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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제목

하나님의 크신 사랑(사사기 11:29-40)

닉네임
천헌옥
등록일
2007-10-10 11:35:55
조회수
5188

사사기 11:29-40
하나님의 크신 사랑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을 소개하고 있는 히브리서 11:32에 보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본처의 아들들에게 쫓겨나서 멀리 이방인의 땅인 돕 땅에 가서 살았습니다. 바울이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생각을 억지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렇게 말씀하였음이 분명하다면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입다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떤 신앙의 분명한 행동을 보여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입다가 우리에게 보인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성경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오늘 우리가 읽은 사건 외에는 그가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만한 다른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을 잠시 이야기 해 봅시다. 모세가 죽고 그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믿음으로 얻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이스라엘에는 뚜렷이 혈통을 이어가는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그때마다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사사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 장을 사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다는 모두 열두 명의 사사 중에 여덟 번째의 사사로 등장을 합니다.

여호수아 이후에 첫 번째 사사는 갈렙의 사위인 옷니엘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에훗, 세 번째는 삼갈, 네 번째는 드보라와 바락, 다섯 번째는 기드온, 여섯 번째는 돌라, 일곱 번째가 야일, 여덟 번째가 입다, 아홉 번째는 입산, 열 번째는 엘론, 열 한 번째는 압돈, 그리고 마지막 열두 번째는 삼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는 그 나라가 평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때에는 이방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매를 맞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은 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기를 일곱 차례, 일곱 번째에는 참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기고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불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완전히 세속화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불레셋과 암몬 자손에게 파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에게서 학대를 당하니 그제야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냉담하게도 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하였노라고 회개하고 이방의 신들을 제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은 없었습니다. 암몬 자손의 군대가 길르앗 땅에 들어와 진을 쳤습니다.

길르앗의 장로들과 방백들은 근심 어린 의논들을 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구원하려고 나서겠는가? 누구든지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면 그는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쟁을 할 만한 준비를 하고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은 돕 땅에 가서 살고 있는 입다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생의 아들이라고 그의 형제들에게서 쫓겨났지만 그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들이 가서 입다에게 우리의 장관이 되라고 청원합니다. 입다는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암몬을 내게 붙이시면 나를 너희의 머리로 삼겠느냐고 다짐을 합니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증인으로 세우면서 그리 하겠다고 합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이릅니다. 그리고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냅니다. 왜 우리 땅을 치러왔느냐고 따집니다. 암몬 왕은 아르논에서 얍복과 요단까지 자기의 땅을 찾으러 왔으니 좋은 말 할 때 돌려 달라고 합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이르게 되는 경위를 설명하면서 너희들의 땅은 우리를 지나가게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밟아 보지도 않았다고 말하면서 네가 말하는 그 땅은 아모리 땅인데 아모리 왕이 우리를 지나가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치러 나왔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에게 붙여 우리가 그 땅을 취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입다는 암몬 자손의 왕이 주장하는 것이 부당한 이유를 몇 가지로 들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그 땅은 아모리인의 땅이지 네 땅이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네 땅이라고 우기면서 그 땅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둘째는 우리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네가 돌려 달라고 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셋째는 너는 너의 형제인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나은 것이 있느냐 발락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툰 적이 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 발락은 너 보다 더 낫지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아무런 트집도 잡지 못하는데 너는 무엇이냐.

넷째는 우리가 이 땅에 산지가 이미 삼백 년이나 되었는데 그 동안 왜 찾지 않았느냐 네 조상들이 바보여서 찾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므로 네 말은 옳지 않다.

다섯째는 이스라엘이 모압에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는데 네가 나를 쳐서 악을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판결하시기를 바란다.

입다가 내침을 받은 기생의 아들이었지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세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벼랑 끝에 떨어진 사람이었지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쓰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입다는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 밖에 없는 고명딸을 그냥 실수로 바치겠다고 말할 정도로 어리석한 사람이 아닙니다. 논리가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암몬 자손의 왕은 입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비통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서원합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로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나님은 암몬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십니다. 드디어 암몬의 항복을 받아내고 입다는 승리의 개선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집 문에서 그를 맞은 사람은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참으로 입다는 자신의 승리가 무색해 지는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너는 나를 참으로 참담케 하는 자 중의 하나구나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서원 하였으니 어찌 돌이키겠느냐?”

딸은 아버지를 위로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십시오. 하나님이 그 서원을 받으시고 암몬 자손을 치시고 우리 민족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딸은 아버지의 서원한대로 번제의 제사로 드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입다의 이야기요 참으로 슬프디 슬픈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두고 입다의 경솔하고 방정맞은 입방아 때문에 그의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되었다는 많은 비판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기자는 입다는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증거 하는데서 저는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읽고 또 읽어보았습니다. 그의 믿음의 행동은 이 사건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옛날의 사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입다의 입장이 되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가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이 신약의 그림자로 기록되었기에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입다의 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제물로 받으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입다의 이 행동은 다른 사사들 못지않게 큰 믿음의 행동으로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부분을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생을 구원하시려는 구원계획에 대한 계시였기 때문입니다.


1. 입다의 서원은 성령의 강권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서원은 소원과 다릅니다. 소원은 생명을 두고 하는 맹세가 아닙니다. 그러나 서원은 거의 다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입다가 그런 서원을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몰아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암몬은 자기의 힘을 믿고 이스라엘을 치려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길르앗의 장로들은 이스라엘에 오죽 사람이 없으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천대받고 쫓겨난 입다에게 와서 구해 달라고 했겠습니까?

자기에게도 군사는 없습니다. 갈데없는 사람들을 거두어 주었더니 이제 그 사람들이 은혜를 갚겠다고 따라 나선 오합지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자기를 모든 이스라엘은 목을 걸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참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지 아니하면 안 돼는 절박한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입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저는 입다가 참으로 용기를 내어 이 서원을 하게 된 것이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삿 11:29-31에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들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이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임하셔서 용기를 얻고 암몬 자손에게로 담대히 나아갈 때에 서원을 하였다.

둘째는,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였다.

아무턴 입다가 서원을 한 것은 성령의 강권하심이었습니다. 성령을 받고 담대히 나아가다가 서원을 하였거나 나아가다가 성령을 받고 서원을 하였거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원을 하였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 맨 먼저 나와 자기를 맞는 자가 번제물이 될 것]이라고 한 서원도 여러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짐승이 아니겠느냐, 아니면 종을 생각하였겠지 않겠느냐 하지만 본문의 원어를 살펴보면 영접하는 “그는”의 그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입다가 처음부터 자기의 무남독녀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것이라 믿습니다. 많은 사사들이 아내를 많이 두고 많은 아들과 딸을 낳았습니다.

입다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지만 딸 하나만 두었습니다. 입다는 비록 기생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깊고, 또 얼마나 윤리적으로 성결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그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였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딸도 아버지를 참으로 믿고 신뢰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시면 그 딸이 맨 먼저 달려 나올 것이라고 아버지는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무남독녀의 사랑하는 딸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자기에게서 가장 사랑하는 것,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을 이스라엘의 구원의 대가로 지불하겠다는 그의 굳은 서원이었습니다.

그는 그 서원을 그대로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서원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먼저 자기 집에 보내어 딸이 나오지 않도록 조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무남독녀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내어놓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10;13에서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고 공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입다가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내어놓고 부르짖는 데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끝없이 반복하는 죄를 짓고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주시기로 스스로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요청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에게 서원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놓으셨습니다. 세상에 잠깐 보내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잠깐 사시는 것으로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를 십자가에 한 마리 어린양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입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생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는 그림자적인 인물입니다. 특별히 35절의 말씀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하는 말씀을 보면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고뇌를 잘 계시하여 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 입다의 딸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그림자적인 인물입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존중히 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그리고 그가 처녀로 죽음을 애곡하였다는 것에서 우리는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기억하게 됩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입다가 자기의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 아니었다면 애곡하는 두 달 동안 여러 사람과 여러 환경에서 충분히 나타났을 것입니다.

제사장을 통하여서, 혹은 선지자를 보내서라도 혹은 꿈으로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그 딸을 바친 후에도 하나님의 노여움은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에브라임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입다의 손을 다시 들어 주셨습니다.

입다의 딸은 화목제물이 되어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입다의 딸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뚜렷이 계시하여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좇아 자기의 몸을 기꺼이 희생의 제물로 내어주는 모습은 주님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요청한 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 강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물론 독생자의 죽음에서 아버지의 고뇌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크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삶은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생명 끝날 때까지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성일:2007-10-10 11:35:55 58.236.9.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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