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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제목

야곱의 결단(창세기 43:1-15)

닉네임
설맥
등록일
2017-02-13 10:32:55
조회수
1370
야곱의 결단
창세기 43:1-15

하나님이 하십니다.
배 한 척이 파선하여 구조선이 달려와서 밧줄을 던져주며 그 줄을 붙잡고 옮겨 타라고 했더니 모두 짐을 버리고 옮겨타서 살았는데 한 사람만이 빠져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몸에 금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이 금조끼를 벗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 타다가 몸이 무거워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떨어져도 다시 구출할 수가 있었으나 이 사람은 가라앉아서 구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기할 때는 포기해야 사는 길이 열리고 다시 성공의 기회가 오는 법입니다. 체념할 줄 모르고 집착이 강한 사람은 영원히 패배하고 맙니다. 버리는데 용감한 사람은 누구보다 담대하여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 과거에 대한 집착, 실패에 대한 집착을 빨리 털어버릴 때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단이 필요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바로의 꿈대로 7년 풍년이 있은 다음에 7년 흉년이 시작이 된지 2년이 지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야곱 가족에게도 흉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흉년 2년 째에 베냐민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왔습니다.
형제들은 총리가 된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설마 자신들이 노예로 팔아버린 요셉이 죽지 않고 살아 서 애굽에서 총리를 하고 있다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다릅니다. 요셉은 한 눈에 형제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오래전에 자신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형제가 아니라 원수였습니다. 구덩이에서 살려달라고 했지만 유다 형의 제안으로 은 20을 받고 이스마엘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2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요셉은 형제들의 마음과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곡물을 사러온 형제들을 “너희는 정탐꾼들이다 이 나라를 엿보려고 왔다.”라고 하면서 정탐 누명을 씌였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열 두 형제들인데 가나안 땅에 한 사람이 아들들입니다.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요셉이 묻지 않은 베냐민과 오래전에 자신들이 팔아버린 요셉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요셉은 당장이라도 “나는 당신들이 오래전에 팔아버린 요셉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진정성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너희가 정탐을 하러 오지 않았다면 너희의 진실함을 증명해야 한다. 너희 중 하나를 가나안에 보내게 해서 너희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게 하고 나머지 너희들은 감옥에 갇혀 있으라. 내가 너희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함이 있는지 알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정탐꾼이 틀림없다.” 이 말을 하고 형제 모두를 3일 동안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요셉은 형제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듯한 말을 합니다. “너희 형제 중에 한 사람만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동생을 내게로 데리고 오라.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않고 살리라.”
이 말에 형제들은 요셉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서로 말합니다. “우리가 요셉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요셉이 우리에게 형님들 살려달라고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음으로 이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했도다.” 이에 르우벤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요셉에 대해서 지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그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잠시 나가 울고 들어왔습니다. 요셉이 운 것은 오래 전에 형들에게 당한 배신과 아픔, 상처가 떠 올랐을 것이고, 아직까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서로 핑계하는 모습을 볼 때에 안타깝고, 서글펐서 울었던 같습니다.
요셉은 형제 중에 시므온을 끌어 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했습니다. 양식을 주면서 그들 몰래 각 사람의 돈을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길에 가면서 먹을 양식을 따로 준비하여 가나안으로 보냈습니다. 형제들은 집으로 가던 중에 자루 속에 돈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고, 서로 떨면서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의도는 다음에 식량을 구하러 올 때에 동생 베냐민을 반드시 데리고 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들은 야곱은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하고 있구나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고, 베냐민도 또 빼앗아 가려 하는구나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다. 한탄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해지고,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야곱은 할 수 없이 형제들에게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유다는 야곱에게 요셉의 경고를 다시 말하면서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끝까지 베냐민을 지키고 싶었지만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머뭇거리고 있는 야곱을 향해 유다는 “베냐민을 보내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 내가 베냐민을 위하여 담보가 되겠습니다. 내가 베냐민을 지키지 못하면 내 목숨을 죽이십시오. 내가 베냐민을 아버지 앞에 데려오지 못한다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은 갔다 왔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유다의 이 말에 결단을 했습니다.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내려서 애굽 총리에게 예물을 드려라.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다. 돈은 갑절로 가지고 가라. 전에 자루에 담아 있던 돈도 그대로 가지고 가라. 무슨 일이 생길는지 두렵도다. 마지막으로 베냐민도 데리고 떠나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애굽 총리 앞에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한다. 애굽 총리가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주기를 원한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을 것이다.”
드디어 야곱이 결단했습니다. 결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잃게 되면 잃을 것이다”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결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외적으로는 먹을 식량이 바닥이 나서 다 죽게 되었다는 것이고, 내적으로는 유다의 말 때문입니다. 유다의 말대로 그 동안 두 번이나 식량을 가야 했었는데 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야곱이 베냐민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요셉을 잃어버리고, 베냐민까지 애굽에 보내서 못 돌아온다면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결정적인 유다의 자기 헌신적인 고백은 야곱의 마음을 위로하고, 베냐민을 보낼 수 있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오래전 요셉을 지키지 못했던 형제들, 아버지로서 믿을 수 없던 형제들이었는데, 유다의 간구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끝까지 베냐민을 지키겠다는 자기 헌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태도에 야곱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야곱도 유다처럼 자기 헌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태도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을 것이라”는 결단을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야곱의 결단이지만 실제로는 야곱이 이렇게 결단을 하게 한 유다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베냐민 생명의 담보, 보증인 역할을 자청하는 것입니까? 유다는 4번째 아들입니다. 큰 형인 르우벤, 둘째 형 시므온은 지금 애굽에 억류되어 있고, 셋째 형인 레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이렇게 나선 것은 무엇입니까? 오래전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형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르우벤이 잠시 볼일 보러 나갔을 때에 유다의 제안으로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지금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지만, 그때 어린 동생에게 한 자신의 어리석고 무자비하고, 무책임한 과오를 반성하면서, 지금이라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동생 베냐민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과오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뉘우침도 없습니다. 반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책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일을 반성하고 새로워지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변한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이렇게 변한 요셉은 나중에 요셉을 감동시키고,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며 화해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왜 유다가 이렇게 변했을까요? 창세기 38장을 보면 유다와 다말에 대해서 나옵니다. 37장에서 50장까지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요셉과 관련이 전혀 없는 끼어든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어떤 분들은 38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자손으로 오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다가 요셉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변화된 유다는 야곱의 결단을 이끌어 내고, 요셉의 용서를 이끌어 내는 중재자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38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둘람은 예루살렘어서 남쪽인 유대 평야에 있던 곳입니다. 아둘람 굴은 다윗이 블레셋 왕 아기스로부터 나와서 숨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왜 유다는 아둘람에서 살게 된 것입니까? 그것도 형제들을 떠나, 형제들을 떠났다는 것은 아버지 야곱을 떠나 독립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야곱 공동체를 떠나 혼자 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후’라고 했습니다. ‘그 후’란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린 후를 말합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살릴 수 있었던 요셉을 노예로 팔아 생이별시킨 사람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물론 다른 형제들과 공모했지만 주동자는 유다였습니다. 그래도 유다에게 양심이 있었는지, 이런 이유 때문에 아버지 야곱의 얼굴을 보면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나 외로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유다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 오난, 셀라였습니다. 장성한 첫째 아들 오난은 다말이라는 처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풍습대로 기업무를 자인 동생 오난이 형수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오난은 자신의 씨가 형의 씨가 된다는 생각으로 형수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씨를 주지 않으려는 태도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악한 일임으로 하나님께서 오난도 죽였습니다.
두 아들의 죽음은 씨에 관련된 일입니다.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어쩌면 유다는 동생 요셉과 팔아버린 일로 자신에게 화가 미친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두 아들의 악함은 씨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응하시는 분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셋째 아들 엘을 어리다는 핑계로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생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엘이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계속해서 다말과 엘을 결혼시키지 않았습니다. 다말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던 중, 유다의 아내인 수아가 죽었습니다. 아내가 죽은 유다는 친구와 함께 다말이 살고 있는 딤나 부근으로 양털을 깍으러 갔습니다. 이때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를 유혹했고 동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나중에 염소 새끼를 받는다는 증표로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다말은 임신했습니다.
유다가 친구를 보내 다말을 찾았지만 그 동네에는 창녀가 없다며 돌아왔습니다. 석 달이 지났습니다. 유다에게 들린 소문은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리였습니다. 유다는 분노하며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했습니다.
다말은 자신을 임신시킨 자의 증표를 내밀었습니다. 누구의 것입니까? 유다는 자신의 것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라” 유다가 옳다고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말의 행위입니다. 시아버지와의 부적절한 관계인데, 누가 보아도 옳지 않은데, 옳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유다는 이때 크게 깨닫고 그의 인생의 전환기를 삼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망가져도 생명, 한 가정의 생명을 이어주는 일에 대해서 자신이 망가져도, 깨어져도, 무시를 당해도 어떻게 하던지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던 다말의 자기 헌신과 자기 희생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영광스럽게도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은 한 가정의 생명의 씨를 이어주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룻의 헌신입니다. 모압 여인 룻도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유다 베들레헴으로 이민해 와서 보아스와 결혼해서 기업을 물렀던 사랑입니다. 룻도 예수님의 족보에 “보아스는 룻에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형제 공동체를 파괴하고, 형제 공동체를 떠났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변화되어 이제 형제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말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가서 정탐 누명을 쓰고, 시므온이 억류될 때에도 유다가 형제 공동체에서 리더쉽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물로 제공하면서 공동체를 살리고 공동체를 사랑하는 헌신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은잔 시험으로 형제들의 의중을 떠 보일 때에 유다는 요셉 앞에서 베냐민을 데려가지 못할 경우 아버지 야곱을 슬퍼하게 하며 스올에 내려가게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고통을 대변하면서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렇지 않으면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라고 말할 때에 요셉이 마음의 감동을 받아 형제들에게 “형님들, 내가 요셉입니다. 베냐민아 내가 너의 형이다” 하면서 형제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게 됩니다.
유다나 야곱의 결단은 결국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고자 할 때 다 함께 사는 길이 열린다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8:35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결단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 보다 가정, 나 보다 교회, 나 보다 이 사회와 국가, 이웃을 위해 자기 헌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
작성일:2017-02-13 10:32:55 116.255.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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