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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을 꿈꾸는 나비의 논평에 대한 공개 질의서에 대한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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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쁨
등록일
2014-08-05 19:27:14
조회수
3639
샬롬 나비에 대한 두둔이 아니라, 공개 질의서에 대한 지적입니다.

문창극 후보의 발언에 대한

샬롬을 꿈꾸는 나비의 논평에 대한 공개 질의서

세월호 참사 100 일이 넘은 지금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희생자들을 생각하면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역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는 샬롬을 꿈꾸는 나비(이하 ‘샬롬나비’)의 역사관의 변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의하는 바이다.

1. 샬롬나비는 문창극의 역사관을 ‘식민사관이 아닌 신앙적 민족사관’이라고 두둔했다. 우리는 민족주권을 찬탈하고,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는 무고한 생명을 감금, 살상하고, 민족의 재산을 몰수하여 우리 민족의 융성과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보를 가져온 일제 식민통치와 침탈의 역사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이름으로 통렬하게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앙적 민족사관이라고 찬양하는 이 어처구니없고 해괴한 역사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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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통치와 침탈의 역사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이름으로 통렬하게 비판하기는 커녕...”
이 말은 요약하자면
'일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판해야 한다! 왜? 내가, 우리가 그로 인해 고난과 억울함을 겪었으니까!'
와 다를 바 없다.

우리에게 벌어진 사건에 대해 이런 식의 "선/악으로 나누자"는는 이분법적인 사고
"나는 억울하고 피해를 봤다"는 식의 피해 의식이 가득한 일제 비판인식에는
일제 식민통치는 절대악이고, 우리 민족의 번영을 절대선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 일제가 일본 성도에게 일제는 절대선인가?
반대로 우리나라가 일본을 근대화 시킨다고 일본의 국가 결정권을 쥔다면 어떤가? 이것은 선인가? 악인가?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 나오는가?

비판 받아야할 악, 칭찬 받아야할 선에 대한 판단기준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고 "사람"에게 두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을 보라.
"민족주권을 찬탈하고,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는 무고한 생명을 감금, 살상하고, 민족의 재산을 몰수하여 우리 민족의 융성과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보를 가져온 일제 식민통치와 침탈의 역사..."
사람의 행복과 인간의 가치 상승이 그 기준이 되어 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역사하셔도 자신들이 정의 내린 것에 반한다면 비판받아야 할 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경륜하시는 세상일에 대해서 절대선/절대악을 인간이 판단한단 말인가? 스스로 절대선 절대악이 판단가능한 하나님인가?
선악과 먹은 티를 내려고 하나님이 베푸신 것에 대해 하나님을 제껴두고 스스로 “이것이 선! 저것이 악!" 두 마음으로 판단하려는가?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절대악이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시고 피조물이 그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게 절대선이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면 '네' 하고 먹지 않고, 먹으라 하면 '네' 하고 먹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파 누워라 하면, '네' 하고 아파 눕는 것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라 하면 '네'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죽으라 하면 '네' 하고 죽는 것이고, 살아나라 하면 '네' 하고 살아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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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는 문창극의 역사관을 식민사관이 아니라 신앙적 민족사관이라고 해석한 샬롬나비의 역사관은 한 마디로 역사인식의 혼절이요, 역사의 변조라고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36년간 민족사의 운명을 송두리째 결박시켜 부자유하고, 억압의 역사로 몰아간 그 역사를 긍정할 수 있으며, 대일본 제국의 번영이라는 미명하에 동아시아 국가와 민족 전체에 전쟁의 광분으로 날 띤 그 역사를 신앙의 이름으로 찬양할 수 있는가? 불의한 역사요, 어두움의 악의 역사요, 인류문명사의 비극의 역사를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적 역사로 변조할 수 있는지 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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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이름으로 찬양"?
누가 일제를 신앙의 이름으로 찬양했는가? 문창극씨가 일제를 찬양하였는가? 아니면 일제란 몽둥이를 드신 하나님을 찬양했는가?
하나님을 찬양하면 그 손에 들린 몽둥이도 같이 찬양 받는것인가?
매 맞고 눈이 떠지면 그 손에 들린 몽둥이는 죽은 나무 쪼가리로 보이게 될 뿐이다.
죽은 나무 쪼가리에게 화를 낼 참인가?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악한 일을 예수님은 왜 보좌에서 서서 그저 보시기만 하셨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인 것을 모르는가?
물론 세상에게는 그것이 드러난 비밀 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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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샬롬나비는 일제식민통치는 우리 민족을 번영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문창극의 발언을 ‘하나님의 절대주권를 믿는 성경적 신앙’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참으로 위험 하고도 왜곡될 소지가 많은 신학적 해석이다. 우리는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악한 권력자나 불의한 제국일지라도 그의 섭리가운데 사용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선을 행사하도록 허락된 것이므로 악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전쟁과 살육으로 훼손되 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의 만행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한 번도 규탄한 적도 없고, 그 부당함을 역설한 적이 없는 문창극의 발언을 어떤 근거로 성경적 신앙이라고 호도하는지 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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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권력은 선을 행사하도록 허락된 것이므로..."

선이라는 개념이 잘못되어 있다. 그 기준이 잘못되어 있다.
'나', '우리', '인간'에 두지 말고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전쟁과 살육으로 훼손되 는 것은..."

가나안 정복은 어찌 해석할 것인가? 42명의 아이를 찢은 곰은 어찌 해석할 것이가?
하나님이 스스로 지은 인간을 어린아이까지 무참히 죽이셨으니 스스로 죄를 지으신 것인가?
하나님의 귀한 형상인 사람을 한낱 동물이 죽였는데 성경을 볼때마다 억울함을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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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샬롬나비는 문창극의 발언을 신자로서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며, 신학적 발언인데, 그것에 대 해 성경과 신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변한다. 우리는 문창 극의 특강은 결코 개인적인 신앙 간증이나 종교적 체험과 같은 성격이 아니라 공중 앞에서 민족사에 대한 기독교인의 인식을 보여준 것인데, 이를 마치 지극히 사적인 신앙고백인 것 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사적인 종교영역안으로 유폐시키면서 신앙적 특수성을 이유로 공론의 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사고를 보편타당하게 입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세계관은 교회의 담장 안에서 혹은 기독교권 역에서나 통용되는 게토화의 위험이 매우 높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개혁 주의 관점에서 사회-문화의 변혁을 꿈꾸며 실천하고자 하는 샬롬나비가 어떻게 온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하나님나라의 구현을 꾀할 수 있을 것인지 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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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관점? 기독교적인 사상으로 사회 문화의 변혁을 이루어 내는 것이 개혁주의의 목적인가?

세상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등에 업고 뭔가를 이룩해 내거나 뭔가를 성취해 내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그 백성을 하늘백성답게 교육하는 교육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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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는 샬롬나비가 공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바른 역사관과 합당한 자격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자질미달로 평가받아 이미 사퇴한 분에 대해, 그리고 장로로서 교회 안에서 행한 그의 발언과 처신으로 인해 한국기독교에 대한 상당 부분 부정적인 여론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창극 후보를 여전히 옹호하는지 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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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다. 부정적 여론? 자질 평가에 연연하는 이유는 뭔가? 인간들에게 아부하고 싶은 건가? 육을 죽이는 사람이 두려운 건가?

하나님 말씀은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백성에게 떨어지면 그들을 생명으로 구원하시고, 죄인된 인간들에게 떨어지면 불로 심판한다.
죄인들의 입에서 안 좋은 소리가 날 것은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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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차제에 샬롬나비가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해 바르고 깨어있는 기독교적 지성을 사용하여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적인 지침과 방향을 제시해 주기를 권면 드리고자 한다.
작성일:2014-08-05 19:27:14 61.4.21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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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조 2014-08-09 07:11:05
천기쁨님 저랑 거의 비슷한 관점을 가디고 계시군요.
이 글 밑에 제가 올린 몸글이 있습니다. 그 글을 보시면 제가 어떤 관점을 취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밑에 댓글은 샬롬나비의 댓글을 갖다 붙인것입니다. 제가 동의해서 올린것이 아니라 그냥 생각해볼겸 올린것입니다. 혼란을 가중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pnugoodman 2014-08-08 00:35:20
김ㅂ 님

저는 문창극씨의 모든 행동과 언사를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마지막 기자회견은 참으로 실망스러웠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욱 비난을 받게되더라도 두려워 말고 더욱 분명하게 자신이 깨달은 하나님에 대해 선포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나 사람이구나 라고 할까요?

이제 문제는 어찌되었건 세상과 우리에게 던져진 "하나님의 뜻(모든 역사의 주관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갑과 을의 논박입니다.
이 논박속에서 갑과 을은 자신들이 가진 신앙관 및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고,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한 논쟁에서 신앙관 및 세계관을 말할 때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원 느혜미야의 공개 질의서는 모든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을 기준으로(특별히 “나", “우리") 선악을 임의로 결론내리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논함에 있어서 절대 기준이 되어서는 안될 여론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님께서 올려주신 댓글중에 "요셉 이야기"는 백번 공감합니다만 “우리의 상황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책임규명?” 해야지요.
그러나 그 “책임규명”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전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아닌 죄인들은 그 책임규명이란 것을 왜 하나요?
사건의 원인을 “그 책임 있다는 자”에게 떠 넘기고 자신은 그 원인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또 그것에서 분리된 자신을 애써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또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음으로 인하여 필히 생길 수 밖에 없는 걱정, 두려움, 공포로 부터 인간 스스로를 지켜 보겠다는 “자기방어”가 그 이유입니다.
인간이 윤리/도덕/율법으로 구축한 시스템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고 그 잘못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수정하고 보완하여 업그레이드 시켜서 다음에는 그러한 일을 모면하려는 것이죠. 마치 노아 홍수 뒤에 홍수를 면해 보려고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으려 했던 것과 같은 겁니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 해결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은 제껴두고 인간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형국입니다. 오히려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왜 이렇게 하셨나?"며 하나님을 원망할 뿐이죠.

여기서 기독교인이 세상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의지하라. 인간의 본 모습은 이렇게 추악한 것이다”라고 선포하는 역할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차라리 돌을 맞더라도 말이죠.
가족을 잃은 자들을 위로하는 것과 구호의 손길은 굳이 기독교인이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당연히 드는 인지상정의 문제이지요.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차라리 철저한 원인규명과 책임규명이 되지 않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는 계기가 되고 죄인된 인간들의 본 모습을 깨닫는 기회가 된다면 그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과연 기독교인이 세월호 참사를 두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관점으로 반응해야 될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사건과 현상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찾는 것은 “성도”라면 반드시 해야할 일인 것이고, 윤리와 도덕으로 책임을 따지는 것은 “사람”이라면 인지상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윤리와 도덕을 따지고 하나님 없이 선악간 분별하려는 일에 “성도”자격으로 개입하여 여전히 세상과 똑같이 하나님을 제껴두고 사건을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사건과 현상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과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묻는 일이 별개 일진데, 이것을 한다고 저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합니다. 자신의 두 가지 신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은 절대 윤리/도덕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라봤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었고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윤리와 도덕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에게만 주신 것(세상은 들어도 그 본뜻을 깨닫지 못하죠)으로 그 택하신 성도를 구원하고 그 백성을 하늘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절대 이세상 살아가는데 윤리 도덕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문창극씨의 역사인식이나 그의 일련의 행동을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세상과 신앙인들간에 부각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문창극씨에게 오히려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유튜브에 올라온 그의 강연 내용 중 "하나님의 뜻”이 일제를 두둔하는 것을 목적으로 쓰였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김봉조 2014-08-06 22:44:51
요셉 이야기

이집트의 총리가 다름 아닌 자기들의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형들은 보복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요셉을 질투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고, 결국 노예로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요셉이 처음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 요셉의 말은 “나는 당신들이 애굽에 팔았던,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하는 것이었다(44:4). 여기서 요셉은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된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다. 요셉은 어안이 벙벙한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염려하지 마세요” 하며 그들을 안심시키며, 형들의 행위에 대한 대안적인, 혹은 “신앙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45:5). 다시 말하면,요셉을 이곳으로 보내신 이는 요셉의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44:8). 그가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이었다(44:7).

아버지 요셉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금 불안이 고개를 든다.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아버지는 죽었고, 이제 요셉의 보복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형들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했다는 아버지의 유지를 거론하며 요셉의 선처를 호소하며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50:17).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50:18). 여기서 요셉은 다시금 자신의 삶에 대한 신앙적 관점을 재확인한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50:19)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행해진 악에 대한 보복은 하나님의 몫이지 요셉 자신의 몫이 아니다. 요셉은 분명 악을 “당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그 악을 보복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얽히는 인간사의 스토리 그 이면을 읽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은 분명 악을 의도했고, 요셉은 그 악의 희생자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이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상황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 요셉의 고난은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런 신앙적 관점이 인간적 삶의 도덕적 차원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의 형들은 분명 악을 의도했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말한다. 악한 일이 갑자기 선한 일로 둔갑했다는 것이 아니다. 악은 여전히 악으로 남지만, 하나님은 그 악한 일을 활용하셔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기로 하셨다.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의 악한 행동을 “선용하셔서” 이스라엘 집안을 건지는 수단으로 활용하신 것이다. 물론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자로서는 당연한 행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악은 여전히 악이다. 악을 악으로 규정한 후, 그것을 용서하는 것과 악 자체를 부정하거나 덮으려 하는 태도는 같을 수 없다.

 

우리의 상황과 하나님의 뜻

우리가 겪는 혼란은 많은 부분 이런 두 용법의 혼란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세월호 침몰 이후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 직접 연루된 당사자들의 저급한 이기심에 충격을 받았다. 개인들은 자신의 목숨만을 따지고,회사의 자기 이익만을 따지고, 해경이나 정부와 같은 다양한 조직들은 조직 유지와 확장의 본능에만 충실하다. 우리는 이런 본능이 수많은 승객들, 그것도 어린 학생들의 희생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적나라함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도덕적 충격이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희생을 야기한 불법적 행태에 분노하며, 그에 대한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느낀다.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부분조명을 끄고, 보다 느슨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한다. 이 큰 틀 속에서 사건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곧 하나님께서 (무고한) 학생들을 희생시키셨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배후에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고”라는 해석이 붙는다. 이런 해석의 의미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순간, 그 사건과 관련된 도덕적 책임을 묻는 일은 중단된다. 대신 우리는 더 이상 그 희생 자체에 집착하지 말고, 이런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기회에 마음을 모으고,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 새로운 기회가 무엇인지 선명치 않다는 것은 애초부터 이런 논리가 새로운 기회를 위해 착안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이런 논리의 실질적 기능은 이런 불행한 사태와 관련된 “불편한 도덕적 물음”으로부터 서둘러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문창극씨의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일제 36년의 고통스런 역사와 남북분단 및 동족상잔의 비극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틀 속에서 해석했다. 한국 현대사의 이런 아픈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현재적 상황이기도 하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는 것처럼, 아직 도덕적 판단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은 사안, 그래서 가해자들은 도덕적 책임을 제대로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그 피해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도덕적 차원을 사뿐히 건너뛰고, 큰 호흡으로 이 불행 배후에 놓인 하나님의 뜻을 논하려 한다. 그리고 이 “뜻”의 사례들로 종래의 미개함과 누추함 대신 서구의 발달된 문명이,한반도의 공산화 대신 분단이라는 다행스런 결과가, 그리고 일본과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경제 성장이라는 축복들이 거론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전체조명 속에 많은 진실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분노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을 통해 더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