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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무지한 스데반황 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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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
등록일
2016-12-18 05:26:13
조회수
1287

성구 옮긴다고 성경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른 해석이 뒷받침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 행위구원론자들이란 믿음이 아닌 인간의 어떤 행동과 구원을 연관시키는 주장을 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의 글 전부는 아래에 옮겨져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9-20).



여기엔 ‘행하며 가르치는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도 행하며 가르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수님이 행위구원론자인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성도의 견인론에서 엉터리 해석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왜곡시키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예수님이 행위구원론자인가?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8-9).



2016 미래교회포럼에 참여한 두 교수가 다 인정한 바로서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이 땅의 신자에게 미래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원한 구원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행위구원론자인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히브리서 기자는 행위구원론자인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과 성경의 기자들은 모두 행위구원론자들이 된다. 그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만약 그 표현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예수님과 성경 기자들을 따르는 것과 예수님과 성경 기자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 어느 것이 신자의 바른 선택이겠는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이방인 신자들인 갈라디아 교회가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것에 대한 바울 사도의 비판이다. 옛 언약의 시대에 율법 곧 613조항의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의롭다 함을 얻는 방편이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 자기 육체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신 그분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 곧 모세의 율법을 폐하셨다(엡 2:14). 예수님은 새 언약의 시대를 여셨던 것이다. 그 시대엔 율법이 아닌 다른 것을 의롭다 함을 얻는 방편으로 주셨다. 율법은 옛 언약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새 언약에서는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 의롭다 함을 얻는 방편으로 주어졌다.



그분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고 그것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주시면서 율법을 폐하셨는데,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다니.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 준수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시계추를 되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방인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삶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율법을 준수하여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함은 불순종이다. 그들에겐 완전하게 된 율법이 삶의 원리로 주어졌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다. 이는 성령의 법(롬 8:2), 그리스도의 법(갈 6:2)이라고 얘기되고 있다. 법은 율법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헬라어 노모스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일관되게 율법으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 그리스도와 율법을 연결시키는 것을 피하는 경향의 결과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 모세의 율법과 대비하여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잘 알려주는 것으로 유용하다. 성경 시대의 이방인 신자들과 오늘날의 신자들은 그것을 지켜야 하고 그것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렇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함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순종이다.



바울 사도가 신자의 모든 행동을 거부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바보이다. 다른 곳에서 어떤 내용으로 편지를 적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 말이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율법 준수를 비판한 것이다. 그것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불순종이기에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순종을 강조하였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갈 5:16). 그것은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율)법이 신자의 삶에서 온전하게 실현되도록 지속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0-31).



칼빈주의나 알미니안주의에서 구원론을 다섯 소주제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상태,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편인 속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관계 단절의 죽음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경에서 얘기되는 구원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성구는 폭넓게 생각하면 그것에 관한 진술이다. 간수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위험에서 건짐을 받는 것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바울 사도는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서 회복되는 것까지 이루어지는 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면 간수들과 간수들의 가족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위의 진술은 구원론의 다섯 소주제 중에서 네 번째에 관한 것이다. 요 6:39-40, 엡 2:8-9, 딛 3:5-6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구는 그것들과는 별개이다. 위에서 언급한 마 5:19-20, 마 7:21, 고전 6:8-9, 히 5:8-9 등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구들이다.



행위구원론자라는 표현 자체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얘기되는 행위는 이방인 신자들의 율법 준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불순종을 뜻하는데, 그것을 신자의 모든 행동에 관한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루터나 칼뱅을 시작으로 하여 그 이후 세대에 그들을 따르는 신학자들이 범한 잘못이다. 그 잘못을 아무 생각 없이 답습하고 있다. 시대가 진전되면 연구를 통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건만. 무지할 뿐만 아니라 게으르기까지 하다.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파악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함에 있어서는 말이다.



알미니안주의에서도 네 번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한 의의 전가를 부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의의 전가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입혀주는 것과 같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연합을 통하여 덕을 덧입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임으로 곧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된다고 말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관계 회복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 시대의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원리가 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한 신자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신자가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삶의 원리를 따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고 삶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순종이다. 이 땅의 신자는 그것을 통하여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한 신자가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곧 믿지 않으면 다르게 말하면 순종하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그런 삶의 결국은 영생과 대조되는 썩어질 것이다(갈 6:8).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스데반 황과 같은 무지한 이들이 목사라며 신자들에게 엉터리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그런 엉터리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신자들이 그 안에 안주하고 있다.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가르침에 푹 빠져 사는 것이다. 참으로 가슴을 치며 통탄할 교회 현실이다.



거기다가 한국적 상황에서는 그런 이들이 많은 경우에 과도한 반공의식에 빠져 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산다. 민주주의를 추구하기에 박근혜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비판하며 바로잡으려는 것을 종북으로 몰아간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라면 도무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을 지지하며 사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자 하는 데도 가로막는다. 그것을 공산화로 연결시키면서. 개독교라는 말이 전혀 잘못되지 않았음을 자신들의 몸으로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발 목사면 목사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 바란다. 이전에스데반 황님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 한 목사와 온라인상에서 답답한 대화를 하다가 적은 글이다.



“성경을 연구하시라고요. 성경 자체를요. 그게 안 되면 목사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목사로 세우셨을 땐 성경을 바르게 밝히고 그것으로 성도들을 세우라고 하셨지, 조상들의 주장을 답습하라고 세우신 게 아니니깐요. 이 문장조차도 수긍이 안 되면 자신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회 접으시고요. 목회를 계속 하시려면 자세를 바꾸세요.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조상들의 주장은 참고로 하되 그 내용을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평가하여 그른 것은 버리고 옳은 걸 취하고요. 다시 적지만 현재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세요. 바른 길을 가는 출발점이니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목사들이 많아지기를.”



 

작성일:2016-12-18 05:26:13 223.62.17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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