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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진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하심을 받지 않았단다(롬 4:2). 그가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단다(3절). 창세기 15:6의 인용이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서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창 15:4). 하늘의 뭇별을 보게 하시곤 그의 자손이 그와 같으리라고 하셨다(5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에 대해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은 셈의 후예로서 나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는 과거에 하나님이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했다(히 11:8). 당연히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았을 것이다. 법정적 칭의를 받은 의인이었다.
그런 그가 삶에서 하나님과의 만나고 새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법정적 칭의의 반복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가 그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둘 다 가능하다. 그 상황에서 그는 믿었고 그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 관계적 칭의이다.
이렇게 의로 여겨진 바 됨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했는가? 아니다. 하나님께 그런 약속을 받기에 합당한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 약속이 주어졌을 때에도 어떤 일을 한 것이 없다. 그냥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뿐이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신 바 된 것은 일의 대가가 아니라 은혜였다(롬 4:4).
아브라함은 그 시점에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그렇게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로마교회는 어떤 유대인 교사들을 통하여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모세 율법은 하나님 사랑, 내 몸 같이 이웃 사랑으로 집약되는 옛 언약의 백성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모세 율법과는 다른 삶의 원리를 준비하셨고 로마교회에게 오셨다. 모세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모세 율법에선 할 수 없었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새 언약의 (율)법이다.
로마교회는 기로에 서 있다.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말을 신뢰하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이전과는 다른 내용의 삶의 원리를 제시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것인가? 아브라함의 예는 후자이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을 예로 하여서 로마교회가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당될 수 있는 새 삶의 원리를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모세 율법을 말한 어떤 유대인 교사들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로마교회는 하나님께 의로 여기신 바가 될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위하여 한 일이라곤 전혀 없음에도 말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몸에서 날 자가 후계자가 되리라는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따라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생각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원래 의인이었기에 여전히 의로 여기신 바가 될까? 당연히 아니다. 로마교회가 새 언약의 삶의 원리를 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율법 준수를 요구한 어떤 유대인 교사들을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실까? 당연히 아니다. 법정적 칭의는 그 칭의가 주어진 이후에 자동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현재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과거의 법정적 칭의는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법정적 칭의를 얘기한 것이 아니다. 법정적 칭의를 전제한 관계적 칭의를 얘기한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삶의 원리로 지금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지금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적절한 삶의 원리를 인지하고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