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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돈 교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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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
등록일
2016-12-05 06:13:47
조회수
1327

오늘과 내일 양일간 열리는 2016 미래교회포럼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에서 주강사인 박영돈 교수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박 교수님의 발제는 <칭의논쟁>에서 마이클 S. 호튼의 전통적 개혁주의의 관점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로 적은 글입니다.



 



이 포럼에는 저도 참석합니다만 이 글의 내용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까는 의문이긴 해서 이렇게 적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남겨주시기를 바랍니다.



 



 



개혁주의의 칭의론에 대한 자세하고 분명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문제는 그것이 성경적인가라고 생각합니다. 바른 성경 해석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질문 두 가지를 드립니다.



 



첫째.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법정적 칭의를 말씀하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장 22절입니다. 그렇다면 8장까지 그것을 반복적으로 기술한 것인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4장 3절에서 4절입니다. 정황과 문맥을 바르게 보아야 하는데요.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어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창 15:2). 그 시점에서 자식이 없으면 종들 중에서 상속자를 지명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그의 몸에서 날 자인 자손을 말씀하셨습니다(4절).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6절). 자신의 몸에서 날 자에 대한 조짐이 없었음에도요.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전에 그에게 주어진 계시인 네 자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롭게 그에게 주어진 계시인 네 몸에서 날 자를 수용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가 어떤 일을 하여서 얻게 된 의가 아닙니다. 현재적으로 찾아오시고 그 뜻을 전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얻게 된 의입니다.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생각하는 것은 그의 몸에서 날 자를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경건하지 아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는 이미 이전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여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믿음으로. 히브리서 11장 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이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그 시점에서 믿었다면 법정적 칭의는 그때에 주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상황에서 칭의는 현재적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의하나님의 부르심 이전에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면 그 시점에서 믿음으로 얻은 의도 현재적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얻게 된 것이고요.



 



바울 사도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로마교회는 이방인이었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유대인 교사들이 삶의 원리로 율법을 제시하였고 그것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데,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삶의 원리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새 언약의 백성인데,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삶의 원리로 주셨는가?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예수님께서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완전하게 하시고 그렇게 완전하게 하신 율법을 삶의 원리로 주셨던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이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에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주장을 따랐던 것이고요. 바울 사도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하여서요. 그는 로마교회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이 믿음은 그들에게 현재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을 삶의 원리로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생각하는 것과 로마교회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서 날 자를 말씀하자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과 로마교회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시점에서 하나님을 믿어 의로 여기신 바 된 아브라함이 그 이후에 자신의 몸에서 날 자에 대한 조짐이 없어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생각하며 살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만약 그렇게 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하실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로마교회가 그들에게 현재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율법을 준수하면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실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위 본문은 법정적 칭의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관계적 칭의에 대한 말씀입니다. 법정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한 번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삶에서 계속적으로 열리고 그러한 법정에서 어떤 판결을 받느냐 곧 현재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느냐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를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법정적 칭의를 토대로 관계적 칭의까지 논의를 진행시켰던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이야기되는 이신칭의는 법정적 칭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칭의까지 함께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신칭의는 분명히 로마서의 가르침이 맞지만 그에 대한 개혁주의의 이해는 한 면만을 담은 부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째,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란 그들에게 삶의 원리로 주어진 율법 곧 모세의 율법을 준수함으로 인한 의입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외식을 행함으로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데, 그것은 의가 아니라 불의입니다.



 



그 의보다 더 나은 의란 무엇인가? 개혁주의에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음으로 주어지는 의라고 주장합니다. 전자는 삶과 연결되어 있는데 개혁주의의 주장은 삶과 무관한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조 자체가 맞지 않습니다.



 



문맥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앞 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하며 가르치는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행하며 가르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개혁주의의 주장은 이처럼 문맥을 볼 때에도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된 율법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을 통해 부르심을 받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삶의 원리가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란 완전하게 되기 이전의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인한 것이고 그보다 더 나은 의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을 지킴으로 인한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야고보서 1장 25절과 같은 것입니다. 의미에 있어서요.



 



지금 예수님 앞에 앉아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은 모세의 율법 준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이라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듣게 됩니다. 그것을 지키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습니다. 그 의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무엇인가를 지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단 말이냐고 합니다. 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합니까?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지 지키지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옛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의지하면 지킬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진술이 아닌 것입니다. 가능하기에 옛 언약의 백성이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지만 지킬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갈라디아서 5장 16절의 말씀을 따른다면요.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십니다. 앞에 언급한 혹자의 주장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요.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새 언약의 백성들은 옛 언약의 백성들의 수준에서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곧 더 높은 수준의 삶입니다. 그 삶을 토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요. 만약 율법 준수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이나 농담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요. 율법 준수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저는 전통적 개혁주의의 칭의론은 면죄부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뒷받침과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의가 불변이라고 하는 것이니요. 물론 삶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삶을 강조하지만 이미 주어진 칭의가 삶과는 무관하게 불변이라고 하는 것이 면죄부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파는 것은 아니지만 제공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하지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첨언.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위에 세워진 교리는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교리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강하게 책망하신 장로의 유전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교리에서 이러한 부분을 알게 되는 것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인 것이지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그것을 가르치면서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은혜 말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개혁이고요. 진정한 개혁주의이지요. 개혁주의라는 과거의 산물을 그대로 따르려고만 하는 것은 장로의 유전인 전통을 고수하는 전통주의이지 개혁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개혁주의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작성일:2016-12-05 06:13:47 223.62.67.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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