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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제목

기도의 열매 (사도행전 3:1-10)

닉네임
스데반 황
등록일
2017-04-09 16:29:54
조회수
817
기도의 열매

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항상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였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이미 영적으로 많은 성숙함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규칙에 따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체험적인 신앙이란 삶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복음의 열매를 맺는 신앙을 말합니다. 체험적인 신앙을 지닌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교리나 철학이 아니라 참으로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나를 사랑하되 자기의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보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바로 그분과 날마다 생생하게 교제하는 신앙이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이러한 체험적인 신앙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내 주변에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기도의 응답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선포하십니다.
[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2-3)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이 무엇입니까? 크고 은밀한 일은 주의 백성을 원수의 손아귀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죽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던 주의 백성들이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의 전개를 기도하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시작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단지 실제 사건을 기록함이 아니라 3장을 비롯한 사도행전 전체의 배후에 기도가 있다는 것을 알리시려는 성령의 의도가 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도하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어떤 특권들이 주어지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인 분별력이 주어집니다.

기도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
10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행 2:10-11)

이에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시편 기자가 답변합니다.
[
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 145:18-19)

이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으며 성령으로 충만하여질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는 우리의 기도의 바탕에는 영원한 희생 제물이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완전한 사람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하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즉, 기도는 나의 기도의 간절함과 노력에 의해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의해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큰 문맥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이렇게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함께 보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을 함께 느끼며,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함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분별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즉, 영적 분별력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아는 가운데 그러한 관점에서 모든 사건들과 만남과 세상 일들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알 뿐만 아니라 마귀의 역사도 알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늘 기도하는 사람인데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날마다 성전 문에 있던 거지가 있었습니다. 항상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라고 특이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강림을 체험한 직후 또 기도하러 올라가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에 그 앉은뱅이 거지를 보는 순간 그들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 싶어하시는 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높여 복음을 전하고 많은 영혼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보면서 주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구걸하는 그 거지를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나중에 보면 앉은뱅이가 나은 후에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으로 몰려올 때 베드로와 요한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루어 드립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하나님이 그 종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시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참조, 행 3:25-26).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 매사에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는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인 권위를 갖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권위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자연스러운 권위입니다.

영적인 권위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 세상에 속한 자들은 영적인 권위를 볼 수 없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신자들은 어디서나 영적인 권위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영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 권위는 기도하며 순종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에서 나오는 말은 믿는 신자의 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믿는 신자는 그 말씀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기에 마음을 열고 듣게 됩니다. 그 말씀은 신자의 마음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해 순종하여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영적인 권위가 있는 주의 종을 통해 나오는 말씀은 신자들을 향해 강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감화력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꾸밈이 없고 오직 진실한 복음만 있습니다. 이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 종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이나 설교는 영적인 생명과 힘이 되어서 사람의 가슴과 영혼을 진동시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그 이유는 이처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말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영적 권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영적 권위로부터 나오는 말은 흉내를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잘 알고 지식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권위를 받쳐 주는 그 힘! 그 영적 권위! 사람들의 가슴에 호소하는 그 능력은 오직 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도는 인간의 인내와 끈기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하여 하는 기도입니다. 배신자요 죄인이던 연약한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다 바치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으로부터 성령을 받고 드리는 기도는 능력을 얻게 되면서 쉬지 않고 드리게 됩니다. 즉, 우리에게서 나오는 기도하는 힘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체험하게 될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참된 기도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받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과 기도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들과 교회와 주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어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강권되는 사람은 쉬지 않고 몸 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종착점 역시 사랑입니다. 영적 성장의 종착점도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이렇게 사랑으로 귀결되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에 젖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영적인 권위가 주어져서 그의 말에 의해, 설교에 의해 교회가 성장하며 이웃들이 변화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영적 권위는 오직 기도 외에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8-29)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 거지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이에 그 거지가 바라보자 베드로가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음성은 권위의 음성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음성입니다. 이에 앉은뱅이 거지가 일어섭니다.
“그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와 같이 십자가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한 기도 생활은 늘 성령 안에서 기도 드리게 되고 어느새 영적인 권위를 얻게 되더니 나아가 그 권위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더욱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모든 것의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바른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사람들이 듣기에 좋았느냐 안 좋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분위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었느냐 아니면 사람을 드러내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역할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인데 우리의 기도 역시 그리스도에게 집중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왕의 왕으로, 그리고 만유의 주로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6-11)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19:11-16)

그러므로 우리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할 때 그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일은 언제나 본질적인 부분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앉은뱅이 거지는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본질적인 필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가 바라는 것은 오늘 하루 끼니를 이을 수 있는 돈 몇 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 선포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은 앉은뱅이 거지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 큰 일은 다름 아닌 일어나 걷게 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베드로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믿었고, 그 앉은뱅이 걸인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믿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하여집니다.
[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8-12).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세상 사람들도 해결할 수 있는 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방안이 아닙니다. 물론 일용할 양식이 없을 때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욕심에서 나오는 기도는 그릇된 기도일 뿐만 아니라 악한 기도입니다.
[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 4:2-4)

참으로 궁핍하고 굶게 될 때에는 당연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해야 하지만 그럭저럭 견딜 수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기기 바랍니다.
[
14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눅 3:14; 딤전 6:6-8)

기도는 더 잘 먹고 더 잘 입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불신자라도 그냥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면 누구든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러한 것을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1-32)

그 대신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대로 기도하는 것은 영원한 것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본질적인 것에 대해 복을 받으며 나아가 본질 중에 본질인 거듭남과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사람을 본질적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한없는 신령한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 거지가 본질적으로 치유된 사건을 통해 모든 백성에게 전파합니다.
[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3, 14-16)

하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사건은 그 거지에게 본질적인 복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 3:19, 26).

이처럼 기도의 목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영혼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악을 버리고 거룩함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본질에 대한 하나님의 복이며 인간에게는 최고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인하여 많은 영혼들을 얻고 또한 그들로 회개하고 거룩한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는 인생의 큰 사건이 기도 응답으로 나타나면서 우리의 기도는 더욱 승화하여 영혼 구원과 거룩함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는 더욱더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며 조급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항상 급한 문제에 마음이 가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급한지 교회에 나오기도 힘들고, 교회에 나와서도 급한 문제로 인하여 궁극적인 본질의 문제를 망각하고 간신히 예배를 때우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로 이 세상을 떠나면 본질적인 문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상당히 불안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거듭남의 확신이 없고,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 상태일 경우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사람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을 받았습니까?

이와 같이 본질적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언제나 날마다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 거지가 돈 몇 푼 받고 또 다시 그 다음 날도 앉은뱅이 거지로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받게 되는 죄 사함과 영생을 모르는 한, 평생 영적인 앉은뱅이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과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큰 일이 자신들을 통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자세에서 우리는 또한 그들의 기도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이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과시하지 않고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 예수만을 높이는 정신은 항상 기도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겸손하고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큰 일들이 성취될 때, 위대한 일이 성취될 때,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드러내는 것은 교만하고 완악한 우리 인간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기도로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이처럼 기도를 통하여 내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때, 그때 복음의 생명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단순함의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 이유는 기도로 인하여 우리의 관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음이 복잡한 사람은 그 마음에 주인이 많은 것입니다. 즉, 세상도 주인이고 예수님도 주인일 때 그 마음은 복잡합니다. 사람은 서로 상반되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갈려서 복잡해진 마음은 결코 주 앞에서 집중하여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도 없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의 복음의 권위와 능력 가운데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원한다면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단순한 삶을 통해 단순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운동 선수들이 훈련을 받는 이유는 단순하기 위하여 받는 것입니다. 모든 훈련의 목적은 단순함을 위함입니다. 단순해져야 힘이 모아집니다. 단순해져야 자유롭습니다. 단순해져야 강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반복되는 훈련은 집중하기 위한 것이요, 영적인 반복 훈련은 그 집중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기 위함입니다.

권투를 보십시오. 무술을 보십시오. 농구를 보십시오. 축구를 보십시오. 상대를 이기는 힘은 훈련이며 집중이며 반복입니다. 그 승리의 장면 배후에는 피 눈물이 나는 훈련을 통한 어마어마한 집중과 단순함과 반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의 능력은 죄와 마귀와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복음의 능력인데 이것이 우리의 것이 되려면 피 흘리기까지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경건의 훈련의 요소는 두 가지인데 그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5)
그러므로 기도의 훈련을 쌓은 사람에게만 거룩의 능력,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적인 군사로서 사탄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께 반복적으로 집중하며 단순하여지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 읽기를 반복해야 하며, 쉬지 말고 성경 말씀에 따라 반복해서 기도함으로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님께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너무 많은 인생의 목적, 너무 많은 인생의 방향을 취한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마음이 모아지지 않고, 그러니까 훈련도 되지 않고 헌신되지도 않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도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한 가지의 단순함을 위해서 인생을 바치는데, 나는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단순하게 살고 있습니까?

헌신은 집중입니다. 내 관심과 마음을 주께 전부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관심이 그분께 모아집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모으는 영적인 수단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만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오직 참된 기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행 20:24; 빌 1:20-21; 롬 14:7; 딤후 4:7-8)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바른 복음에 서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곧바로 삶으로 이어지고 그 삶은 복음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늘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작은 기적들을 체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과 추억을 갖게 될 때 그 감동과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눈물은 사람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로 살아가면서 이러한 영광스러운 기도의 열매를 항상 맛보며 누리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작성일:2017-04-09 16:29:54 211.235.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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