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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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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사자이신 메시아 (말리기 3:1-3)

닉네임
스데반 황
등록일
2016-12-28 09:49:17
조회수
1330
언약의 사자(Messenger)이신 메시아

말라기 3:1-3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말라기 선지자의 ‘말라기’라는 이름은 ‘나의 전달자’, 즉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3장 1절에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라고 하는데 이때 “내 사자”는 정확하게 ‘말라기’(내 사자)라는 이름이 됩니다. 그러므로 책 제목이 본문 말라기 3장 1절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또한 말라기 2장 7절을 보면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제사장이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되기보다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였고”, 나아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을 기록하면서 구약의 제사장들의 실패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후 우리가 알다시피 약 400년 이상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역사 가운데 중단되었습니다.

우리는 말라기 3장 본문을 다루기 전에 먼저 말라기 1장과 2장을 통해 하나님의 주장과 타락한 유다 백성의 주장을 들어 보어야 합니다.

먼저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이에 유다 백성이 질문합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구요. 무슨 거짓말을 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세상에서 최고로 번영하여 최고로 잘 살고 최고로 강력하며 최고로 안전한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너희와 언약을 맺은 것이 나의 사랑이 아니겠는냐? 내가 무조건적으로 너희를 택하여 언약을 맺었다. 하지만 에서는 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에서는 나와 관계가 없지만, 너희는 나와 언약 관계에 있지 않느냐. 그 많은 민족 중에서 내가 너희를 택하여 언약을 맺어 나의 백성 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나의 사랑의 증거가 아니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사랑과 축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주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그분과 언약 관계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심이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 가장 큰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너희 아버지다. 나는 너희 주인이다”(6절).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아버지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십니까? 누가 그 관계를 정하셨습니까? 어떻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백성이 되었습니까? 네. 오직 하나님의 택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이에 바울이 증언합니다.
[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도다.
](엡 1:3-5)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를 먼저 택하여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오직 한가지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귀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배 정신의 핵심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언제나 하나님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애인보다, 직장 상사보다, 친구보다, 부모보다, 자녀보다, 남편이나 아내보다, 높은 정치인보다, 돈보다, 명예보다, 그 어떤 일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의 정신입니다.

구약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자들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지금 시대로는 목사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곧 살펴 보겠지만 신약에서 제사장들은 다름아닌 모든 성도들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첫째는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입은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예배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배는 그분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업신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언제 주 여호와 하나님을 업신여겼단 말씀입니까?”라고 따집니다.

이에 말라기 1장 6절 이하를 보면 예배를 업신 여기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고통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아들은 그 아버지를 존경하고, 종은 그 주인을 존경한다. 나는 아버지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언제 존경했느냐? 나는 주인이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언제 존경했느냐? … 너희는 내 제단에 부정한 제물을 가져옴으로 나를 업신여겼다. 너희는 주의 제단을 업신여겨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너희는 눈먼 짐승을 제물로 바쳤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 또 너희는 다리를 절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 그런 것을 너희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너희를 반갑게 맞이하겠느냐? 너희를 좋아하겠느냐?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 …너희 가운데 누가 성전 문을 닫아서 내 제단 위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받지 않겠다.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내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향과 깨끗한 제물을 내게 바칠 것이다. 내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쉬운 성경, 말 1:6-11).
즉,
“너희가 계속적으로 나를 업신 여기니 이제 나는 내게서 마음이 떠난 너희를 붙잡기보다는 다른 모든 민족들에게서 내가 소중히 여김을 받도록 하겠다.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나를 소중히 여겨 온 마음과 정성이 담긴 예배를 드리게 하겠다. 그렇게 하여 내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유다 민족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언약을 맺으신 주 여호와 하나님의 고통이 느껴집니까? 얼마나 유다 민족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면 이러한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업신여긴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첫째는 1장 12절 이하를 보니, ‘여호와의 식탁’을 더럽혔다고 말씀합니다. 신약으로 치면 ‘성만찬’에 해당합니다.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식사를 하는 시간을 우습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주께 없으면서 형식적으로 떡을 떼는 것입니다. 또는 그 시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 혼자 식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시간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식탁을 나누는 ‘여호와의 식탁’을 업신 여기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바울이 성만찬을 업신 여기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경고하였습니다.
[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1:20-22, 27-32)

여기서 ‘여호와의 식탁’을 더럽히는 것은 예배 행위와 직결됩니다.

레위기 8장을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주의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을 업신 여기고 자기들 멋대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 기록이 레위기 10장에 실려 있습니다.
[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4 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5 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
6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7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
](레 10:1-7)

하나님께서 정하시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를 부패시킴으로 하나님을 업신 여긴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셨는지 모세로 하여금 그 죽은 자들에게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그 시체들마저 돌보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무엘상으로 가보면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론의 계통인 엘리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아론에게 나답과 아비후가 있었던 것처럼 엘리 대제사장에게도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 역시 하나님을 업신 여기더니 예배를 더럽혔습니다.
[
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삼상 2:12-17)

이들은 이 정도가 아니라 예배가 드려지는 회막문에서 성추행을 저질렀습니다.
[
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삼상 2:22-25)

왜 홉니와 비느하스가 예배 장소에서 이러한 무서운 일들을 저지를 수 있었습니까? 이는 그들 마음에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배에 관련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즉, 예배에 대한 경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증거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도 예배를 멸시하는 자들을 경멸하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말라기 선지자가 말하는 유다 백성의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악독한 현상이 왜 나타났는지에 대해 그 주범을 하나님께서 지적합니다. 바로 레위인입니다. 즉,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2장은 제사장들의 부패와 타락이 유다 민족의 부패와 타락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업신 여기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고 배웠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부패하였기에 교회와 교인들이 부패하였다는 결론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사장의 자세가 무엇입니까?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 하나님을 존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히 여기도록 기도하며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역할을 집어 던지고 딴 짓을 하는 제사장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제사장들을 향해 하나님의 분노와 실망이 얼마나 큰지 그들을 똥처럼 여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똥)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말 2:3).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레위 언약에 따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레위 언약에 따르면 제사장이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인도하고 가르치면 생명과 평강이 제사장과 온 백성에게 나타날 것이지만, 하나님을 업신여기도록 하면 제사장과 백성들을 똥처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으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5-6).

레위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대제사장 아론의 부모입니다. 모세 또한 레위 지파로서 구약의 중보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로 구성된 족속이었으며 왕 제도가 있기 전까지 사무엘처럼 사사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2장 7절 이하를 보면 그들의 역할이 분명합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7절).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전달자, 또는 대사의 역할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주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한 경외하도록 만드는 일을 하는 자들이 제사장, 즉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 유다 백성 전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주 여호와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 그 시대의 제사장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리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말 2:8-9).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두번째 증거는 백성들이 결혼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는 제사장들이 레위의 언약을 깨뜨릴 때 그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는지 알려줍니다. 그 사회는 배약하는 사회가 됩니다. 배약하는 사회의 특징은 결혼 언약을 버리는 것이 그 특징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이혼입니다. 이혼이라는 사회 현상이 확장되는 것은 제사장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경외하도록 하는 그 일에 실패함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지독한 이기심인데 그 이기심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뿐더러 이 세상에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약속을 깨뜨리는 사회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 2:16).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인간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결혼 언약을 무너뜨리는 것을 볼 때, 그 현상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증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부패한 자리까지 내려가 날마다 배약을 하며 살면서도 그들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부패하고 또한 멸망이 코 앞에 다가왔는데도 멸망하는 현상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영적 문둥병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도대체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라고 하는도다”(말 2:17).

“우리는 제대로 하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괄시하십니까? 왜 우리가 하는 일들이 최고로 형통하도록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마음에 고통을 당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세번째 증거는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대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친 예물이었습니다. 그때 그 예물은 그분이 나의 왕이며 내게 복을 베푸는 주인이라는 고백의 표현이었습니다.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 가운데 있다는 믿음이 십일조를 드림으로 나타납니다. 십일조는 증권투자가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과 흥정하며 투자 심리로 십일조를 드린다면 이는 오히려 말라기서에서 지적하는 더러운 제물이 될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복의 근원이시며 모든 생사화복의 주권자로 인정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런 개념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복을 베푸는 분으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구약을 통틀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살아계신 주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와 헌물과 언약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이에 예배 시간도 중요하고 예배를 온 맘 다해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귀하게 여긴다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될 것입니다. 예배하는 삶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지키며, 나아가 이웃과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은 정직과 신뢰와 성실과 믿음의 삶입니다. 언약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믿음을 서로 주고 받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은 자녀는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사장들의 부패로 인하여 예배와 언약을 도외시하는 타락한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벌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400년 동안의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2장 10절 이하를 보기 바랍니다.
[
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11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말 2:10-14)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잃은 타락한 백성들은 결국 이방 여인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는 귀신 우상들과 짝한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이유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면서 그들이 섬기던 밀곰과 여신 아스다롯과 그모스, 몰렉 신등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타락과 교회의 타락은 반드시 종교다원화로 이어집니다. 이방 우상 신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은 결국 살아계신 주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범죄를 행하는 배도인 것입니다. 배도가 흥왕할 때 주의 복음의 역사는 차단되고 하나님은 아무도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 현상은 주의 백성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믿음을 잃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의 자녀들이 점점 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며 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도 신앙을 잃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마지막 계시인 말라기 선지자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라기 3장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1절을 보니 만군의 여호와가 주어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자는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합니다. 즉, 내 사자는 나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 되신 만군의 여호와가 갑자기 주의 성전에 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사모하던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말라기는 그 모든 절망 속에서 여호와의 언약의 사자가 반드시 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홀연히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기 전에 ‘내 사자’ 즉, 말라기가 올 것입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가 다시 자기 백성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라기 3장에서 알게 되는 것은 언약의 사자는 만군의 여호와이고 말라기, 즉 ‘내 사자’가 만군의 여호와가 성전에 임하는 것을 예비할 것이는 사실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임하는 날은 아무도 그분을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도 만군의 여호와 앞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의 사자가 나타난 이후에는 레위 자손이 연단을 통해 깨끗해질 것입니다. 그후 그들이 드리는 제물은 공의로운 제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된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 본문의 내용입니다. 놀랍게도 언약의 사자가 오는 사건은 말라기에 나오는 유다 백성의 모든 문제와 질문에 대해 해답이 되고 있습니다. 즉, 부패한 제사장 문제도, 사회 문제도, 타락 문제도, 멸망 문제도 다 해결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대제사장 사가랴에게 그가 낳을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7).

이사야 선지자도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 내 사자, 즉 말라기가 누구인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은 말라기의 예언의 완성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10-15)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만군의 여호와인 사실을 증언한 셈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여호와의 언약의 사자임을 증거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언약, 새언약의 사자가 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가브리엘의 예언대로 주의 백성의 마음이 회개 가운데 아버지에게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마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결과와 같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 예수님에 대해 외쳤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 1:29-30).

만군의 여호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왜 어린양으로 오셨습니까? 레위인의 교만과 건방진 죄악을 용서하시고 고쳐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은 자기의 피로 레위인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로 레위인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실패함으로 인한 레위 언약의 저주를 친히 십자가에서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심으로 레위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새 언약을 통해 생명과 평강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공식적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성령 강림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는 자들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증언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5, 9).

바울도 마찬가지로 선언합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사도 요한 역시 성경을 마무리하며 증언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사신 자들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5-6).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소중이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완전하신 언약의 사자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들, 즉 그리스도의 사신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말라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새언약의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주 여호와의 언약의 사자였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제사장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자가 되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전부 제사장입니다. 다시 한번 레위인의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그 언약은 복음입니다. 이제 한번 더 복음을 잃고 부패한다면 그 심판은 영원할 것입니다. 말라기에는 그 심판을 견딜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계시이지만, 참된 말라기, 즉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를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영원한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오신 분으로써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증거하는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새언약의 레위 지파 되시는 여러분!
이제 우리 주 만군의 여호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이 이루신 십자가의 구속을 의지하며 더욱 하나님을 존중하게 여기며 남은 삶을 달려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작성일:2016-12-28 09:49:17 211.235.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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