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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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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같은 걸음으로”(사사기 8:22-35)

닉네임
조동천
등록일
2008-02-05 18:16:51
조회수
5681
“끝까지 같은 걸음으로”(사사기 8:22-35) 說敎/趙東天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

오늘 말씀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 중 ‘초발심’(初發心, the attitude you started with)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줄여서 ‘초심’이라고 합니다. 처음의 마음 가짐을 가리킵니다. 특히 수행자들에게 요청되는 것이 초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처음 도(tao)를 찾아 나섰을 때의 마음 가짐으로 일관되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관록이 생기고 권력을 얻고 지위를 얻게 되면 초심이 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심을 지키자’라는 말은 이제 일반인들이 흔히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변질된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면,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번 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해밀톤에 방문하여, 저의 초심을 돌아보는 계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사 기드온의 초심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사사기 7장과 8장을 잘 읽어 보면, 전쟁을 시작하면서 기드온이 점차 마음의 초점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이 진실로 자신을 불러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거듭 거듭 증거를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너무 소심하다 싶을 정도로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냈으며, 자신과 함께 하시고,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경로로 확인한 다음에야, 기드온은 전쟁에 나섭니다. 전쟁을 시작할 때, 기드온의 마음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나팔과 횃불과 빈 항아리로써 손에 피 한 방울 뭍히지 않고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다음부터, 기드온의 마음은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승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조금씩 높아져 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통해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결코 자신의 공이 아님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자 사람들이 자신에게 환호하고 추켜 세웁니다. 그것이 전혀 싫지 않습니다. 아니, 점점 그것을 탐하게 됩니다.

그 증거가 8장에 기록된 추격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기드온의 군대는 도주하는 미디안 사람들을 추격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는 군인들에게 지원할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추격해 나가는 동안 군량미가 떨어졌습니다. 숙곳이라는 지방을 지날 때, 기드온은 그 주민들에게 군량미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숙곳 주민들은 그 전쟁에 끼어 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전쟁이 어떻게 결말이 날 지 모르는데, 어느 한 편을 들었다가 나중에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기드온이 한 말이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르는 군인들이 지쳤으니, 그들에게 빵 덩어리를 좀 주십시오. 나는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숙곳 사람들의 그 요청을 거부하자, 기드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7절입니다. “좋소! 주님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나의 손에 넘겨 주신 뒤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당신들의 살을 찌르고야 말겠소.” 나중에 브누엘이라는 동네에 가서 똑 같은 요청을 하는데, 그 지역 주민들도 역시 돕기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9절입니다. “내가 안전하게 성한 몸으로 돌아오는 날, 이 망대를 헐어 버리고 말겠소.”

제가 인용한 기드온의 말에서 ‘나’라는 말이 얼마나 강조되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 자신의 입지를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승리를 거듭할수록 기드온의 자아는 강해지고 커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의사결정을 하던 기드온이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의 판단에 따르는 일이 빈번해집니다.
나중에 기드온은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미디안의 군대를 모두 섬멸시킵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개선하는 길에 숙곳에 이르러 복수를 합니다. 전에 협박했던 그대로 일흔 일곱명의 지도자들을 포로로 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응징했습니다. 인간의 잔인성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앙심이 사무친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들가시와 찔레로 보복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는 사람답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기드온은 도움을 주기를 거부했던 브누엘로 찾아가서 망대를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모두 학살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이 스스로 알아서 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드온이 초심을 잃고 점차 망가져 가는 과정을 봅니다. 미디안 백성들의 잔인한 학대에 시달려 숨을 쉬지 못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기드온을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해방 전쟁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악으로 악을 징벌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악입니다. ‘정당 전쟁’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더 크고 지독한 악을 제거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차선의 악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칼과 창이 아니라 횃불과 나팔과 빈항아리를 도구로 사용하여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드온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한 정도에서 전쟁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신의 욕심과 앙심을 발동하여 끝장을 보려 했습니다. 쫓겨 도망가는 적들을 따라가서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살륙했고, 돌아오는 길에 애꿎은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보복했습니다. 기드온이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았더라면, 이같은 잔인한 학살과 복수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쟁이 모두 끝난 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22절입니다. “장군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 주셨으니,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기드온이 아주 멋진 대답을 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와싱턴의 일화가 생각나는 대목이 아닙니까?

조지 와싱턴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입니다. 그만큼 조지 와싱턴은 위대한 전술가였고 또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랬기에 독립 전쟁이 끝난 후, 조지 와싱턴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볼 때, 와싱턴이 이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탓할 사람도 별로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반기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지 와싱턴은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미국은 영국과 달리 민주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자손들이 두고 두고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사양한 것입니다.

23절에 나오는 기드온의 대답은 얼른 보면 조지 와싱턴의 결단처럼 위대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을 보면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야 한다고 말하고 물러 난 기드온은, 그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얻은 전리품 가운데서 귀고리 하나씩을 헌납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금 귀고리를 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가장 먼저 손에 넣은 것이 금 귀고리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대로 했고, 기드온은 그것들을 녹여서 금 신상을 만들어 자기 동네에 모셔 두었습니다. 말로는 “오직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실제 행동으로는 우상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기드온에게는 아내가 많아서 친아들만도 일흔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첩도 여럿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살면서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기드온의 마지막을 기록한 32절의 표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나이가 많을 때까지 잘 살다가, 죽어서 아비에셀 사람의 땅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무덤에 묻혔다.” 왕이 되기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가 원하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며 수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부귀 영화를 누리면서 만수 무강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온갖 축복을 모두 누리고 원없이 살다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왕이 되어 달라는 부탁에 대해 기드온은 “오직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입니다”라는 말로 사양을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드온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 같아 보이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행동을 보면,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행동합니다. 아니, 자신을 불러내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립니다. 우상을 섬기고, 수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할 때 기드온의 마음 속에는 어떤 계산이 있었을까요?

기드온이 왕이 되기를 사양한 이유와 조지 와싱턴이 왕이 되기를 사양한 이유가 같지 않음에 분명합니다. 기드온이 나중에 취한 행동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앞 날을 위해서 왕이 되기를 사양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은 결코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되어 누리게 될 권리보다 왕으로서 져야 할 책임이 더 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많은 희생과 수고와 헌신과 손해를 요구하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기 싫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결과, 기드온은 하나님을 섬기기에 거북할만큼 자아가 커졌습니다. 그 자아를 포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사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지만,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우상은 그에게 제대로 살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묵묵히 앉아서 자신의 요구만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비하면 그 우상이 얼마나 섬기기에 편합니까?

기드온은 왕이 되기를 사양했지만, 그는 실제로 왕처럼 살았습니다. 그가 사는 동네에서 그는 왕처럼 받들어졌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면서 살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은 누구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막강한 권력으로 무소불위의 권세(almighty power)를 누렸습니다. 그 누구도 기드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민족들도 기드온이라는 이름 하나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는 거칠 것 없이 방탕하게 살다가 만수를 누리고 죽습니다. 왕으로서 담당해야 할 책임은 고스란히 반납하고,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권력은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것이 기드온의 선택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지혜로운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후반기 인생 이야기를 통해 번영과 승리와 성공과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추구하며 분투하고 있는데, 그것이 까딱 잘못했다가는 우리의 초심을 변색시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고, 만사형통하며, 하는 일마다 대박이 터지면, 정말 행복해질 것 같지만, 실은 그로 인해서 우리의 자아가 커지고, 마음은 부풀어 오르고, 눈은 높아지며, 발걸음은 공중에 뜨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넘어지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한 번 넘어지면, 그 넘어짐의 상처는 실로 크고 깊습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또한 우리의 교활한 본성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우상을 숭배를 더 좋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찌 보면 성가신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살고 싶은 대로 살도록 놓아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양심을 끊임없이 깨우셔서 의롭고 바르게 살도록 촉구하십니다. 하지만 우상은 어떻습니까? 우상은 우리에게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앉아서 우리에게 복이나 빌어 줄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타락한 욕심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택합니다. 그것이 기드온의 선택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또한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거부하고 권리만 추구하는 우리의 본성을 잘 보여줍니다. 희생과 헌신과 봉사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자신의 이권과 욕심과 권리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 모릅니다. 기드온은 왕처럼 떵떵 거리고 살고 싶지만, 왕이 짊어져야 할 책임은 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드온과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권리에 대해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사실, 기드온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꽤 정직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폭력으로 권력을 거머쥐고는 그 권력의 특권만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자기의 완력으로 왕이 되려 하지도 않았고, 왕위에 앉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편을 사양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최소한의 믿음 때문에 그렇게 막 나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이 얻은 권력과 금력으로 왕처럼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타락한 마음에 스며 있는 부정한 욕심입니다.

장로가 되어 권리가 커지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권세가 강해지며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교회의 직분을 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럴 마음으로 직분을 탐하는 것보다는 기드온처럼 차라리 직분을 사양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은 선택은 직분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되 낮아지는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직분을 받고 나서, 그 직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헌신과 봉사와 희생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모두 이런 마음으로 앞에 서시기를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섬기시는 모든 직분자들이 오늘의 말씀 앞에서 이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의 직분을 통해 더 낮아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려는 기꺼운 마음 자세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을 세우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책임을 지라고 직분을 주십니다. 더 많이 군림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섬기라고 직분을 주십니다. 더 많이 주장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순종하라고 직분을 주십니다. 그렇게 직분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이렇게 하기를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높아지기를 바라고 모두 다 다른 사람을 딛고 올라서기를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이 말은 승진의 기회를 거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직책을 맡는 것에 주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기회가 오면 겸손하게 받아서, 그 직책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모두 다 자신의 이익과 권리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적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도 자신의 책임을 먼저 생각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모두 다 개인적인 이익만을 셈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적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이라도 더 큰 목적을 위해 살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찌보면 기드온은 하나님을 반만 믿은 듯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줄로 믿었고, 하나님 무서운 줄도 알았고, 하나님의 기대가 어떤지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기대를 채우기를 싫어했습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자신의 야심대로 살기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더 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갔지만, 하나님께로부터는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불쌍한 삶을 살았습니다. 시작은 잘 했지만, 초심을 끝까지 가지고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앞으로 우리는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는 과연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끝까지 초심을 지키고 번영과 승리와 성공과 승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책임을 기꺼이 지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의 성공과 번영과 인정과 높임에 현혹되지 않고 끝까지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신실함이요,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신실함에 있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일관되게, 한결같이 섬기시는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교우들께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 이 길에서 성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어떤 번영과 성취와 승진과 대박에도 변개하지 않는 순결한 믿음에 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믿음으로써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관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의 승리자들로 기억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축복하옵소서!

(Jan,13,2008, 빛고은 설교말씀)
작성일:2008-02-05 18:16:51 67.109.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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