하신 목적과 선하신 뜻과 일치하는 권능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숙명론(fatalism)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은 뜻하시는 바를 행하시지만, 그분이 뜻하시는 것은 결코 독단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칼빈은 하나님을 역사의 주재(主宰, preside)로 보았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과 거역하는 자들을 함께 쓰셔서 일하신다고 보았다.(Ⅰ. 16. 4) 또한 그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왕으로 계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칼빈은“ 중략 -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자유의지의 위대한 능력을 받았지만, 죄를 지음으로써 그 능력을 상실했다.(Ⅱ.2.8) 고 보았다. 이제 인간은 필연적으로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다. 인간의 의지는 여전히 작용하지만, 이제는 악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선택된 자와 거듭난 자, 특별히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선행을 할 능력을 부여하기에 충분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칼빈은 징계조차 아버지의 손길이라고 보았다. 징계가 없는 사람, 즉 그런 아버지에게서 단절되어 있는 것이 곧 지옥이다. 실제로 칼빈은 지옥을 단순한 공식으로 정의했다. 주권적 권능에서 아버지의 자비를 빼면 지옥이다.(Ⅲ.25.12)라고 말한다. 바로 작정적 권능이 빠진 절대적 권능은 지옥이라는 개념이다.

결정론과 결정성의 차이

칼빈은 결정론(determinism)을 배척하고 결정성(determinateness)을 수용한다. 그가 말하는 결정(determination)은 모든 사건들의 결정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중략, 빗방울 하나라도 하나님의 확고한 명령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Ⅰ.16.5)고 주장한다.

결정론은 행위들이 행위자 바깥에 있는 상황과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숙명론은 미리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일어나므로 인간의 의지로서는 바꿀 수가 없다는 이론인데, 즉 일정한 인과관계에 따른 법칙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우연이나 선택의 자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어떤 상황과 조건 발생이 행위자 바깥에 의한 것으로 본다는 이교적 사상이다. 인과관계가, 한 현상은 다른 현상의 원인이 되고, 또 다른 현상은 먼저의 현상의 결과가 되는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결정성은 하나님이 결정해 놓으신 것을 의미한다. 결정성은 사건들이 행위자에 의해 발생하든 그렇지 않든, 강제에 의해 발생하든, 자의에 의해 발생하든, 외적 요인들에 의해 조건 지어지든, 내적 요인들에 의해 조건 지어지든, 단일하고 일원적이며, 또는 결정된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결정이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3세기 제논은 자연에 담겨져 있는 원인들은 항구적 관계를 갖고 있고 서로 친밀한 관계 하에 서열 지어있는 원인들 - 로부터 필연을 궁리해 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유의 지배자요 통치자이시다. 하나님은 영원의 저 끝에서 부터 자신의 지혜를 친히 행하실 바를 작정하셨고, 이제는 그 권능으로 친히 작정하신 바를 이루신다.(Ⅰ.16.8) 그러므로‘우연이나 운’은 이교적인 사고에서 나온 용어이다. 따라서 인간사에는‘우연이나 운’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인간이 생각하는 정신의 역량으로 보기에는 “만물이 우연에 의해 되어 진 듯하나”(Ⅰ.16.9) 하나님이 결정해 놓으신 것으로서의 결정성은 “비록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거나, 그 독특한 본질상 필연적이지 않더라도 반드시 발생한다.”(Ⅰ.16.9 후반)는 것이다.

칼빈은 결정론을 부정하나, 결정 또는 결정성에 의해 다른 가능성들이 말살된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을 본다. 이는 그가‘상대적 필연과 절대적 필연’같은 개념들이나 ‘이론상의 결과와 실제상의 결과’같은 개념들을 구분할 때 찾으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런 개념인 듯하다.(Ⅰ.16.9 후반)

섭리와 자유의지의 상충 점

이제 어떤 결말을 내리지 않아도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보이티우스의 주장,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 흄의 생각들, 그리고 칼빈의 신학을 보면서 이미 우리는 스스로 정립된 결론을 도출했다.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능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선하시며 자비하신 하나님의 뜻과 구분하거나 뗄 수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능과 아버지의 의지가 모두 필요하다. 만일 하나님의 의지에서 권능(potentia)을 떼어 낸다면, 전택설(Supralapsarianism, 타락전 선택) 의 경향을 띠게 되고, 권능에서 의지를 떼어 낸다면 후택설(Infralapsarianism, 타락후 선택)의 경향을 띠게 된다. 이 둘을 함께 생각할 때에 비로소 역동적인 -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해하면서, 선택 또는 작정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온전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생각하게 된다.

중세에 있었던 논쟁 중에서“예정은 하나님의 지적행위인가, 아니면 의지의 행위인가?”에서, 만일 지적 행위라고 하면 인간의 책임이 그대로 보존된다고 보았다. 그러면 인간이 일종의 공동 행위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설명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리고 만일 선택이 하나님의 의지의 행위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보장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의 책임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중세의 논란이었다.

둔스 스코두스(Duns Scotus, 1265~1308)는 “하나님이 먼저 은혜를 위해서 그리고 다음에 영광을 위해서 선택했다”는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사상을 배척하면서 그 순서를 뒤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칼빈은 스코투스의 입장에 서서 영광을 위한 예정이 은혜를 위한 예정의 원인이라고 동의한다.((Ⅲ.22.9.)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생하다고 주장한다. 칼빈은“하나님의 의지가 철저히 자유로우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본성에 충실하게 일치하신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서로 마찰되거나 충돌되는 상충 점은 없다. 절절히 조정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범주 안에 속해있다고 봐야 한다.
위대한 개혁자 스승들의 특징은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고 외롭지만 험난한 길을 도도히(陶陶, 매우 화평하고 즐겁게) 걸어갔다. 저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였으며, 감격하고 감명을 받게 되다 보니, 성경이 뜻하는 바의 본질 훼손과 도전에 대해서 왜 죽기로 살기로 막으려고 했겠는가의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감동을 체험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본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불명한 주장들에 대해서는‘아니요’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면서, 논박 이상의 공박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혹자는 우리시대의 훈장, 글방 선생들이 개혁자들과는 대조적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어떤 오류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묵인한다는 것은 동조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한 시대에 있었던 각종 현상들의 오류에 대한 책임은 그 분야를 수학하고 전공한 가르치는 자들에게 일차적으로 무거운 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오시안더(Andreas Oslander 1496-1552)가 “영원한 고로스가 인간이 되시기 위한 형이상학적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을 때, 칼빈은 오시안더에 대해 정신나간, 터무니없는, 술 취한, 어리석은, 잠꼬대 같은 생각이라는 등의 표현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맹공을 퍼부었다는 점을 연상해보면, 지식인의 침묵은“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고 한 규범을 어긴 것이 아닌가 싶다.

맺는 말

문창극의 강연을 계기로 정파들의 주장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 섭리를 부정하는 듯한 기독교계의 반응은,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우리 학자들 까지도 미묘한 입장차가 있음은 너무나 당황스럽고 심히 우려된다는 점이다.
작성일:2014-06-17 09:09:59 61.4.21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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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telos 2014-07-02 10:37:58
김장로님의 인사관련 발언은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목회방 --->목회자료에 고신대 땅 불법거래가 고소논란에서 신학검증으로?(2 번째 글)에 언급하였습니다.
hdj0059 2014-06-17 16:08:29
그리고 댓글을 다시는 분들께 주제넘지만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
코람데오 란 하나님 앞에서 아닙니까?

어떤 의견을 개진하시든 실명을 가지고 표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것이 코람데오 정신 아닙니까?
왜 닉네임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 내 놓지 않고 글들을 쓰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 와도 신사참배를 반대하셨던 선배님들과 선조들이 참 그립습니다. 고신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hdj0059 2014-06-17 15:57:58
장로님~ 한 가지 질의 드립니다.
불의함을 가지고 정의를 이루었다면 그것이 정의입니까? 불의입니까?
힘의 지배로 장악한 것이 바른 권위입니까? 독재입니까?
장로님께서는 이 글을 쓰실 수 있을만큼 부끄럽지 않다고 하실 수 있으십니까?
지식을 표현하신 것에 대해 존중해 드릴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의견이 진정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교수에 대하여 공론화된 자리에서 폄하하는 듯한 주장을 하시는 것 또한 장로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은 아닌 듯 합니다.

최근들어 여러 글들을 읽다가 하도 답답하여 댓글들을 달게 되었습니다.

고신에서 목회 계속 하고 싶은가? 옛 선배님들의 후배들을 향한 으름장이셨지요...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본을 보여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특히, 언론지면 상에서는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