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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경 목사의 기고 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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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등록일
2017-11-27 16:47:04
조회수
1102

권 목사가 개혁정론에 기고한 글 ‘우리는 무엇을 팔고 있는가?’를 읽었다. 수려한 글이고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지만 비판적으로 평가할 필요도 있다고 여겨진다. 글 내용은 루터식의 이신칭의나 칼뱅식의 이신칭의를 지키면서 성경이 명백하게 강조하고 있는 성화도 붙들려는 것이다. 과연 둘은 동시적으로 가능한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와 루터나 칼뱅의 이신칭의가 같은가? 곧 루터나 칼뱅이 그 이신칭의를 바르게 이해했는가의 문제가 있다. 안타깝게도 글에선 그에 대한 성찰이 없다. 그냥 바르게 이해했다는 절대적인 전제를 가지고 말을 할 뿐이다. 나는 이 부분을 살피는 작업이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출생과 출생 이후의 삶은 절대적인 연관관계가 없다. 출생했다고 아버지의 뜻에 반드시 부합되는 삶을 산다는 보장이 없다. 부합되는 삶을 못 살았다고 하더라도 출생했다는 사실은 불변이다.



출생이 구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곧 관계 회복이다. 출생에 있어서 방편이 믿음이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다. 여기에선 오직 믿음으로 곧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말이 아무 문제없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이다(엡 2:8~9, 딛 3:5).



출생 이후의 삶은 회복된 전제 하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과는 별개의 믿음이다. 의지하면 순종한다. 순종한다는 것은 의지했다는 것이다. 의지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는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지하는 삶 다르게는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진술하는 이신칭의의 주된 내용이다. 하박국서 인용이나 아브라함과 관계된 진술은 그 맥락이다. 이에 대해선 1126번 글에서 밝혔다.



출생 이후의 삶과 관계된 믿음, 순종이 영원한 구원과 직결된다. 그 구원은 믿음으로이면서 동시에 순종으로이다. 후자는 마 7:21, 히 5:9 등에 나타나 있고 전자는 성경 여러 곳에서 진술되어 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야고보서의 진술에서 믿음은 출생과 관계된 것이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으로만 의롭다하심을 받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행함 곧 순종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과 연계되어 이해해야 한다. 의지하는 것인 믿음은 행함 곧 순종이 없을 수 없다. 둘은 동전의 양면이기에. 행함 곧 순종이 없을 수 있는 믿음이란 영접하는 것에만 해당된다.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행함 곧 순종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다. 거짓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이다. 출생케 한 믿음은 참되었지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인 생명은 없는 것이란 말이다. 산 믿음 영접하는 것인 믿음이 살아있다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누리게 한다. 행함 곧 순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참고로 로마서의 행위와 야고보서의 행함은 전혀 다른 말이다. 전자는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율법 곧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아마도 십계명을 지켜야한다는 것이 핵심일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완전하게 된 율법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삶의 원리를 주셨다. 모세의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못하지만 완전하게 된 율법은 자유하게 한다. 로마교회에게 이전 언약의 모세 율법을 삶의 원리로 제시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불순종이다. 야고보서에서 얘기되는 행함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을 지키는 것이다. 순종인 것이다. 그 시점에서 유대인 신자들에겐 모세의 율법이 여전히 유효했기에 율법 준수도 순종이다. 그들에겐 모세 율법 준수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준수가 다 순종이었던 것이다. 야고보서의 행함에 율법 준수가 포함된다더라도 그것은 순종이다. 로마교회와의 차이다. 같은 단어이지만 그 문맥과 시대적 정황을 살피고 그 의미를 규정해야 한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의지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방인 신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삶의 원리로 주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따른다.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바울 사도가 믿음과 대조시켜 비판한 행위는 신자의 모든 행동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 준수다. 불순종이다. 율법 준수로는 신자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롬 8:3).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분이 주신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따른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삶의 원리다. 이신칭의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로마서 12장 이후에 제시된 삶의 원리를 따름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신자가 삶에서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신자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가능하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성령을 따라 행하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갈 5:16).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면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난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다. 관계적 칭의이다. 신자가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면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불의한 삶이기에 불의하다고 하신다.



로마서는 영접함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 법정적 칭의(롬 3:22)만 아니라 관계적 칭의를 함께 다루었다. 후자를 율법 준수와 비교하여 심도 있게 다루었다. 루터나 칼뱅을 위시한 개혁자들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가 법정적 칭의만을 진술했다고 잘못 읽었던 것이다. 그 시점에서 로마가톨릭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렇게 읽게 된 듯하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다르게는 믿음으로만이라는 진술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출생과 관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출생 이후의 삶 나아가 영원한 구원은 믿음으로이다. 동시에 순종으로이다. 출생은 영원한 구원과 절대적 연관성이 없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어떤 신자 곧 새 언약의 삶의 원리인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따르며 사는 신자에게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 않은 신자에게 맞지 않는 말이다. 그 말은 순종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 성경에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듯한 성구들은 모두 그 문맥에서 순종이 내포되어 있다. 성경은 그 전제를 저버린 신자들이 은혜 곧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탈락하는 경우를 아주 많이 진술하고 있다(요일 5:16, 히 6:4-6, 딤전 1:19, 고전 3:16, 고전 5:5, 고전 6:8-11, 마 25:14-30, 고전 9:27 등). 신자로 하여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하시려는 성령의 역사를 육체의 욕심으로 거스른 것이다.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이다(갈 6:8). 이는 우리 현실에서도 목격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둘에 대한 구분이 없이 형성된 개혁주의 칭의론 나아가 구원론이 지금과 같은 교회 현실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를 법정적 칭의로만 읽는 전통이 현대의 면죄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또는 믿음으로만이라는 관점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도식으로 연결되어 영원한 구원도 이미 결정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성화 강조로 벗어나려고 한다. 성화 강조는 지극히 정당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 임시방편일 뿐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다르게는 믿음으로만이라는 말엔 구원 곧 영원한 구원이 원천적으로 성화와는 별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에. 공부를 잘하면서 많이 하였고 이해력도 뛰어난 이들이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500여 년 전 사람들의 사고의 틀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루터나 칼뱅 위에 칭의론, 성화론, 구원론을 정립하려는 것에서 벗어나서 성경의 진술 위에 그것들을 정립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의 한계는 여기까지 나아가려고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루터와 칼뱅을 절대적으로 붙들려고 하기에. 루터나 칼뱅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을 붙들어야 한다.



  

작성일:2017-11-27 16:47:04 223.39.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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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6pcj 2017-12-01 09:00:16
그 성구가 왜요?
그 성구는 나간 사람은 다 원래부터 교회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닌데요.
원래부터 속하지 않았던 어떤 사람들에 관한 진술이에요.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할 때의 대상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랍니다.
둘은 전혀 다른 거예요.
pnugoodman 2017-11-28 17:18:43
19 그들이+ G0000 우리 G2257 에게서 G1537 +나갔으나 G1831 우리에게 G2257 속하 G1537 지 G2258 아니하였나니 G3756 만일+ G1487 우리에게 G2257 속하 G1537 였더 G2258 +라면 G0000 우리와 G2257 함께 G3326 거하였으려니와 G3306 그들이+ G0000 0나간 것은 G235 다 G3956 우리에게 G2257 속하 G1537 지 G1526 아니 G3756 함을 G3754 +나타내려 G5319 함이니라 G2443
5016pcj 2017-11-28 14:07:15
그 신이 우상이지요.
성경 어디에 그런 신이 나오는가요?
그런 신이라면 출애굽과 홍해 도하 후에 하나님과 모세를 믿었던 사람들 중에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죄로 인해 멸망하는 사람들이 왜 나온답니까?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요.
왕국 시대도요.
신약의 교회 시대도 마찬가지고요.
신학을 위해 만든 신 말고 성경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요.
pnugoodman 2017-11-28 09:09:26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그 자식을 수고로이 낳아놓고도 말 안 들으면 언제든지 호적을 파내실 그런 분 이시군요.
우리가 믿는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미운 짓을 해도 결국에는 아버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