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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표절의 근본 해결을 위하여 ]

닉네임
강종수
등록일
2014-07-11 14:54:44
조회수
4096
설교표절의 근본 해결을 위하여
- 설교를 고민하는 설교 초년생들에게.


설교하는 자들로서는 설교표절에 대한 비판을 들을 때, 구약시대의 선지자처럼 계시를 받지 않는 이상 본문에 대한 설교 혹은 제목설교 등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 일상인데 남의 설교에서 영감적으로 소통되는 것을 자신의 설교에 실었을 때 이것을 비판받아야 할 사항인지를 괜히 궁금해 한다.

하지만 시비되는 설교표절은 설교문 전체를 도용하여 마치 자신의 영감적 설교처럼 이용했을 때 이를 부당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설교시간도 많고 한국식탁의 반찬이 까다롭듯이 설교의 다양한 내용을 원하는 청중들이기에 더더욱 힘든 게 사실이다. 그래서 목회자가 평생 자기 설교도 몇 번씩이나 반복할 수 있다.

설교를 크게 나누면 [본문 설교]과 [제목 설교]로 대별하겠는데,
<본문 설교>는 당연히 주석적 해설이 설교 중에 간간히 필요에 의해 타인들처럼 같은 해설을 할 수도 있고 혹은 꼭 같은 사전적 의미와 신학적 해설을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를 표절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문 설교 중에도 가령, 원죄에(창3:) 대한 설교를 아무리 달리 만들어도 기본 내용에서는 비슷한 설명들을 하게 될 것이고, 탕자의 비유(눅15:)도 비슷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 강조점을 향해 청중의 심령을 이끌어가는 설교의 과정에서 수사적, 언어구사력이나 호소력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내용 증명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제목 설교>는 그 대상과 시기와 환경에 맞도록 하는 교훈과 권면이어서 성경 본문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받쳐주고 있어야 하나 설교자의 성숙도와 영감이 주도적으로 제목설교를 충실하게 할 것이다. 물론 설교의 농도는 본문설교에도 반영될 수 밖에 없지만 제목 설교와는 차이점이 있어서 설교표절은 본문 설교가 위험이 많다 하겠다.

전도사로서는 아직 설교권-강도권이 없어서 어쩌면 설교를 훈련해가는 과정으로 봐줄 수 있으나 강도사 이상은 강도(講道)할 수 있는 인허를 받은 자로서 그 설교시간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담임목사라면 남의 설교를 표절하여 그대로 설교한다고 했을 때, 위법으로 처리되기 전에 목사의 소명에 대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점이다.

아예 파워포인터로 만들어 놓은 설교를 구입하여 일 년치를 준비해놓고 아주 조금씩 수정해서 혹은 수정불가하면 그대로 남의 설교를 한다면 그게 목사의 귀중한 직무, 설교에 대해 책임 있는 행세로 봐 줄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목사자격을 다시 묻고 싶다.


1. 설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가?

설교는 엄격히 말해 잘하는 설교, 좋은 설교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성도들을 영적으로 감동시키는데 그 질적인 영력(靈力)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결코 신학적 사변이 능해서 설교가 좋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왜냐하면 듣고 있는 청중은 차원 높은 철학적 변명을 듣고 회개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되어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굳은 심령이 깨어지기를 설교 시간에 간절하고 있다.

쉽게 표현해도 양심을 끄집어 낼 수 있으면 그게 좋은 설교 아니겠는가?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독하여 풀어 설명하고 죄인으로 하여금 감동되어 변화 받아 영적으로 해방되고 새 소망으로 채우려는 구원의 소리이다. 그 외에 성경을 강해하고 익히는 공부를 시키는 것은 신학시간이지 설교가 아니다. 혹은 웃고 즐기는 일은 만담이지 설교가 아니다. 좋은 이야기는 세상에서도 들을 수 있는 교양이나 세미나이지 설교는 아니다.

그래서 설교는 좋은 깨달음이나 삶을 관조하고 묵상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심령의 큰 파동이 일어나서 성(聖)과 속(俗)이 구분되고 심지어 교회 공동체가 두 쪽으로 나뉠 수도 있다. 설교의 궁극은 분명히 속된 것과 거룩함의 분별이 와야 하고 그래서 삶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하나님 편으로 전향되는 결과를 얻어야 한다. 그것을 은혜라 하는 것이지 듣기에 그냥 좋은 것은 설교의 본래 목적은 아니다.

따라서 설교를 이 시대에 언어 수준이나 문화적 요소에 거저 평범할 정도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문제는 설교 내용에서 우러나는 설교자의 영력이다. 이 영력을 어디서 구축하겠는가?


2. 설교표절을 넘어서려면

여러 문제를 짚어 볼 수 있겠지만 이런 권면을 하고 싶다.

1)성경 자체를 애독하고 스스로 많이 감동받고
2)여기에 경험이 축적되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3)그리고 주석을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5질 이상은 읽으면 좋겠다.

설교는 결국 성경을 잘 풀어 설명하는 일이기에 주석은 설교에 종합적인 교과서이다. 주석에는 설교도 함께 실려 있는 책이 많기 때문에 유익하다.
본문의 내용을 왜 이렇게 설교하였는지 궁금해 하고 나의 영감적 해석을 가미하다보면 나름대로의 설교가 정돈되는 경험을 얻는다. 주석은 여러 사람들의 해석을 동반한 작품이기에 한 주석만 해도 어떤 책은 수백 명의 견해가 포함되기도 한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 설교학도 기본적으로 학습되어야 하나 주석만큼 설교를 설교답게 만들어주는 교과서가 없다고 본다. 주석을 지속적으로 읽으면 설교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주일설교만 아니라 해볼 수 없는 설교라도 평소 설교를 작성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4)새벽기도 후
(1)성경을 연속적으로 읽고(가능한 각권씩 한 번에 다 읽어야 좋다)
(2)읽은 내용에 감동 받은 것을 간략히 메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곧바로 설교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무리 영안이 밝은 상태라 해도 구속사적 성경의 원리와 정통신학적 견해를 넘지는 않았는지 설교 작성을 할 때는 고려하면서 메모를 이용해야 한다.

5)주석서 안의 설교나 남의 설교를 듣거나 볼 때 참고로 영적 감각의 훈련만 하고 순서대로 메모해서 되씹지 말라. 그것이 표절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냥 듣고 영감만 받아야 한다.

6)세상만사 돌아가는 뉴스나 경험에서도 영감을 얻기를 간절해야 한다. 설교를 위해서라면 뭐든 메모를 하고 진리 안에서 해석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여행을 가든 어디에서든 보이고 잡히는 모든 일에 평소 보았던 말씀과 연계하여 설교에 매체로 사용해야 한다.

7)설교자는 인문학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독서량을 늘이기 힘들겠지만 앉으나 서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설교자이기 원한다.

8)담임을 하든 협력자이든 십자가 정신으로 훈련을 잘 받아야 깊이 있는 설교가 나온다. 어쩌면 설교는 또 하나의 나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설교는 유창한 연설이 결코 아니다. 설교 안에는 죽고 살아난 비밀된 눈물이 내재한 생명의 소리, 은밀한 소리, 한이 맺혀 있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

가끔 설교자가 설교 중에 감추지 못하고 감정을 쏟아버리는 경우도 나온다. 자연스럽겠지만 절제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그만큼 설교란 영혼으로 진실함이요 성도들을 사랑하여 설교내용대로 변화 받아 잘되기를 기원하는 자의 가슴으로 부는 언어이어야 한다. 이것이 설교인데 남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어디 설교라 하겠는가?

설교는 대상이 각 다르고 설교자의 심령도 달라서 남의 설교를 내가 맡은 양에게 그대로 주입시킨다는 것은 마치 체질에 맞는 한방약을 모양 비슷한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처럼 자칫하면 영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적합하지 못하여 시험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설교는 내 양에게 내가 여기는 심정만큼 성경의 적절한 내용으로 꼴을 먹이는 열심이어야 한다. 부족하게 보여도 진실한 사랑으로 부모된 마음이면 설교가 유별나지 않으면 어떠랴, 주님께서 5병 2어의 기적이 그런 시간에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설교를 잘하기 위해 고민하려다 표절로 가는 시험을 받으니 설교는 잘하려 하기 전에 설교를 들을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시려하는가를 본문을 통해 잘 설명해 주는 정도로 생각하면 쉬운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쉽다는 말은 설교가 학문적으로 쉽다는 말이 아니라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을 하는데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과 희생으로 하는 것처럼 설교자는 영혼들을 위해 진실함, 간절함, 사랑함이 더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좀 더 충실한 설교를 위해 신학적 저변을 준비하라는 것뿐이지 사실은 설교란 어렵게 여길 학문적 분야는 아니라 본다.


3. 신학생으로 들어설 때,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원하기는 입학시험 요건에 설교를 넣었으면 한다. 설교를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는가? 다만 시험관들은 그 설교의 중심, 싹수를 보자는 것이다. 신입생들의 설교를 잘 기록해뒀다가 개인적인 상담과 교육을 통해 설교를 교정해주는 작업을 해주면 어떨까?

신학을 다 해도 설교를 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설교는 신앙고백 같아서 학문적인 것은 조금 유익하겠지만 처음부터 설교자가 가져야 할 영력을 갖춘 사람들이 입학을 하면 좋겠다는 것이며 더 깊어지게 하기 위해 신학과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여긴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학을 배운다고 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설교를 위한 설교는 가능할지 몰라도 사랑과 증언자의 용기와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조달의 경험이 동반되지 않으면 평생 어떻게 설교를 하겠는가?

심지어 중생하지도 못한 설교자가 멋들어지게 설교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교회에서 말하면 설교이고 세상에 가면 연설이고 다원화 시대에 목사가 절에 가서 말하면 설법이다. 교회에서 설교하는 스님이 있고 절에서 설법하는 목사가 생긴 세상이다. 참 기막힐 노릇이다.

청중을 잘도 웃기면서 긍정적인 사람으로 잘 살아 보세를 외치는 긍정주의 메시지를 듣는 이들은 좋은 설교를 들었다고 한다. 좋은 설교란 무엇인가? 청중이 그 시대에 흥겨워하면 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짜증을 내어도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어야 좋은 설교를 한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건전한 신앙자로 간증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전도를 해봤는지,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를 테스트 해보고 입학을 허락하면 좋겠다. 대안이 없다고 세상 지식에만 의존하여 입학과 졸업을 시키면 영력이 부족해서 결국 설교에 부담을 얻고 표절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지 않겠는가?
작성일:2014-07-11 14:54:44 183.97.18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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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jt0526 2014-07-13 11:50:28
존경하는 강종수 목사님
저는 항간에 표절설교로 문제가 되고있는 교회의 성도입니다.
지면에 여타한 상황들을 다 말씀 드릴수가 없지만
목사님의 말씀에 깊이 깨닫고 동의하면서 한가지 예를
들까 합니다.
언젠가의 주일날 목사님이 강대상에서 환우를 방문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얘기 하고 있었지요.
그때저는 이미 그설교를 인터넷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의속의 유명한 목사님의 감정과 그상황을
본인이 느낀 감정과 상황처럼 얘기하는 해교회의 목사님을
바라보며 너무나 비참하고 뭐라 말할수 없는 괴로움에
한시간내 끔찍해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목사님 참고와 인용을 저희가 모르는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날 ,그자리, 그설교는 거짓말이 었습니다 !!
이것을 말씀하시는게 아닌가 부족한 성도
감히 올립니다.
agiabba 2014-07-12 18:44:35
강종수 목사님의 글을 통해 마치 설교만큼 큰 감동으로 와닿습니다.
저는 설교자라면 성도들과 그들의 삶도 같이 솔직히 나누면서, 주님 앞에서 같이 몸부림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일단 거듭난 성도라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the communion of saints로 인해, 설교자의 진심이 느껴지게 됩니다.

제가 몸담은 학교 학생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은퇴를 하신 교수님에게 너무 미안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 학생을 정말 사랑하고 강의에 열정 그 자체는 엄청나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분이었셨는데,
다만 강의 시간에 지역 사투리를 너무 심하게,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강의를 하시는 바람에 학생들이 그 교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그래서 정말 미안했었다고...

그 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알아들었던 학생이 사투리를 못알아듣는 학생들을 위해 다시 표준어로 대신 강의를 설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는 겁니다.

학생들은 교수의 진심을 안 것입니다. 그렇듯 교인들은 목회자의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