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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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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
등록일
2016-12-05 06:16:01
조회수
1306



오늘과 내일 양일간 열리는 2016 미래교회포럼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에서 주강사인 김세윤 교수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김 교수님의 발제는 이제까지의 그분의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포럼에는 저도 참석합니다만 이 글의 내용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까는 의문이긴 해서 이렇게 적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남겨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칭의에 대한 설명을 잘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두 가지를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율법에 대한 이해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한 옛 언약의 백성에게 삶의 원리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언약의 시대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강령이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13개의 조문들을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들은 그 언약의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율법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의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장 16, 17절입니다. 이 구절의 구조에 의하면 율법이 은혜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진리는 은혜 위의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율법은 세 기능이 있다고 이야기됩니다. 죄를 죄로 깨닫게 하는 기능,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로서의 기능, 율법의 정신을 말하면서 오늘날의 신자들이 지켜야 할 삶의 원리로의 기능입니다. 세 번째의 경우에는 율법을 신학적으로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구분하고서 도덕법이 해당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 기능은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갈라디아서 3장 24절의 말씀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가가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냥 일반 사람들 또는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문맥에서 ‘우리’와 ‘너희’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너희’는 갈라디아 교회 곧 갈라디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문법적으로 바울 사도와 너희를 함께 지칭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내용적으로 다른 어떤 대상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5, 26절)라고 합니다. 갈리디아 교회가 율법을 하나님께 받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는가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복음을 듣고 그때에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행 16:14하) 안에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던 모든 사람들은 다 이러한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 구절에서 ‘우리’와 ‘너희’는 극명하게 구분됩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와 갈라디아 교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받은 옛 언약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곧 유대인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새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초등교사였습니다. ‘우리’를 유대인 신자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기능입니다. 이는 ‘율법이냐 은혜냐’라는 책에서 엠 알 디한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삶의 원리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신명기 28장에 아주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 앞에 놓은 영원한 구원을 결정하는 방편이었습니다. 율법 준수는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지키게 됩니다. 옛 언약의 백성이 믿음으로 지키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국에 신명기 28장에 제시된 바와 같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무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바울의 새관점 학파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전통적인 칭의론의 문제점을 생각한 것은 정당하지만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적절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하등 없는데도 그런 의식이 작용하여 생겨난 잘못이라고 여겨집니다. 율법은 옛 언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원리이기에 언약적인 것이 맞습니다. 또한 언약이 그 자체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동행하면 생명, 의지하지 않고 동행하지 않으면 심판과 멸망을 담고 있습니다. 옛 언약의 핵심 요소인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기능도 문제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 사도가 율법을 논할 때에 그것은 모세의 율법 전체를 가리킵니다. 613개의 조문으로 이루어진 것 전체입니다. 성경은 오늘날의 신학에서와 같이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구분하여 문맥에 따라 그 중에 어떤 것을 지칭하는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된 율법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를 그리스도의 율법(갈 6:2), 성령의 율법(롬 8:2),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나 성령과 율법을 연결시키는 것을 어색해하는 경향이 있어서 율법이 아니라 법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맥에서 헬라어 노모스는 계속적으로 율법으로 번역되었기에 그것을 이어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과 연결하는 데에도 유익하고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세의 율법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의 율법은 어떻게 됩니까? 그 기능이 아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온전하게 된 율법으로 충분하고 그 안에 모세의 율법의 내용이 다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기 컴퓨터에 해당되는 애니악을 지금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폐해졌습니다. 그것에 비해 온전한 양식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애니악의 원리는 현대의 컴퓨터에서도 동일합니다. 녹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하게 된 율법이 생겨났기에 모세의 율법은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가 없으면 폐해집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는 에베소서 2장 14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시점에서 유효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이후의 시점에서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이 생겨날 때까지만 유효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마 5:18)이라는 표현에서 천지는 일반적인 우주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시점에서의 언약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모세의 율법이 효력을 가지고 있는 언약의 세계입니다. 그 언약의 세계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세계가 없어지면 당연히 그 세계에서 효력을 가지고 있던 율법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고요.



  



율법의 제 3기능은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와 대조되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를 율법의 정신이라고 본 것 말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정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앞에서 완전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완전하게 된 율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 성령의 율법,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가리킵니다. 



  



모세의 율법은 옛 언약이 공적으로 폐하여지기 전까지는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 준수에 열성적이었던 것(행 21:20)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오직 그들에게만 유효하였습니다. 어떤 유대인 교사들이나 바리새파 중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이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15:5)고 한 것은 그 연장선상입니다.



  



물론 유대인이라도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후에는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하였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이지만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어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하였다는 고린도전서 9장 20절, 21절의 진술의 근거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야고보 장로의 요청을 따라 결례 곧 나실일의 결례 의식에 비용을 내고 함께 결례를 행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 결례에는 제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울 사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1장 23절에서 26절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고 준수하여도 되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옛 언약이 공적으로 파기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자유를 충분히 누리면서 이방인의 사도라는 부르심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유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는 애초에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주장은 이에 대한 의식이 없었기 때문인데, 바울 사도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그러한 주장을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극렬하게 반대하였지요. 갈라디아서에서는 다른 복음이라면서 천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언하기까지 할 정도로요. 갈라디아서 1장 8절, 9절입니다.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이야기되는 율법의 제 3용법 곧 교육적 기능이라는 것은 다른 복음에 해당될 수가 있습니다. 율법의 정신이라면서 율법 자체의 기능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어떤 유대인 교사들이 로마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에게 지켜야 할 율법이라고 할 때에 십계명이 포함되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 사도는 그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 이야기되는 율법의 정신이라는 것에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복음과 완전하게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형식에 있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율법은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이면서 그들 앞에 놓은 영원한 구원의 방편이고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는 아무 효력이 없는 것 곧 폐해진 것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째,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의 기능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데, 그 성령께서 신자의 심비에 새긴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가 자신 안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방편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는 진술에 포함된 바입니다. 은혜인 율법을 뛰어넘는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율법의 대강령에 대한 예수님의 예를 따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의 대강령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자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은 옛 계명이고 예수님과 같이 이웃 곧 지체 사랑은 새 계명입니다. 구약에서 이웃은 같은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들이기에 신약의 지체에 해당됩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4장 25절에서 이웃, 우리, 지체를 동일선상에서 기술하는 것도 그와 같은 까닭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수님과 같이 이웃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율법의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에 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로마서 12장 1절의 “그러므로”에 이어지는 내용들입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교회에게 삶의 원리로 주어진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의 원리를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마 5:20).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은 새 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구원의 방편인 것입니다. 율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언약의 세계가 달라졌기에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법정적 칭의입니다.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현재적으로 신자를 찾아오십니다. 그의 안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그 삶을 이끄시는 역사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은혜인데, 그 은혜를 헛되지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으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되는 것 곧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함으로 가능합니다. 곧 의지함인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게 됩니다.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지함인 믿음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전자의 결국은 성령을 위하여 심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고 후자의 결국은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어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7절입니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삶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구원의 방편입니다. 그것을 지킬 때에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현재적으로 교제하는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반면에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의 지배를 받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현재적으로 교제하는 삶도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성일:2016-12-05 06:16:01 223.62.67.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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