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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구원론과 로마서의 이신칭의는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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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등록일
2017-10-28 08:48:22
조회수
667

선행구원론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 7:21)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선이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이 선행이며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구원 곧 영원한 구원이기에. 



하나님의 뜻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앞에서 말씀하신 바이다. 산상수훈에서 삶의 원리로 제시된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고 음욕을 품지 않으며 골방에서 기도하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 등이다. 이는 예수님이 완전하게 하신 새 언약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원하시는 삶의 원리다.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것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이다. 그 원리를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다.



로마서의 이신칭의는 바울 사도가 로마교회에게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한 반박으로 제시된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시다(롬 10:4). 여기에서 율법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완전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이다(갈 6:2).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가르침의 문제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예수님의 율법이 아닌 모세의 율법을 삶의 원리로 제시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였다. 믿음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은혜를 받아들이고 따르라는 말이다. 그 은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함께 그분이 그 백성들을 위해 준비하신 삶의 원리를 따름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삶의 원리는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의 (율)법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그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를 관계적 칭의라고 한다.



나는 이신득의를 거부하지 않는다. 위의 글이 어떻게 이신득의의 거부란 말인가? 나는 루터식의 이신득의를 거부하는 것일 뿐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자로서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지만 로마서를 잘못 읽었다. 그는 로마서가 관계적 칭의에 관한 심도 깊은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적 칭의로만 읽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에 그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함받게 되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법정적 칭의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것이다. 다만 로마서가 법정적 칭의를 진술(롬 3:22)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잘못 읽었던 것이다.



로마서가 진술하고 있는 이신칭의는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 모두이다. 율법 준수와 연관한 바울 사도의 진술은 관계적 칭의에 관한 심도깊은 가르침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행구원과 의미에 있어서 같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종교개혁의 의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그 당대의 교회의 가르침과 삶의 원리를 평가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의의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 의의를 바르게 되살리시는 500주년 기념에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루터의 답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곧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 시대에 적용하는 것이다. 루터가 아니라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 과연 이 땅의 교회는 그 길을 갈까?



  

작성일:2017-10-28 08:48:22 121.191.6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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