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자유게시판

제목

구원의 삶에 대한 재해석

닉네임
김헌준
등록일
2018-06-29 13:36:36
조회수
689

1. 구원의 삶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절망적인 삶의 경험에서 놓여 나는 평안의 상태를 구원이라 하지 않을까?



수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각기 다른 그 자신 만의 삶의 상황이 있을 것이고 – 그것이 금전적인 쪼들림이나 절박함, 신체적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비상상태 이든 아니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갈등, 또는 예상치 않았던 어떤 상황에 직면한 암울한 현실 등 등, 그래서 정신적인 충격과 억압 또는 심적 고통을 가져오는 그 어떤 상황이든 –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을 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처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리는 것이 구원이 아닐까?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그다지 큰 일이 없어. 그냥 좀 답답한 마음은 있어도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해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알고 보면 그도 시시때때로 그의 마음에 찿아 드는 저항감, 불쾌, 불안, 불만족, 화, 절망감, 허전함 등 이러한 감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러면 우리 대부분은 구원이 필요 하지 않은가? 한마디로 말하면, 심적 불안정과 고통에서 벗어난 자유와 평안의 마음상태로 사는 것이 구원의 삶이 아닐까 라고 정의 해 본다.



 



2. 왜 구원이 필요한 삶을 살게 될까?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고 지지고 볶는 경험을 한다면, 그래서 나름 종교생활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려고 애쓰거나, 교양을 쌓는 노력도 하고, 선행을 하고 봉사 활동도 하는 등 진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모범적인 삶을 산다고 할 지라도 여전히 그들의 내면의 삶은 그리 쾌청하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 일 것이다.



이렇게 일상에 만연된 쾌청하지 않은 삶을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삶이라고 한다면, 왜 이런 삶이 사람들에게 만연하게 되었는지를 생각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3. 삶에서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밤에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순간까지를 하루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 삶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삶이란 것이 시작되어 결국은 구원이 필요한 삶이 된다면 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 모두는 삶이 행복하고 보람되고 그럴 듯 한 무엇이 되기 위해 그토록 애쓰지 않는가?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은 앞에 이야기 나왔던 것 처럼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닌 답답하고 암울한 삶의 경험을 하게 될까?



이를 다소 비유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신약성경 안에 있는 한 에피소드를 통해 같이 들여다 보고자 한다.



 



4. 기독교에서의 구원



기독교라는 종교를 논하려고 이 이야기를 가져 온 것이 아니다. 아마도 구원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이 기독교 일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의 많은 이야기를 수록한 것이 신약성경인데 과연 예수라는 선생님은 이 구원의 삶을 무엇이라고 가르치시는 지를 한번 숙고 해 들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라는 곳을 지나다가 한 낮에 목이 말라서 우물가를 지나가는데 한 여자가 물을 깃고 있었다. 잠시 배경 설명을 드린다면, 당시 사마리아라는 지역은 유대인들과는 격이 낮은 소외된 지역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며 더운 한 낮에 여자가 우물에 나와 물을 깃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 이런 공공장소에 사람들을 피해 한 낮에 나온 여자는 필시 어떤 사연을 가진 여자 일 것이다.



그러한 여자에게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고 청하는데, 이 여자는 자기에게 다가온 유대인이 신분이 천하다고 여겨 지는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무척 당황스럽고 기이한 것이라고 성경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래서 여자는 말한다. 선생이시여 당신은 유대인이신데 나 같은 사마리아의 그리고 천한 신분의 여자에게 다가오시어 부탁을 하나이까?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 하신다. 여인이여, 그대가 그대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그대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을 것이다, 즉 영원한 가치를 가지는 생명과 같은 것을 얻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에피소드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회의 설명과는 좀 다른 예수의 말씀이 지적하는 본질을 정확히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오늘날의 음성으로 재차 설명을 한다면 이렇다.



(이 여자에 대한 측은지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여인이여, 그대는 나를 대하면서 여전히 그대의 관념의 세계에 빠져 있구료. 유대인이다 사마리아다. 너는 상전이고 나는 천하다. 역사적 상황이나 관습의 지배에 의해 환경이 심어 놓은 함정에서 헤메이며 스스로를 옥죄는 심적인 상태를 예수께서는 보신 것이다. 그렇게 살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얼마나 자조적인 심적 압박상태를 겪으며 살 것인가? 여인이여, 스스로 그러한 환경의 지배를 벗어나야 하는데 그 방법은 이것이다. 즉 네가 나를 볼 때 그저 보이는 그대로 로만 보아야 한다. 그저 한 남자가 목이 말라서 물을 부탁 했으면, 그저 부탁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대는 그에 대해서 그저 있는 그대로만 반응하는 그 상태이라면 그대의 마음 안에서는 어떠한 의문도, 불안도 없을 것이다.



그저 물을 달라고 하는 한 남자로 보이고 이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는 너의 경험의 상태에서 더 이상 관념과 무의식적 판단의 세계로 넘나들지 않으면 너는 동요가 없을 것이고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산다는 너는 영원히 문제없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그 여인에게 주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 여인은 이 말을 알아 들었다. 그 여인은 기쁨과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흥분으로 마을을 향해 달려 갔다고 쓰여져 있다. 참 위대한 에피소드다.



 



5. 삶의 경험에서 구원을



누구나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서부터, 외부 세상이 눈을 통해 귀를 통해 그리고 감각을 통해 내 안으로 경험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외부 세계를 만나는 경험을 할 때 어떠했는가?



모든 보여 지는 것은 그냥 눈에 들어 올 뿐이다, 모든 소리는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그냥 들려 질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려고 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내가 보고 싶은 것으로 듣고 싶은 것으로 하지 않았는지 반추 해 보자. 보여 질 때 그냥 보여 지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그 보여 지는 것이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혹은 이롭다 해롭다 등 등의 생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즉 그냥 그대로 보여 지는 경험이 아닌, 보여 지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의 경험을 내 삶의 경험이라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것이 삶에서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을 암시 해 주는 상징적인 예이다. 우리는 앞에 이야기 된 사마리아 여인처럼, 수많은 세월 동안에 나도 모르게 쌓아 온 고정관념과 자기 기호에 따른 가치체계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삶을 내 삶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자면, 매 순간 경험 경험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닌 내 생각 속에서 걸러 진 환상으로 물들인 경험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현실을 직시 해야만 한다.



그렇다는 것이 어렴풋이나마 알아 지면 이제 이러한 판에 박힌 삶의 경험으로부터 놓여 나서 있는 그대로의 경험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이러한 고착된 삶의 한계 상황을 벗어 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삶의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전환을 찿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



 



6. 고통에서 벗어나는 순수 경험으로의 삶 (구원의 삶)



우리는 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여 지고 들을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 진다.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일어 날 뿐이다. 삶은 그냥 살아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볼려고 하고 내가 들을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내가 한다라는 무의식에 물든 우리의 사고 방식이 내가 모든 것을 한다라는 착각을 낳고 이 착각으로 인해, 내 의도라고 생각 했던 데로 되지 않으면 고통이 일어나지 않던가? 내가 이래야 된다 라고 상정한 그러한 것이 침해를 받는다고 느껴 지면 바로 마음 안에서 고통이 일어난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책은 모든 것이 그냥 일어나고 되어지는 것이라는 이해가 필요하고, 그래서 볼 때 들을 때 무언가를 경험 할 때 그냥 그 자체로만 인식하고 흘러가 버리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모든 주변 경계로부터의 경험을 가지고 가타부타 하는 무의식적인 습성이 나라고 착각하는 이 삶 속에서 고통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마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천국을 볼 것이라고 하셨던가? 그리고 맘의 평안과 청정한 상태가 바로 하늘나라 라고 한다면, 예수께서는 하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하늘 나라는 너희 마음 안에 있다라고 하셨는가? 즉 우리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질 때 하늘나라는 펼쳐 지는 것.



‘진리가 너희를 자유 케 하리라’는 말씀은 바로 진리 즉 사실, 실체를 바로 아는 것이 너희를 편안히 놓여지게 하리라는 말씀인가? 왜 ‘믿음이 너희를 자유 케 하리라’ 라고 하시지 않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 케 하리라 라고 하셨는지 한번 생각 해 볼 일이다.

작성일:2018-06-29 13:36:36 121.141.151.6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