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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제목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맏아들 (누가복음 15:25-32)

닉네임
스데반 황
등록일
2017-03-05 17:35:50
조회수
797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맏아들

누가복음 15:25-32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친히 하나님의 잃은 양을 찾으러 이 땅에 오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어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수군거린 반면,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에서 죄 가운데 먼 나라에 거하다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나타내는 반면, 맏아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둘째 아들은 이방 나라 사람들로 비유될 수 있고 맏아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대표하는 유대 민족과 이스라엘 나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민족은 이방 나라 사람들을 지옥의 땔감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잃은 자를 찾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을 이루시자 곧바로 성령을 보내셔서 모든 열방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모든 백성과 나라들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원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나라, 즉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이 대표하는 유대 민족이 회개하는 가운데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심령은 교만과 이기심과 헛된 지식으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계속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이어서 맏아들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그 때 큰아들은 밭에 있었다. 그가 돌아와 집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음악 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 종은 ‘아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무사히 건강하게 아우님이 돌아왔기 때문에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 큰아들을 달랬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는 수 년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저를 위해서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냐?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쉬운 성경)

맏아들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먼 나라에 가서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서 회개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맏아들은 밭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집에 가까이 오니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송아지 요리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자, 여기서 정상적인 맏아들이라면 ‘와! 왠 잔치냐’하며 신이 나서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만에 보는 동생을 껴안고 반가워하며 잘 돌아왔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미리 그런 일을 대비라도 한 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종을 한 사람 밖으로 불러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초지종을 물어봅니다.

아마도 맏아들은 ‘혹시’하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불안감은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었습니다. 그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는 것과 같은 심보였습니다.

큰 아들에게 불려 나간 종은 맏아들이 함께 즐거워할 줄 알고 작은 아들과 관련한 모든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해 줍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이에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이에 28절에 보니, 맏아들이 이 말을 듣고 노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못난 동생 놈 때문에 잔치까지 베풀어준 아버지와 그 집을 향해 분노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가! 저런 놈을 위해 잔치를 베푸시다니. 동생 놈도 그렇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허랑방탕한 후에 기어 들어온 것이야!”

예수님은 지금 이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향해 가졌던 감정을 맏아들의 감정으로 드러내십니다.

구약을 보면, 요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던 니느웨 도시에 가서 심판을 경고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탄 배가 큰 파도를 만나게 되고 결국 선원들이 요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풍랑을 보내신 것을 알게 된 후 그를 바다 속에 던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준비시켜 요나를 살려 주십니다. 결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후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40일 내에 니느웨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요나가 대단히 화를 냅니다.
[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욘 4:1-4)

요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기보다 죽기를 더 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때의 요나의 마음은 아마도 맏아들의 심보와 같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큰 아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화가 난 채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큰 아들 때문에 나오십니다. 방금 작은 아들 때문에 거리간 먼 곳까지 뛰어 나가셨던 분인데, 이제는 분노하고 있는 큰 아들 때문에 또 문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큰 아들을 책망하며 꾸짖지 않으시고 그 대신 권하십니다.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파라칼레오)인데 “친절하고 따스한 말로 달래다, 타이르다”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맏아들이 분을 내고 있어야 하며, 아버지는 밖에까지 나와서 그를 따스하게 달래고 타일러야 하는 것입니까?

이에 맏아들이 자기 속에 있는 분한 생각을 아버지에게 표출합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모든 명령을 어김 없이 지켰거늘 내게는 내 벗과 즐기도록 염소 새끼라도 주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십니까?”

그는 송아지 요리 냄새가 나고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나는 잔치에는 근처도 가지 않은 채 아버지를 향해 “당신은 불의한 사람입니다!”라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계속 “아들아! 그러지 말고 들어가자. 네가 이러면 잔치가 썰렁해지지 않겠니! 들어가자. 아버지를 봐서라도 들어가야지, 아들아!”라고 타이르며 말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마치 큰 공로를 세운양 거만한 채 화난 표정을 하고 밖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 모든 내용이 “내가, 내게는, 나와 내 벗”이라고 말하며 철저한 자기 중심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동생을 향해서는 ‘이 아들’, ‘창녀와 함께 허랑방탕한 자’라고 멸시하며 깎아 내립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서는 공평하지 않다고 힐난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자신은 매우 훌륭한 아들이라고 스스로 평합니다.
“나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역시 본성상 죄인들이며 대단히 교만한 자들이라 맏아들의 사고가 훨씬 더 친근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비유에서 맏아들의 말에 긍정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음적인 사고와 대단히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적인 사고 방식으로 인하여 바른 진리가 선포되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하나님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나는 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 아버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내용과 매우 비슷한 비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20장에 실린 포도원의 품꾼 비유입니다.

그 비유를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품꾼들과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을 시킵니다. 그 후 포도원 주인은 오전 9시에 장터에 나가 그곳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포도원에 가서 일하면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말하고 포도밭으로 가서 일하게 합니다. 주인은 낮 12시와 오후 3시에도 똑같이 했습니다. 심지어 오후 5시에도 장터에 나가 빈둥거리는 사람을 불러다가 포도밭에서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포도원 주인은 관리인에게 시켜서 맨 마지막에 온 품꾼부터 품삯을 주게 합니다. 먼저 맨 마지막 오후 5시에 온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품꾼들은 오후 5시에 온 품꾼들보다 더 오랫동안 일을 했기 때문에 한 데나리온보다 더 많은 품삯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른 아침에 온 품꾼들과 12시에 온 품꾼, 그리고 오후 3시에 온 품꾼들이 불평을 합니다.
“저 사람들은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당신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취급합니까!”(마 20:12).

그들은 분노가 났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불공평한 사람이라고 힐난합니다. 자신들은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포도원 주인이 대답합니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소. 당신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나와 약속하지 않았소? 자, 당신 것을 가지고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 가장 큰 자비를 베풀었을 뿐이오.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라서 당신들이 나를 악하게 보는 것이오?””

사실, 포도원 주인은 오전 9시, 오후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한 데나리온보다 적게 받는 것이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주인은 모든 품꾼들에게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배은망덕한 인간들은 주인이 베푸신 자비를 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자비를 베풀었다고 화를 냅니다. 주인이 불의하다고 따집니다. 이것이 맏아들의 심보입니다.

어린 자녀 넷을 둔 어떤 품꾼 아버지가 피자를 사왔습니다. 피자를 살 형편이 아니었지만 허리가 휠 정도로 열심히 하루를 일하고 와서 아이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피자를 사왔습니다. 그리고 피자를 공평하게 넷으로 자른 후에 한 쪽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자녀 넷은 아버지가 굶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싸움이 났습니다. 싸움이 난 이유는 큰 아들이 볼 때 셋째 놈 피자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미워! 아버지는 셋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아!”라고 하며 셋째 아이의 피자를 더 빼앗으려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칩니다. 나머지 아이들로 어느새 자기 피자가 작다며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가장 풍성하고 즐거워야 할 피자 파티 시간이 난장판이 되고 싸움 판이 됩니다. 아버지는 네 자녀를 좀 더 먹이려고 자신도 먹고 싶은 피자를 건드리지도 않고 나누어 준 것인데 그 아이들 중에는 아무도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런 슬픈 일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가족에서도 항상 발생하고,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항상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자 없이 굶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고 저 놈이 내 피자보다 큰 것을 가졌으니 결코 가만 둘 수 없다고 하며 자비로운 아버지를 향해 분노하며 못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지옥에 떨어져야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형제들의 우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공관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 역시 복음과 관련된 것이며 포도원 주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아들과 맏아들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알려주시는 교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비결은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공로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새 언약에 따른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회개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은 하나님이 찾아내신 잃은 자녀로서 오직 은혜 가운데 아버지와 온전한 관계가 맺어져서 아버지의 집에서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신분이 어떠하든, 또한 어떠한 상태이든 상관없이 회개함으로 주 앞에 돌아옴으로 천국 백성이 된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한편, 맏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 노력과 공로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유대교 및 모든 인본주의 종교들을 상징합니다. 물론 맏아들은 직접적인 배경에 있어서는 지금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수군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구약 시대에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자비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는 자기들 외에 다른 사람들이 받아서는 안 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자기들에게 국한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고 수고하지만, 세리들과 죄인들, 그리고 온 세상의 다른 민족 사람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세리들 및 죄인들과 함께 거하시며 죄 사함을 선포하고 병을 낫게 하시니 그들은 말도 안 된다며 분노하였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고 하니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모든 인류는 다 하나님 앞에서 멸망 받을 죄인인 사실을 가장 먼저 입증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 역시 죄인입니다. 아브라함도 죄인이요, 모세와 다윗도 죄인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오직 장래에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교만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합니다. 그 대신 인간들이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유대교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서 모세의 율법과 무관한 자들은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오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므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자녀 삼고 백성 삼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소유하고 가르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 외에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의 그러한 사고가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며 더 나아가 구원을 저지하는 그릇된 신앙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큰 아들에 대한 비유이며, 그 큰 아들은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회개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비유 속에서 큰 아들로 등장한 것입니다.

재미난 것은 비유 속에서 29절을 보면, 큰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용어가 특이합니다. 일반적으로 (디아이코네오)라는 헬라어가 쓰이는데 이곳에서는 노예를 뜻하는 (둘루오)가 쓰이고 있습니다. 즉,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노예처럼 섬기며 당신의 명령을 어김없이 지켰다”는 뜻입니다. 이는 맏아들의 삶의 모습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참 자녀로서의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맏아들은 철저하게 노예처럼 섬기며 아버지의 명령을 지켰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철저하게 노예처럼 율법을 지켜서 아버지의 기업을 전부 상속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
참으로 아버지의 자녀라면 마땅히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 받는 것이지, 노예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어떤 법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기업을 물려 받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 민족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복음의 진리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의 길을 분명히 알기 전에 그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즉,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서기관 중에 서기관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교훈에 따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후에 그가 알게 된 것은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방법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더욱이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그 자체가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며 스스로 멸망에 빠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3-9)

[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10-14)

한편, 맏아들로 비유된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인하여 교만하여지면서 구원의 길을 놓치더니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악한 부류가 되고 말았습니다.
[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9:3-10:3)

[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살전 2:15-16)

이처럼 구원을 얻는 길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고 오직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성령을 받음으로 새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믿음이며,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새언약인 십자가의 복음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독생자까지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또한 자기 생명까지 죄인들을 위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비결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한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 은혜를 모른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맏아들이며, 그 은혜를 안다면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의 품에 안겨 한없는 풍요와 기쁨과 잔치를 누릴 수 있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바리새인적인 생각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적인 생각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바리새인의 생각은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을 누리는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주의 사랑을 업신여깁니다. 나아가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교만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은 나에게 친구와 즐길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면서 허랑방탕하게 살던 탕자를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어느새 하나님은 불공평하고 나는 억울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향하여 이러한 마음을 갖지 않습니까? 피자 한 조각 같은 썩어질 이 세상 것 몇 가지를 비교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저 사람보다 분명히 더 착하고 성실하고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했는데, 왜 저 사람은 월급도 많이 받고 잘 살고 또 유명하고 건강하고 자녀들도 잘 될까?”라며 하나님께 섭섭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나는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가”라며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정말 너무한 것 아니세요?”라고 맏아들처럼 따지면 자기 연민의 눈물을 흘린 적은 없습니까?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친구를 보면, “제가 저 친구보다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왜 가난하고 못난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라며 하나님께 섭섭합을 느낍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향해 은근한 못마땅함이 있습니다.

심지어 한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 얻으면, 또는 어떤 영혼이 진심으로 믿음이 좋아지면 우리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나도 과거에 당신보다 더 뜨겁고 믿음도 좋았었지. 그러나 두고 봐라. 너도 나보다 난 것이 없으니 분명 신앙이 식을거야.”
“어! 저렇게 무식하고 한심하고 못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제대로 보시는 것 맞는가?”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기의 편협하고 좁은 관점에서 내가 용납할 수 없고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하면서 늘 멸시와 짜증과 원망을 품고 하나님을 향해 도전합니다. 그러한 도전은 종종 권위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표현됩니다. 부모님들을 원망합니다. 목사를 원망합니다. 사회와 나라와 정부를 탓합니다. 환경과 상황에 대해 욕을 합니다. 그들의 억울함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한 만큼 대우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왜 주께서는, 부모는, 학교는, 기업은, 정부는 충분히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심보의 가장 깊은 곳에는 맏아들처럼 깊은 자기 연민에 빠져서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보는 분노가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새 신앙을 멀리하고 자기 멋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말합니다.
[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31-32)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사랑을 확신시켜 줍니다. 맏아들은 노예처럼 수고하지 않아도 단지 아버지를 믿기만 하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유산으로 물려 받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와 한 마음이 된다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들로 인하여 잔치를 열고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자녀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는 기쁨이 이 우주에서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세상에 드러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알 때 우리는 바리새인이 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모르면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아버지를 모르면 자기 중심적인 바리새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노예처럼 어떤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아들의 보혈로 구원하신 아버지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수고는 감사에 대한 표현일 뿐, 내 분깃을 찾기 위한 힘든 노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잃는 것은 어느새 바리새인의 마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복음이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들과 가난과 궁핍과 비참이 찾아오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참 아들의 만족과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넘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오해를 풀고 복음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분도 아니며,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기를 기뻐하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이기적인 삶에 깃들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기쁨은 어린아이 같은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그분의 성품을 믿는 믿음 안에서 아버지의 기쁨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을 어찌 우리가 의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신속하게 바리새인적인 마음 자세를 회개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되면서 오직 넘쳐 흐르는 감사만을 한없이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자유로운 성령의 참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작성일:2017-03-05 17:35:50 211.235.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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