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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교육연구원의 성경왜곡, 그리고 4년여의 법정다툼

닉네임
안디바 (진성택)
등록일
2015-01-10 15:18:08
조회수
6646
쉐마교육연구원과의 법정다툼 속에 또 해가 바뀌어 4년차로 접어듭니다.
그동안 형사재판 3심 민사재판 1심등 총 네 차례의 선고가 있었습니다.
원치 않는 소송에 휘말려 홀로 법정대응을 하려니 참으로 지치고 힘들게 하는군요.
쉐마교육이 진리인지, 비 진리인지에 대해 다투는 것이 꼭 세상법정을 통해야만 하는 것인지, 현용수씨에게 묻고 싶고, 그간 법정을 통해 쉐마가 진리라고 밝혀졌는지 묻고 싶습니다.

쉐마교육은 자의적 성경해석과 유대율법주의인 바리새인의 누룩과 권세와 부를 지향하는 헤롯의 누룩과 자의적 성경해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일 66권의 성경구절 중 한절이리도 성경말씀을 왜곡시키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에 대하여 66권 성경의 맨 뒷장에 쓰여 있습니다.
<계22:18-19 누구든지 이 책의 말씀에서 더 하거나 제하여 버리면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현용수씨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아언약인 창18장19절에 대하여 말씀전수를 잘 하라는 “구약의 지상명령”이라며 위 구절을 자식에게 교육시키라는 명령으로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현용수씨는 아브라함이 창18장19절을 좇아 이삭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이삭은 야곱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이렇게 2000년 동안 이어져 유대인들에게 말씀이 전수되었다면서 이구절이 구약의 지상명령 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성경을 해석하듯 현용수씨도 자신의 쉐마교육을 합리화하기 위해 위 구절을 교육학적으로 해석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사의 출발점인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이를 말씀전수라는 미명으로 짓뭉개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허구입니다.그 당시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전수할 말씀이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살펴봅니다.
현용수씨가 말하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잘 가르쳐 말씀전수를 하였다는 말씀이란, 곧 율법전수를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훗날 모세에게 주어졌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을 아브라함이 미리 이삭에게 전수했다는 것입니까? 현용수씨는 아브라함이 이삭 한사람을 놓고 목회를 했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의 도"를 가르치고 "공도"를 가르쳐 목회를 했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장차 모세에게 주어질 "여호와의 도"인 율법을 아브라함이 미리 알고 가르쳤다는 증거가 성경 어느 구절에 있는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현용수씨가 구약의 지상명령이라고 왜곡한 구절을 살펴봅니다.

창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위 구절은 구체적으로 실현될 언약에 대해 상세히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위 구절을 해석하기위해서는 “아브라함에게 말한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이어지는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시고 아브라함이 메시아 언약을 믿자 이를 의로 여기시고(창15:6)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위 구절 중 "공도와 의를 행하게 하려고"에서 "의"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외에 율법을 지켜 의를 얻을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도 아브라함이 의를 얻은 이유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다고 하였고, 또한 예수님 역시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하시며 아브라함이 메시아언약을 믿었음을 증거 합니다.(롬4:2.3.18 요8:56)
이로 보건대 “아브라함에게 말한 일”이란 언약임이 명백합니다.
위 구절 중 “자식”이란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되어야 하며 곧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럿을 가라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갈3:16절로 말씀하심으로 위구절의 자식이란 그리스도인것이 확실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도”와 “공도란 하나님의 공의이며 훗날 모세에게 율법으로 주어졌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은 십계명이며, 십계명을 두 가지로 압축하면 온 율법(마22:40)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십계명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 실천율법으로 613가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성경을 심도 있게 읽어 보신 분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부패한 죄인들인 인간은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돼지가 목욕하고 밀가루를 뒤집어써도 양이 될 수 없음같이 죄인이 율법을 지키고자
애를 쓴다 해도 의인이 될 수 없고 죄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죄인은 모두 사망으로 끌려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메시아를 바라보라는 것이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율법을 주신 목적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죄 속에 갇혀있는 자기백성, 즉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 있는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빌2:6)
그리고 온 율법(마22:40)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십자가로 이루시고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지켜야할 쉐마구절인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6:5)를 우리 대신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피땀 흘리시기까지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힘을 다하셨습니다. 또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을 순종하시려고 이웃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웃인 죄인들을 살리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케 하심으로 자기백성 자기권속을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도와 공의를 행하시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인 온 율법이 이루어지고 율법을 완성 하셨으며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이때 쉐마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죄를 짊어지신 예수를 믿는 우리도 예수와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살아서 율법과 쉐마를 이룬 자가 되어 의인이 되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즉 창18:19절은 공도와 의를 행하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신다는 영원불변의 메시아언약입니다.
따라서 위 구절이 언약이 아닌 “구약의 지상명령”이며 쉐마교육의 효시라고 해석한 것은 쉐마교육체계를 합리화하기 위한 현용수씨의 꿰맞추기식 성경왜곡입니다.
위 구절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말씀은 구속사의 시작점입니다. 위 구절을 교육을 명령하신것으로 비틀어버린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비틀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로 가르쳐야할 직무와 책임을 가진 총신대 장신대 백석대 총장과 부총장(쉐마교육연구원 홈페이지 참조)을 위시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현용수씨의 엉터리 교육체계를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칭찬하고 인증한 것에 대해 계시록22장18-19절의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간곡히 부탁하건대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작성일:2015-01-10 15:18:08 1.229.12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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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clmk 2015-03-12 12:08:51
안디바님께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에 대한 메튜핸리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아브람과 멜기세덱의 면담(창세기 14:17-20)
이 구절은, 아브람이 왕들을 섬멸하고 돌아왔을 때에 소돔 왕이 그에게 보인 존경의 언사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특별한 기사를 기록하기 전에 멜시세덱에 대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 대해 살펴보자.
Ⅰ. 그는 누구인가? 그는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이다. 다른 영광스러운
일들이 그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히 7:1 이하)
1. 랍비들과 대부분의 랍비적 저술가들은, 족장의 모범에 따르면 멜기세덱이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가망 없는 일이다. 왜
그 이름이 바뀌어야 했겠는가? 어떻게 그가 가나안에 정주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2. 많은 기독교 저적자들이 생각하는 바로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 곧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런 이름으로 아브람에게 알려졌으며, 그 후에는 의로운 명분을 간직하고 평화를
주는 왕으로 아브람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떤 평범한 인간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히 7:3)고 일컬어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멜기세덱은 항상 살아 있고 또 제사장으로 있다(히 7:3, 8)고 증거되어 있다.
게다가 바울 사도는, 이런 일은 유다에게서 연유되신 우리주님에게 해당되는 일로 삼고 있다(히
7:13, 14). 이와 마찬가지로 더 위대하며, 그리스도께서 어떤 평범한 인간의 질서를 따르는
제사장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멜기세덱의 경우에서 분명히 언급된 바와 같이 어떤 인간적
제사장직이 아론의 제사장직보다 훨씬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3.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멜기세덱이 가나안 왕이며 살렘을 통치했고, 거기서 참된
신앙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왜 그의 아브람의 이 이야기에만 나타나며, 왜
아브람이 자기보다 위대한 이웃 멜기세덱의 제단이 참예하지 아니하고 따로 제단을 쌓아야 했을까
하는 문제는 전혀 설명될 수 없다. 옥스퍼드 의 그레고리(Gregory)씨는 주로 Arabic Catena지(誌)
의 권위에 의존하여, 멜기세덱은 에벨의 아들 벨렉의 아들 헤라글림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살라디엘이었고, 그녀는 노아의 아들 야벳의 아들 고멜의 딸이었다고 한다.
Ⅱ. 그의 행동
1. 그이 아브람과 그 군사들의 원가를 회복시키고, 그들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하여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아왔다." 왕으로서의 그의 행동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따라 선을 행하고 교제하며
대접을 받을 것을 교훈해 주고 있다. 또한 이 일은 영적인 투쟁에 지쳐 있을 때에, 우리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은혜의 언약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힘과 위로의 영적 양식을
상징해 준다.
2.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람을 축복하였다. 생각건대 이 축복이 그의 떡과
포도주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원기 회복제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를
세우시고, 보내셔서 권능자로서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 따라서 그가 축복하시는 자는 참으로
축복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가셨다(눅 24:51).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살아 계셔서 제자들을 축복하신다.
Ⅲ. 그가 한 말. 그는 두 가지를 언급했다.
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919절).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이
아브람에게 임하기를 축사했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돌린 칭호를 주목해 보라. 그것은 매우
영광스런 것이었다.
(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라 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완전함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가 기도에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보고 또 그렇게 부르는 것은 우리들을 신앙과 경외심과 크게 도움이 됨을 명심하자.
(2) "천지의 주재시요" 라고 했으니, 모든 피조물의 마땅한 주인이시오, 그것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라는 뜻이다. 그가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가 위대한
하나님이시며 크게 찬송을 받아야 함을 뜻한다(시 24:1).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은 행복되도다.
2. 그는 아브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20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라고 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모든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할렐루야를 모든 호산나 찬양과 함께
올려야 한다. 이것이 매일 또 특별한 때에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물이다.
(2)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우리의 모든 승리의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출 17:5; 삼상 7:10, 12;
삿 5:1, 2; 대하 20:21). 그 모든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의 적들보다 높으시다는
것(출 18:11)과 우리들보다 높으시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분 없이는 우리는 아무 일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우리는 타인의 자비에 대해서도 우리의 일처럼 감사함을 드리고 승리자와 더불어 기뻐해야
한다.
(4)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중보자이시니, 그는 우리들의
기도와 찬양을 대신 드릴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이 기도와 찬양을 드리신다(눅
10:21 참조).
Ⅳ. 그가 받은 것. "아브람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고 했다. 이는 곧 노획물
중의 십분의 일이었다(히 7:4).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그것은, 멜기세덱이 베푼 존경의 뜻에 보답하기 위하여 주어진 사례금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비를 받은 자는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명심하자. 감사함이란 자연의 법칙의 하나이다.
2. 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게 명세하여 헌납하는 예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예물을
자기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넘겨 주었던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께로부터 뚜렷한 긍휼을 입었을 때에는 경건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어떤 특별한 행동으로
우리의 감사를 표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 가운데서도 응당 받아야 할 몫을
받으시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어떤 특별한 섭리로 우리들의 재물을 보존해 주셨거나 증가시켜
주셨을 때에 더욱 그러하다.
(2) 불어난 재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영광과 성전 섬기는 일을 위해 구별해 놓은 것은 지극히
합당한 몫이다.
(3) 우리의 위대한 멜기세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는 경의를 표하여야 하며, 우리들 각자는 그
분을 우리의 왕과 제사장으로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의 십일조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바쳐야 함을 유의하자.
bsclmk 2015-03-12 12:00:03
안디바님께 창세기 14장 18절에 대한 호크라 종합주석을 소개합니다. 읽어보세요. 그리고 진성택님은 주석을 참조하지 않고 오직 개역한글성경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창14:18]에 대한 호크마종합주석
󰃨 살렘 왕 멜기세덱 - 학자에 따라서는 '살렘'(*)을 갈릴리 바다 옆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부근의 한 성읍으로 보기도 하나(Jerome), 아마르나 토판, 시76:2(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등을 참고할때 '살렘'은 예루살렘의 고대 명칭임에 분명하다(Josephus, Onkelos, Keil). 그리고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으로서 '의(義)의 왕'이란 뜻인데, 그가 정확히 누구였는지에 대하여서는 견해가 분분하지만 가장 타당한 견해는 문자 그대로 그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진 가나안의 왕으로 보는 견해(Josephus, Calvin, Delitzsch, Keil, Bush)이다.
wlsdyepd 2015-03-08 15:05:54
나라사랑님께서는 현용수원장처럼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왜곡하시는군요.
이런 식의 성경해석은 매우 위험한 해석 방법이며 주로 이단들이 그렇게 합니다.
나라사람님은 창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에 대하여 “멜기세덱이 예루살렘의 왕으로 살면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고 어이를 상실했습니다. 왜냐면 아브라함당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지도 않았고 예루살렘이라는 지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사랑님은 살렘을 예루살렘으로 오해하고 살렘 왕 멜기세덱을 예루살렘지역의 왕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렘왕이라는 뜻은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를 상징하는 것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라는 것은 그분의 전능성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여호와의 도를 배웠다는 것은 나라사랑님의 상상에서 나온 해석에 불과하며 자의적 성경해석은 매우 위험합니다.
죄송하지만 나라사랑님께서는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는 법을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bsclmk 2015-03-06 10:07:07
안디바님의 질문: 현용수씨의 주장대로 창18:19절이 “구약의 지상명령”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이삭을 가르쳤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창18:19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도”를 어떻게 이삭에게 가르쳐서“구약의 지상명령”을 행했는지 근거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답변: 안디바님은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살렘 왕 멜기세덱이라는 분에 대해 읽어보셨나요?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분에 대해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많은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 이삭에게 가르칠 하나님의 도가 없었을까요? 창세기 14장과 히브리서 7장의 긴 문맥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멜리세덱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살면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부터 노아까지 수 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까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을까요? 고고학자들이 계속해서 발굴하고 있는 고대 수메르인의 쐐기문자로 기록된 글들만 보아도 고대인들의 지적수준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0세가 넘은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이삭을 가르칠만한 하나님의 도가 없었을까요?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 셈은 아브라함보다 오래 살았습니다(나이를 직접 계산해 보세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노아도 보았고 노아와 50년 이상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셈이라는 분은 진리를 전파하는 학교 같은 기관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노아와 셈으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았습니다. 950년을 살았던 노아, 600년을 살았던 셈에게 하나님의 도가 없었을까요?
bsclmk 2015-03-06 09:28:09
현용수의 ‘구약의 지상명령과 그의 구속사에서의 위치’ 논문을 읽고 쓴
미국 달라스신학대학원 구약학 석좌교수인 유진 메릴 박사의 서평을 소개하오니 읽어보세요. (유진 메릴 박사(Ph.D., 구약학, Eugene H. Merrill, Ph.D., 미국 달라스신학대학원 구약학 석좌교수, ETS 회장)

구약신학적 입장 :
“근본적인 성경적 및 신학적 개념을 예리하게 정립”


저는 현용수 박사님의 논문을 매우 주의 깊게 읽었고, 저 자신이 그의 견해와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논문의 메시지는 가능한 한 모든 기독교인 부모에게 전달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녀들의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고, 기독교인의 삶과 메시지가 후세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까지 계속 전수하기를 희망한다면 말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현용수 박사님의 ‘구약의 지상명령, 쉐마’란 주제에 관한 여러 저술 속에서 하나의 근본적인 성경적 및 신학적 개념(a fundamental biblical and theological idea)을 예리하게 이끌어냈다는 데 주목합니다. 즉 기독교인 가정에서 토라(모세오경)와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는 부모 책임의 중요성입니다.
현 박사님은 현재까지 성경의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와 그 진리를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하는데 무지했던 것 자체가 가정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한 주된 원인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부모 스스로 이런 일에 무지하거나, 혹은 다른 일에 바빠서 [자녀교육의] 책임을 교회 또는 더 심한 경우에는 학교에 떠맡긴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비통한 직무유기에 대한 이 해답이 잘못된 부모들을 가족과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자신의 자녀를 교육하고 제자화 할 수 있는 바른 부모로 바꿀 수 있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현 박사님의 저술들이 자녀들이 있는 교회와 가정에 널리 보급되고 충분히 수용되어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성경적 교육 모델의 가정에서 양육함을 받은 우리 주 예수님처럼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눅 2:52)가는, 하나의 예수님의 속성을 닮은 조건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The Great Commission in the Old Testament and its Place in the History of Redemption

- The Education Theology Perspective on Gen. 18:19 and the Shema -

Having read Dr. Yong Soo Hyun's paper very carefully, find myself in total agreement with him. This message needs to be communicated to every Christian parent possible if the church hopes to strengthen our children in the faith and pass on the Christian life and message to unborn generations yet to come.

In my opinion, Dr. Yong Soo Hyun, in his various writings on the subject; ‘the OT Great Commission, Shema’, has incisively drawn attention to a fundamental biblical and theological idea, namely, the importance of parental responsibility for teaching children Torah along with the rest of God's Word in the Christian home.

He rightly makes the point that a major cause of ignorance of biblical truth and its application to the Christian life lies with fathers and mothers who either are themselves ignorant of these things or who, in their busyness about other matters, cede this responsibility to the church or, worse still, to the school.

I fully concur with him that the answer to this woeful neglect is the re-engagement of parents in the education and discipleship of their children in the confines of the family and home. I pray that his writings will find wide distribution and good acceptance in the churches and homes of children who, like our Lord Jesus, “[will increase] in wisdom and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with people”(Luke 2:52), a condition without doubt to be attributed to Jesus having been reared in a home that practiced the biblical model of instru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