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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제해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어떻게 다릅니까? 아니면 같은 시점을 의미합니까?

닉네임
PAUL
등록일
2018-10-21 11:51:55
조회수
5921
[질문]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어떻게 다릅니까? 아니면 같은 시점입니까?

[답변] 이 질문은 성경해석을 위한 목표의 초점과 접근방법에 따라, 서로 다르다고 하는 학설과 같다고 하는 학설로 나누어집니다. 우선 본문들부터 보겠습니다.

창 1:1 (Genesis 1:1)

[개역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어] .$r,a;h; taew !yIm'V;h' tae !yhila> ar;B; tyviareB
[영어 KJ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영어AS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요 1:1 (John 1:1)

[개역성경]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헬라원어] !En ajrch'/ ἦν lovgo", kai; oJ lovgo" ἦν pro;" to;n qeovn, kai; qeo;" ἦν oJ lovgo".
[영어 KJ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NI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AS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요일 I:1 (John 1:1)

[개역성경]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헬라원어] ^O ἦn ajp! ajrch'", o} ajkhkovamen...
[영어 KJ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영어 NI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영어 AS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that which we have heard, that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that which we beheld, and our hands handled, concerning the Word of life.

(*) 창 1:1에 있는 “태초”라는 용어는 히브리 원어로 tyviareB(베레쉬트)인데, 이것을 헬라어 ἐν ἁρχᾖ(엔 아르케)로 번역했고(LXX), 거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in the beginn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를 한국어로는 동일하게 “태초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태초”(ἐν ἁρχή)라는 말은 요한복음 저자의 서신인 요한일서에는 앞프 아르케(ajp! ajrch)'"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from the beginning로 번역되었는데, 우리말로 “태초부터”입니다.

(*) 질문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용어) 자체가 시간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창세기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에서 말하고자하는 목표와 그 접근방식이 다른 것뿐입니다. 창세기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관한 것이고, 요한복음의 목표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구속(redemption)에 관한 것으로, 이 문제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어원학적인 접근(etymological approach)과 신학적인 접근(theological approach)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 어원학적 접근 (Etymological Approach)

(1) 전술한 바와 같이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는 그 용어에 있어서 다른 단어들과 달리 별로 다양하게 사용되지 않고, 거의 대부분 모든 것들(시간, 장소, 질서, 계급 등)의 시작(beginning)과 첫째(the first), 우두머리(head), 주권(sovereignty), 권세(power), 원리(principle)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것의 첫째, 처음 곧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이렇게 본다면, “태초”는 모든 것 즉 만물(피조물)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태초에 관하여는 이견(異見)이 없이 “시간”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에 관하여는 시간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영원”과 관련시켜, 시간 이전, 영원의 아득한 어느 순간(momentum)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원어에 있어서 tyviareB(베레쉬트)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는 분명히 시간의 시작의 한 지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tyviareB(베레쉬트)는 전치사 eB(베, in)와 명사인 tyviare(레쉬트, beginning)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tyviare(레쉬트)는 영어 beginning(시초), former state(이전 상태), former times(전번), 그 종류의 첫째로서 시간에 관련해서는 first fruit(초실), first born(장자)의 뜻으로, 위계(dignity)에 관련해서는 the first(첫째), chief(우두머리)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헬라어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도 전치사 ἐν(엔, in)과 ἁρχή(아르케, beginning)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ἁρχή(아르케)는 a beginning(시초), origin(기원), first cause(제1의 원인)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영원”은 헬라어로 αἰών(아이온)으로, 신학적인 의미로 존재의 기간(period of existence)을 말할 때,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life(생명), life time(생명시간), life itself(생명자체)로 영원성(eternity)을 의미합니다. 질적인 의미라는 뜻입니다. 고로 “태초”는 영원의 어느 한 지점(a point of eternity)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영원과 시간의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연속이 아닙니다. 시간은 시작(알파)과 끝(오메가)이 있지만, 영원이란 그 본질부터가 다릅니다. 본질상 시간의 무한한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초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시간과 영원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했기 때문에 영원을 시간의 연속으로 보고 구속을 논하다가 결국 구원사학파(Heilgeschichte School)로 낙인찍혔습니다. 영원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생명”(life)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시간”(timelessness)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αἰών, 아이온)이란 시간을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것,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생명”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어원학적으로 “태초”는 시간의 시작, 시간의 시작점이지, 영원의 어느 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영원과 시간은 본질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은 인간에게도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지만, 영원은 하나님에게 관련된 말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전 3:1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시간의 존재인 인간의 탈을 벗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부활의 몸”이 되어야만 합니다.

2. 신학적 접근 (Theological Approach)

(1) 신학적으로 “태초”는 창세기나 요한복음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시간의 시작점인 것과 같이 요한복음에서의 “태초”도 시간의 시작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화육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화육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던 예수님의 근본을 설명하기 위하여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ent Christ)라는 의미에서 로고스(λογός)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적 존재에, 그리고 레이마(ῥῆμα, rJhvmato" Cristou)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존재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현재적 실존뿐만 아니라, 시간 전, 즉 창세전에 선재하신 영원 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요한의 “태초”에 대한 목표(goal)와 접근방법(the method of approach)이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창조(주)에, 요한은 구속(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물론, 출발점은 동일합니다. 곧 그 출발점이 “태초”인데, 이 태초의 의미는 모세(창세기)에게 있어서나 요한(요한복음)에게 있어서 다른 지점이 아니라 동일한 지점으로서의 출발점(starting point)으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3) 그러나 그 목표(goal)에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요한은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출발점(starting point)에서 모세는 “천지창조”를 논하고, 요한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논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4) 좀 더 신학적 논리로 말하자면, 모세는 “태초”에 관하여, 창조론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요한은 구속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의미로서의 출발점인 “태초”를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모세는 그 지점(태초)에서 천지창조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진행하여 “창조역사”를 말하고 있고, 요한은 그 지점(태초)에서 시작하여, 영원 전에도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유추하여 그 분이 바로 선재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여 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려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구속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태초로부터 영원 전에도 계시고, 육신이 되어 현재 우리 가운데에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5) 다시 말하면, 모세는 “태초”가 아닌 영원의 세계에 스스로 계신 분(I AM THAT I AM, 출 3:14)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yhila)께서 영원, 즉 창세전에 신의 회의(Divine Council)에서 내적교통(intra-communication)을 통하여, 가지고 계셨던 창조의 컨셉(concept)을 의논하시고, 이 프로젝트(project)를 가지고 창조를 시작하신 시점이 바로 “태초”인데, 이 태초마저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속한 것입니다. 이 “태초”가 창조세계와 구속세계의 출발점이 됩니다.

요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시점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 비로소 계셨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계셨다”(ἦν)는 단어는 미완료형(imperfect)의 부정과거로, 자존의 영구성, 영원성을 나타내는 말로, 영원 전뿐만 아니라, 그때로부터, 태초라는 시간의 시점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태초가 창조되기 전에서부터 계신 분으로, 창조의 시점인 “태초” 바로 그 때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존재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계시론적 차원에서 개진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미 전제하고 있는 말씀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계시론적 차원에서 언급하는데, 이것이 성경계시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그의 나타내심, 즉 하나님의 계시의 차원에서 다루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태초”라는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운동이 시작되었고, 구속운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으로서의 “하나님의 시간” (God's time)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시점, 즉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태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출발점이 되는데,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이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만을 내다보며 하나님의 구속사건의 근원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구속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과 그의 구속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이 하나님의 창조운동과 구속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starting point)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며,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본질(근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빌 2:6).

(6) 다음으로 요한일서의 태초도 역시 동일한 “창조의 시점”으로 생명의 말씀의 현존하신 시점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로 계신 분으로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자이신 그리스도(계 1: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요 1:1~2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는데, 말씀이 계신 동일한 시점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고 하셨고, 그 때가 곧 “태초”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창세전 영원히 계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셔서 그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시점이 곧 창세기의 태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재하신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만물을 창조하신 그 시점이 태초로, 바로 그 때에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요 1:3).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일서 1장 1절 본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 말씀은 창세전에 있던 생명의 말씀(선재하신 그리스도)이 창조 시, 즉 태초부터(창조하신 그리스도) 계셨고, 재창조시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성육하신 그리스도)로 이 모두가 동일하신 그리스도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서의 그리스도(계 1:4, 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여기서 특히 창조 시인 태초부터, 즉 역사 속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본문에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실,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ing Christ)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하셔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시고 몸소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결 론 (Conclusion)

(1) 창세기의 “태초”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 역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 자체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태초에”(έν ajrch)이거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pro; to;n kovsmon) 말씀이 계셨다거나 “창세전에”(pro; to;n kovsmon)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는 창조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태초에”(έν ajrch)와 “태초부터”(ajp! ajrch'")라고 언급한 것입니다.(cf. 요 17:5, 24; 엡 1:4; 마 13:35, 24:21, 25:34; 눅 11:50; 요 9:32; 롬 1:20; 엡 1:4; 벧전 1:20; 계 13:8).

(2) 창세기에서 모세는 “태초”라는 시점에서 천지창조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같은 “태초”라는 시점에서 삼위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을 바라보며, 그 근본으로부터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한 요한일서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우리가 처음부터(구약과 신약시대) “들은 바요,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해서 성육하신 성자의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창조론에, 요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구원론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같은 시점인 “태초”이지만, 모세는 그 태초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요한은 그 태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세계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모세는 태초에서 창조세계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은 태초에서 말씀(λογός)이신 하나님(!yhila)으로 선재하셨던 그리스도로부터 성육하신 구속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방향, 즉 양면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전문용어로 “절대성의 태초”(Absolute Beginning)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태초와 요한의 태초는 동일한 것으로 전개방향과 목표가 다를 뿐입니다.

(4) 결론적으로, 모세가 사용한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이 사용한 요한복음의 태초는 같은 시점으로 “시간의 시작”(the beginning of time)입니다. 단지 그들이 의도하고 있는 목표(goal)와 전개하는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모세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요한의 목표의 초점은 구속(redemption/salvation)에 있기 때문에, 접근방법과 진행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태초에 관한 도표해설

<태초>

[창세기]

(영원) 창세전 .................................... ⇢ 창조 .......................⇢ 창세후 역사 (종말)
창세전에 계신 하나님이 ................ ⇢ 태초에 창세에 계셔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 (종말)

[요한복음]

(영원) 창세전 ⇠그리스도(선재) .................... ⇢ 구속 그리스도(화육) ⇢ 예수 ............ ⇢ (종말)
창세전에 계신 그리스도가 ............... ⇢ 태초에
(창세에)도 계심 창세전 영원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 ⇢ 말씀이 계속해서 존재해 오시며 바로
계시니라 창세, 즉 태초에 계셨다는 뜻
(선재의 X가 창조 시에도 계심)
......................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
계셨으니 (창세전에) 께서
................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
(요 1:1)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요 1:14) (성육신) (신약시대)


<>[요한일서]

(영원) 창세전 ⇠ ................말씀/그리스도 구속 그리스도(화육)⇢ 예수 ⇢............ (종말)
창세전의 생명의 말씀 ............... ⇢ 태초부터
창세부터 ...........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성육하신 그리스도)

<태초>

[참고]
장부영 박사 저서, CLC 출판사 발행 [성경난제 해석과 방법론]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전국, 해외 서점들, 그리고 인터넷에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작성일:2018-10-21 11:51:55 107.184.1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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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eplan 2018-11-09 00:21:50
창세기는 창조의 시간
요한복음은 말씀이 존재하는 시간의 관점인데
공간과 함께 시간도 창조된 것으로 본다면
어그스틴도 동일한 견해입니다만
요한복음이 앞서는 것으로 볼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