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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과 정원을 가르치신 하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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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헌옥
등록일
2008-01-15 15:18:12
조회수
4577
그때가 1973년이었던가 보다.
신학교 1학년 입학은 했지만 아직 대학생이라 맡은 교회가 없었다. 방학이 되었는데 갈 곳이 없었던 나는 교실 한 칸을 숙소로 내준 학교의 배려로 몇몇 학생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

신학교 도서관에 예쁘장한 사서가 있었다.
그녀는 점심때를 이용해 나에게 참 친절(?)하게 탁구를 가르쳐 주었다. 혈혈단신으로 남는 것은 시간인지라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탁구만 배우고 있었다. (다른 생각은 마시라)

어느 날 그녀는 오늘 점심때는 탁구를 못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도례 교수가 해수욕을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보고 거기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내심 반가워서 그러자고 했다.
약속 시간에 나갔다.
사서와 둘이 기다리고 있는데 하도례 교수가 승용차를 몰고 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교수로 승용차를 가지신 분은 거의 없었던 때라 오늘 호강 좀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승용차에는 하도례 교수의 두 아들이 타고 있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꼬맹이들이었다.
사서는 앞자리에 앉고 내가 뒤에 타려고 했다.
그러자 하도례 교수
"오, 노, 안 됩니다"
"네?"
너무 황당했다.
사서가 그렇게 약속한 게 아니었던가?
그 사서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어찌할줄 몰라하고 있었다.
나는 왜 안되는지 물었다.
"정원 초과입니다"

승용차는 4인이 정원이라는 것이다.
아니 우리나라는 성인도 5명이 타는데 4인이 정원이라니....
그것도 꼬맹이 둘인데....
사서는 나와 약속을 했다면서 시내로 나가는 것도 아니니
같이 가면 안 되겠냐고 했지만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도 갈 수 없다고 하자
"당신은 나와 함께 간다고 약속을 했고 아이들도 그 약속을
알고 왔기 때문에 가야 한다"라면서 기어이 나를 떼어놓고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황망하게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기는 미국도 아닌데.... 하면서....

그때는 참 야속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내놓고 보니
그날 그는 약속이라는 것과 정원이라는 것을
똑똑히 가르치는 선생이었던 것이다.
작성일:2008-01-15 15:18:12 211.244.3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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