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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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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
등록일
2016-10-24 16:52:06
조회수
1611
흔히 “영원한 구원을 받지만 상급이 없다”는 의미로 부끄러운 구원을 말한다. 이러한 말이 성경적으로 합당한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상(급)의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자. 일반적으로는 면류관을 상(급)과 연결시킨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바울 사도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고 말씀하였다. 여기에서 상은 그가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다(3:12).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사람의 낮은 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빌 3:21). 이는 죽음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 이후의 영생에 무엇인가가 더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영생 자체이다.
 
면류관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죽음까지 눈앞에 두게 된 상황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다르게 표현하면 “죽을지언정 네 믿음을 지켜라”가 된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봉사, 헌신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순교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은 순교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만약에 순교하지 않고 배교하면 어떻게 될까? 생명의 면류관이 없다. 배교하면 영생이 없다. 배교하면 영생이 주어지지 않고 순교하면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생명의 면류관’을 영생에 더하여지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비교가 맞지 않다. 배교하면 영생이 주어지지 않는데, 순교하면 영생에 더하여 무엇인가가 주어진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면류관은 영생을 뜻한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딤후 4:8상). 그리고 그는 계속 편지를 쓰다가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고 적는다(딤후 4:18). 그렇다면 ‘의의 면류관’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의의 면류관이란 하나님께 최종적으로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의의 면류관이 자신에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라고 한다(8절 하). 바울 사도와 같이 어떤 특정한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들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이다. 만약 영원한 구원에 더하여지는 그 무엇으로서 순종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라면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이 바울 사도와 같은 순종으로 그와 같은 수준의 열매를 맺지는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의의 면류관은 차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바울 사도는 주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자랑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생명을 다하여 주님의 뜻대로 사역한 결과물인 데살로니가 교회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결과에 대하여 예수님의 ‘세 종들의 비유’에서 확인하게 된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른 사명 감당의 결과물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는 이가 누리는 최종적인 상태는 주인의 즐거움에 영원토록 참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면류관이란 표현은 영생, 영원한 구원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표현하는 말이다. 영생에 더하여 덧붙여지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영생의 다양한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다. 믿음의 교회(신자)가 누릴 최종적인 상태는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심이 되면 그분과 같게 되는 것이다(요일 3:2).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상이라는 표현 사용 이유
그렇다면 “왜 상(급)이라는 표현을 쓰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한 목사가 교회에 등록한 새 가족의 집에 등록 심방을 갔다. 방안에 들어가니 그 새 가족의 자녀가 초등학생 때에 받은 미술 대회 상과 그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에 문외한인 목사가 보기에도 초등학생의 그림치고는 범상치가 않았다. 사유를 들어보니 미술을 전공한 어머니가 미술 대회에 함께 참여하여 지도를 한 그림이었다. 그림을 실지로 그린 당사자는 자녀이지만 그 그림은 지도한 어머니의 실력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상을 받은 당사자는 어머니가 아니라 그 자녀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름 받은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성도의 삶, 바울 사도가 고백하고 있는 원리를 따르는 삶은 그 자신만의 수고와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이는 하나님의 실력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아이처럼 현실에서 하나님의 실력이 나타나도록 손과 발을 움직인 이는 바로 그 당사자이다. 하나님의 실력이지만 하나님의 실력이 제대로 나타나도록 삶을 드린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상, 상급이라는 이름으로 영광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자랑을 할 것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를 높이기를 기뻐하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또한 그러한 자리에 이른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의 정도 차이를 가지고 다른 이들보다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 삶 또는 사명 감당에 있어서 자신보다 못한 수준이 자신과 동일한 결과(영생, 상, 상급)를 얻는다고 배 아파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의 삶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것일 뿐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상(급)이란 영원한 구원을 뜻한다. 그렇다면 영원한 구원은 받는데, 상(급)이 없다는 말은 비성경적인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급)이 없다는 말에 해당하는 삶이 바로 영원한 구원이 없는 것이다.
작성일:2016-10-24 16:52:06 14.42.15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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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jj5016 2016-10-26 16:34:33
이상엽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상급론이 이 아래 글에서 PAUL님의 주장과 같이 얘기되고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만 더 열심히 순종하는 삶이 이루어지리라는 관점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통합과 통합으로 인해 당연히 차이가 없음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들어와서 일의 양에 있어선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정해진 삯을 다함께 받는 것과 같이요.
agiabba 2016-10-25 22:14:08
그러한 자리에 이른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의 정도 차이를 가지고 다른 이들보다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 삶 또는 사명 감당에 있어서 자신보다 못한 수준이 자신과 동일한 결과(영생, 상, 상급)를 얻는다고 배 아파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의 삶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것일 뿐이다. --> 이렇게 잘 설명해준 분은 처음입니다. 마음이 다 쉬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