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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한계 안에 갇혀 사는 스데반 황 목사를 안쓰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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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
등록일
2016-12-21 12:19:41
조회수
1618

그는 율법이 얘기된 구절들을 언급하며 주장을 펴고 있는데, 바울 사도가 말하려는 바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율법과 초대교회 상황에서 그것이 가지는 의의에 대한 이해가 바닥이어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한 옛 언약의 백성에게 삶의 원리로 주어진 것이다. 그 언약의 시대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편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강령이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613개의 조문들을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이다. 그것들은 그 언약의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율법은 은혜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의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6~17). 이 구절의 구조에 의하면 율법이 은혜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진리는 은혜 위의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으로 압축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편이니 은혜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구약 성경에서 율법이 계속적으로 거룩하다고 얘기되고 있는 것은 같은 원리이다.



율법은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삶의 원리로서 그것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신명기 28장에 아주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복 있는 사람을 노래하는 시편 1편은 율법을 지키는 삶에 대한 대표적 진술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 앞에 놓은 영원한 구원을 결정하는 방편이었다. 율법 준수는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지키게 된다. 옛 언약의 백성이 믿음으로 지키는 것이 율법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국은 신명기 28장에 제시된 바와 같다. 땅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구원과도 무관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은 그 언약의 백성들이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는 방편이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리고 그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서. 그렇지만 율법은 완전하지 않았고 그 율법을 받은 언약의 백성들이 연약하여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지 못했다(롬 8:2~3). 신약 성경에서 아무 수식어가 없이 얘기되는 율법은 모두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613개의 조문으로 된 이 율법을 가리킨다.



모세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되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마 5:17)가 성취된 것이다. 이는 완전하게 된 율법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를 그리스도의 (율)법(갈 6:2), 성령의 (율)법(롬 8:2),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리스도나 성령과 율법을 연결시키는 것을 어색해하는 경향이 있어서 율법이 아니라 법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문맥에서 헬라어 노모스는 계속적으로 율법으로 번역되었기에 그것을 이어가는 것이 적절하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과 연결하는 데에도 유익하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세의 율법이 완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모세의 율법은 어떻게 되는가? 그 기능이 아무 필요가 없게 된다. 온전하게 된 율법으로 충분하고 그 안에 모세의 율법의 내용이 다 녹아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초기 컴퓨터에 해당되는 애니악을 지금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폐해졌다. 그것에 비해 온전한 양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애니악의 원리는 현대의 컴퓨터에서도 동일하다. 녹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하게 된 율법이 생겨났기에 모세의 율법은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으면 폐해진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라는 말씀과 같다.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5:17)은 그 시점에서 유효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이후의 시점에서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이 생겨날 때까지만 유효한 말씀이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마 5:18)이라는 표현에서 천지는 일반적인 우주를 뜻하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의 언약의 세계를 가리킨다. 모세의 율법이 효력을 가지고 있는 언약의 세계이다. 그 언약의 세계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언약의 세계가 없어지면 당연히 그 세계에서 효력을 가지고 있던 율법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는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시겠다고 하신 율법을 가리킨다. 그것을 율법의 정신이라고 말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율법의 정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앞에서 완전하게 하시겠다고 하신 바를 이루신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완전하게 된 율법을 가리킨다. 완전하게 된 율법을 율법의 정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서신서의 율법에 관한 진술들을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 율법이 녹아 있으나 율법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다른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실현하셨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율법을 폐하셨다. 완전하게 된 율법을 자신과 언약 관계를 맺는 백성에게 주셨다. 새 언약 관계에서 새 언약 백성에게는 그것이 삶의 원리이다. 그 백성에게 선물로 주어진 성령께서 완전하게 된 율법을 심비에 새기셨다. 성령께서 그 백성이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이끄신다. 그 역사를 따르면 육체의 일을 이루지 않게 된다(갈 5:16). 성령의 역사의 방편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율법이다. 그것을 지키면 새 언약 백성은 복 있는 자가 된다. 야고보서에서 지키는 자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고 한 것과 같다.



옛 언약이 완전히 폐해지지 않았기에 유대인 신자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자세히 보면 율법 준수를 이방인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 신자들이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 제기가 없다. 야고보 장로는 후에 바울 사도를 만나 자리에서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인데, 다 율법에 열성적이라고 했다(행 21:20). 그 말에 대해 바울 사도는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바울 사도가 야고보 장로의 요청을 따라 결례 곧 나실인의 결례 의식에 비용을 내고 함께 결례를 행하였다(행 21:23). 여기에는 제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이방인 신자들에게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한 얘기들을 생각하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유대인 신자들에게 율법 준수는 아직 유효하였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 신자이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그 시점에서 유대인 신자들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던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교회에 문제가 생긴다. 옛 언약의 백성이었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새 언약의 백성이 된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삶의 원리로 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했고 이방인 신자들이 그 요구를 따랐기 때문이다. 율법은 옛 언약에서 한시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을 율법과는 애초에 아무 상관없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새 언약으로 곧장 들어온 이방인 신자들에게 적용시켰고 이방인 신자들이 그것을 따랐던 것이다.



이것의 문제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구속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인간들이 무지한 가운데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언약의 시계추를 되돌리려고 하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범죄였다. 그런 주장은 천사가 말한다고 하더라도 저주를 받을(갈 1:8, 9) 심각한 범죄인 것이다.



이방인 신자들은 그 범죄에 참여하지 않아야 했다. 현재적으로 그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했다. 하나님은 어떻게 현재적으로 이방인 신자들에게 오시는가? 그들 안에 선물로 주어져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오신다. 이방인 신자들이 육체의 일을 이루지 않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도록 하고자 성령님은 역사하신다. 이는 성령님께서 신자의 심비에 새긴 그리스도의 (율)법, 성령의 (율)법,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그들의 삶에 적용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신약 성경에서 새 언약의 백성의 삶의 원리로 제시된 모든 것이다. 산상수훈, 로마서의 12장 이후 ‘그러므로’로 시작된 진술 등이다.



이방인 신자들이 자신들을 현재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께 현재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한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되는 것(엡 5:18) 곧 성령 충만이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새 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를 지키는 것이다. 순종이다. 여기에서 의지함인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이다. 의지하면 지키고 지키는 것은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행위는 이방인 신자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 곧 불순종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다(갈 3:3). 그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였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는 것(갈 6:2)으로 연결된다.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일을 이루지 않는 삶이다. 순종이다.



개혁신학은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얘기되는 믿음과 행위를 바울 사도의 의도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믿음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과 신자의 어떤 행위도 내포되지 않는 그 무엇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행위는 신자의 모든 행함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신자의 그 어떤 행함으로도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그 행함이 완전히 배제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신자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을 지키는 것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서 배제되어 버린다. 바울 사도가 말하려는 바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다. 전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 준수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고 현재적으로 그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곧 현재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를 따름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율법 준수가 아니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통하여 주어진 삶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제발 상식적인 사고만이라도 하라.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첫 번째로 영적 예배를 언급했다.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다. 오늘날의 신자가 세대를 본받으면서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지 않고 산다고 하자. 그래도 그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겠는가? 그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시겠는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 성령의 (율)법,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신자가 현재적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방편이다. 동시에 그것은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방편이다. 바울 사도가 성령을 위하여 심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고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어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리라(갈 6:8)고 했을 때에 담긴 의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현재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는 최종 심판대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의해 거듭났을 때에 주어진 의롭다 함이 이 땅에서의 삶과 무관하게 최종 심판대에서 불변이라는 개혁신학의 주장은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잘못된 개혁신학을 따라 하나님을 아무렇지도 않게 업신여기는 신자들이 너무 많다. 스데반 황 목사와 같은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구를 옮기고 얘기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구를 옮기면서 그 성구에 담긴 바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서. 박영돈 교수가 고전 6:9~11을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경우에 있어서 칭의를 받지 못한 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불의를 행하는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 1:2)인데 어떻게 칭의를 받지 못한 자일 수 있단 말인가? 바울 사도는 그 문맥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11절)고 했다. 과거형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을 분명히 밝혔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죄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는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거짓 증언이기에 결코 작지 않은 죄다.



바울 사도는 신자들이 서로 짐을 짐으로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라(갈 6:2)고 했다. 이제까지의 글은 그를 포함한 개혁신학을 따르는 신자들을 형제로 생각하는 나의 섬김이다. 그들을 위한 짐을 지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당사자의 몫이다. 그 결과도 당사자의 몫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책임도 당사자의 몫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결코 작지 않을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조상들의 잘못된 가르침인 장로들의 유전을 맹종하는 안쓰러운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자신과 연관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그 생명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대신해줄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리해 줄 수가 없다.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작성일:2016-12-21 12:19:41 223.33.18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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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e456 2018-01-18 13:52:45
안타깝다.. 교리의 시녀라...
ofchrist 2016-12-22 08:55:53
스데반 황
고신교단에 가명 쓰는 목사가 없는데
어느 교단 목사인지?
어떻게 코닷의 연구위원이 되었는지 상당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