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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유산” (사사기 9:50-57)

닉네임
조동천
등록일
2008-02-05 18:19:27
조회수
5210
“영원한 유산” (사사기 9:50-57) 說敎/趙東天
(Enduring Legacy)

여러분은 휴 헤프너(Hugh Hefner)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플레이보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회사의 사장입니다. 그는 올 해 82세의 나이에 여전히 젊음을 과시하며 미녀들을 병풍처럼 두르고 다닙니다. 혹, 여러분은 도날드 트럼프(Donald Trump)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뉴저지에 있는 유흥도시 아틀랜틱 시티(Atlantic City)가 거의 이 사람 거라고 합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거칠 것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면, O. J. 심슨( Simpson)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풋볼 영웅으로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그 돈의 힘으로 자기 욕심껏 세상을 깔보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같은 사람들이 신문이나 방송에 나와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적인 태도를 보일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뭔가,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느낌, 뭔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느낌, 이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는가 하는 느낌은 저만의 느낌입니까?

이와 비슷한 느낌을, 우리는 기드온의 후기 생애 이야기를 읽으면서 받게 됩니다. 그는, 적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던 막강한 위세와 권력과 금력을 사용하여 왕처럼 살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은 모두 손에 넣었고,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구할 수 있었으며, 하고 싶은 일은 아무 일이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거칠 것 없이 호의호식하면서 만수무강을 누렸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았습니다. 악에 악을 쌓고 살았지만, 그를 어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라도 그를 징벌해 주셨어야 했는데, 그의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그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은 기드온의 말년의 생활을 보면서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저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은 아직도 기드온을 보호하고 계시단 말인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사람이 저렇게 오만방자하고 방탕하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기드온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하나님은 어찌 그를 벌하지 않으시는가? 혹시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아닌가? 당신의 종으로 택하여 썼던 사람이 저렇게 사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가?” 오늘날 사사기를 통해 기드온의 이야기를 읽는 저희도 역시 그런 의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기드온의 당대만 보아서는, 그의 현세만 보아서는, 그의 물질적인 상태만 보아서는, 그리고 그가 누렸던 쾌락의 양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면,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좀 더 크고 넓은 안목으로 기드온의 이야기를 다시 보면, 그가 만수무강하며 누렸던 부귀영화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기드온의 자녀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사사기 9장은 기드온이 첩에게서 얻은 아들 아비멜렉의 이야기인데, 그로 인해 기드온의 가문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서 완전히 몰락합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고 참혹하게 말입니다.

기드온이 첩에게서 얻은 아들 아비멜렉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히브리어로 ‘아비’는 ‘나의 아버지’라는 뜻이고 ‘멜렉’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은 전쟁이 끝난 후 왕이 되어 달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청을 사양하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가 세겜에서 얻은 첩을 통해 아들을 얻었을 때, 그 이름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이 이름을 지으면서 기드온이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들아, 네 아비가 누군줄 아느냐? 네 아버지는 왕이니라!”

어떤 임씨 성을 가진 선배가 한 분 계십니다. 어릴 때부터 장난기가 심했던 그분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자 이름을 ‘금님’이라고 지었습니다. 아이 이름 가지고 장난하지 말라고 다들 말렸는데, “임금님처럼 키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그대로 호적에 올렸습니다. 그 이름을 가지고 그 아이가 장차 학교에서 당할 놀림을 어떻게 소화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어릴 때 이민을 와서, 지금은 뉴욕에 살고 계십니다. 미국식으로 ‘금림 림’하면 아무도 그 뜻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한 민주국가였으니 망정이지, 만일 왕정국가였다고 칩시다. 임금이 다스리고 있는 시대에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식의 이름을 ‘임금님’이라고 지었다면, 그 가족과 친족은 반역죄로 몰려 죽임을 당했거나 귀양을 갔을 것입니다. 이름에 ‘왕’자를 붙이는 것이 이렇게 심각한 일입니다.

자라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아비멜렉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는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잘 양육된 사람이었다면, “그래, 내가 왕의 자식처럼 처신해야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9장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아비멜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약무도하게 자랐고,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내 아버지가 왕이시니, 나도 왕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욕망을 키웠을 것입니다. 그도 역시 아버지처럼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며 세상을 호령하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첩의 자식이요, 아버지의 정실 아들만 해도 일흔 명이나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권력을 얻을 방도가 없어 보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이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고 싶어서 고향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기왕이면 자기 동네 사람이 자신들을 다스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아비멜렉에게 비자금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자 그는 고향 사람들이 준 비자금을 사용하여 불량배들을 사들여 군대를 조직합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집으로 쳐들어가 아버지의 아들들을 모두 살해합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학살로부터 오직 한 사람, 요담이라는 아들만이 살아남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정실 자식들로부터의 보복의 위험이 사라지자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을 3년 동안 다스리는데,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세겜 사람들의 신망을 모두 잃어 버립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겠습니까? 그는 보고 들은 대로 아버지 기드온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문제는 그는 아버지와 달랐다는 데 있었습니다. 아버지 기드온은 신화적인 전승으로 인해 아무도 그를 대항해 싸울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아비멜렉은 잔인한 학살자요 패륜아에 불과했습니다. 그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권력을 잡은 지 3년 만에 비참하게 망하고 맙니다. 오늘 읽은 사사기 9장 50절부터 57절은 그의 비극적인 종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어느 아낙네가 내려 던진 맷돌 윗짝에 맞아 큰 부상을 당한 아비멜렉은 부관에게 자신의 목숨을 끊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여인에게 죽었다는 수치는 피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차이란 말입니까? 결국 아비멜렉의 죽음으로써 기드온의 가문은 그가 죽은 지 불과 몇 년만에 비참하게 몰락하고 맙니다.

기드온 개인만을 본다면, 기드온이 살던 당대만 본다면, 그리고 현세에서의 삶만을 본다면, 기드온은 과연 세상 모든 축복을 거머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기드온의 오만방자한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드온 한 사람은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행복은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기드온의 당대만이 아니라 그 후대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남긴 정신적인 유산으로 인해 그 많은 자손들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는 정말 불행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현세에서 왕처럼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탕진한 악한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왕이 되기를 사양하고 왕처럼 살려 했던 그의 선택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선택을 우리는 ‘개인주의적인 선택’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것이 개인주의입니다. 그에게는 아내도, 자식도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한 도구일뿐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 되어도 그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굶고 살아도 내 창고에 먹을 것이 쌓여 있으면 아무 걱정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흔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장차 어떻게 살아갈지, 그 많은 처첩들이 장차 어떻게 살아갈지, 그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있었을뿐입니다.

기드온의 선택을, 우리는 또한 ‘물질주의적인 선택’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습니다. 물질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는 생각이 물질주의입니다. 그는 사사로 부름받았을 때,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칼과 창보다 횃불과 나팔과 항아리가 더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그는 물질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에 관심을 두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물질에 묶여 있었습니다. 전쟁을 끝내자 마자, 그는 하나님을 등지고 물질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물질 안에 행복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질이 주는 행복에 탐닉해 살았습니다.

기드온의 선택을, 우리는 또한 ‘현세주의적인 선택’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이 세상밖에 없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믿는 태도를 현세주의라고 부릅니다. 그의 행복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현세를 포함하는 더 넓고 영원한 세상,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오직, 어떻게든 오래도록, 어떻게든 건강하게, 어떻게든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다행이라 할 지 불행이라 할 지 몰라도, 그는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기드온이 선택한 개인주의, 물질주의, 현세주의는 그의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대물림되었습니다. 8장에 보면,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서 기드온이 얼마나 부주의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포로로 잡은 기드온은 맏아들 예델에게 칼을 주고는 두 왕을 찔러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8장 20절을 보면, “그는 아직 어리고 두려워서 칼을 뽑지 못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기드온은 어린 아들을 강인한 용사로 키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명령이 어린 아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될 수 있었을지, 그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비멜렉이 저지른 폭행도 알고 보면 기드온이 물려준 정신적인 유산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눈에도 아버지가 누리는 물질적인 행복이 부러워 보였습니다. 그도 역시 누구를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행복을 위해 물질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은 현세에서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오래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이복 형제들을 몰살시켰고, 자신의 욕망을 위하는 일이라면 닥치는대로 행동했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기드온이 신봉했던 개인주의, 물질주의, 현세주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에 와서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분투하는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기드온의 철학은 아주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이 철학이 우리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작게는, 어떻게 해서든 나만 잘 살아 보자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우리들에게도 없지 않습니다. 말로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이민 왔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진실로 자녀들에게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자녀들을 통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미국에 올 때는 모두, 한국의 입시 지옥을 벗어나 자녀에게 전인적인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옵니다만, 어느 사이에 우리 이민자들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한국에서보다도 더 치열한 입시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조금 크게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우리 가족만 혹은 우리 한인들만 잘 살아 보자는 생각이 우리에게도 뿌리 깊습니다. 내가 고용한 종업원들을 착취해서 내 수입이 많아지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면, 우리도 기드온과 별로 다를바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고치지 않는 한, 앞으로 10년 혹은 20년 후, 한인들이 다른 민족들로부터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다른 민족이야 어찌되든, 이 사회야 어찌되든, 우리만 돈 만이 벌어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다 잘 되어야 그 안에 있는 나도 잘 될 수가 있습니다.

기드온의 물질주의와 현세주의도 역시 우리 한인 이민자들의 의식 속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조국을 떠나 낯선 땅에 와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어떻게든 많은 물질을 손에 잡아야 안도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심리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심리적인 질환을 알아차리고, 물질로부터 해방되기를 힘써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마치 이 땅에서의 목숨이 전부인 것처럼, 악착같이 물질을 긁어 모으려고 힘쓰고 있습니까? 믿음의 수준은 물질로부터의 해방된 정도에 비례하는 것인데, 믿음의 수준이 손에 잡은 물질의 양에 비례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이 개인주의, 물질주의, 현세주의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인 2세들은 1세 부모 세대에 대한 존경심이 낮기로 유명합니다. 부모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하려는 경향이 2세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모들에게서 본 개인주의, 물질주의, 현세주의만큼은 그대로 모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1세 부모들이 그같은 사고방식에 물들도록 2세들을 키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원하는 장난감이면 무엇이든지 사다 바치지 않습니까?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인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주는 선물과 옷가지들을 보면, 모두 아이들을 임금님으로 키우려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운전면허를 따자 마자 최고급 승용차를 사서 안깁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최고급을 선택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정신과 영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공부를 시키는 데에는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으나, 신앙을 키우고 인성을 키우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합니다. 우리 한인 부모들은, 마치 기드온이 칼을 빼는 일에도 서투른 아들에게 포로로 잡은 미디안의 왕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처럼, 그렇게 자녀들을 기르고 있지 않는지, 심각하게 반성할 일입니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 출신의 사회학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동양계 이민자들의 2세와 3세의 생활에 대한 연구 조사를 했습니다. 그 연구 조사에 의하면, 2세 한국인들이 다른 동양계 이민자들과 비교할 때 약간 우수한데, 3세 한국인들은 다른 동양계 이민자들의 3세에 비해 떨어진다는 보고를 내놓았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중퇴율이나 알코올이나 마약(drug)에 빠지는 비율이 한국인 3세에 이르면 매우 높아진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수 대학교 즉 Ivy League 대학교에 진학하는 비율도 그렇다고 합니다. 2세 한인들의 진학률에 비하면 3세 한인들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볼 때는 1세로부터 대물림된 개인주의, 물질주의, 현세주의적 가치관이 제일 큰 요소인 것 같습니다. 1세 이민자들은 이같은 가치관에 물들어 있지만 이곳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집념 때문에 심하게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2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뛰어난 머리와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과 좋은 교육 덕택에 많은 물질을 거머쥐고 왕처럼 살게 됩니다. 믿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1세들은 돈 벌기에 바빴지만, 2세들은 돈 쓰기에 바쁩니다. 이들이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와 현세주의의 썩은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그나마 2세들은 1세 부모의 눈치라도 봅니다. 3세로 가면, 이제는 완전히 이 썩은 물에 잠겨 버립니다.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즐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의 목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후반기 인생 이야기를 통해 번영과 승리와 성공과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추구하며 분투하고 있는데, 그것이 까딱 잘못했다가는 우리의 초심을 변색시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고, 만사형통하며, 하는 일마다 대박이 터지면, 정말 행복해질 것 같지만, 실은 그로 인해서 우리의 자아가 커지고, 마음은 부풀어 오르고, 눈은 높아지며, 발걸음은 공중에 뜨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넘어지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한 번 넘어지면, 그 넘어짐의 상처는 실로 크고 깊습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또한 우리의 교활한 본성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우상을 숭배를 더 좋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찌 보면 성가신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살고 싶은 대로 살도록 놓아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양심을 끊임없이 깨우셔서 의롭고 바르게 살도록 촉구하십니다. 하지만 우상은 어떻습니까? 우상은 우리에게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앉아서 우리에게 복이나 빌어 줄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타락한 욕심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택합니다. 그것이 기드온의 선택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또한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거부하고 권리만 추구하는 우리의 본성을 잘 보여줍니다. 희생과 헌신과 봉사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자신의 이권과 욕심과 권리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 모릅니다. 기드온은 왕처럼 떵떵 거리고 살고 싶지만, 왕이 짊어져야 할 책임은 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드온과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권리에 대해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사실, 기드온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꽤 정직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폭력으로 권력을 거머쥐고는 그 권력의 특권만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자기의 완력으로 왕이 되려 하지도 않았고, 왕위에 앉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편을 사양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최소한의 믿음 때문에 그렇게 막 나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이 얻은 권력과 금력으로 왕처럼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타락한 마음에 스며 있는 부정한 욕심입니다.

이민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 사실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두 아이를 기르는 부모로서 저는 기드온의 자손들의 비극적인 이야기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으며,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마주서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내 아이들이 나에게서 보고 배운 삶의 방식이 두고 두고 아이들에게 유익하게 작용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썩은 물 웅덩이 속에서 허우적 거리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저희 형제들에게 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대는 우리 대보다 나아야 한다.” 이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는 부모님 대보다 저희 자식 대가 훨씬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진정으로 바란 것이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현세에서 성공하여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소망도 있었겠지만, 그분들의 소망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이었다고 믿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만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과 육적인 건강, 그리고 바르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까지 다 포함한 소망이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저희 형제들은 부모님의 소망을 아직 완전히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제가 부모님에게 받은 가장 큰 유산은 믿음의 유산이었습니다. 제가 부모님 덕에 좋은 교육을 받고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다 하더라도, 만일 믿음의 유산이 없었다면, 그 좋은 교육과 그 많은 유산 때문에 저는 지금 타락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거나, 헛된 것을 잡으려고 분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부모님께서 기대하신 것만큼 공부를 잘 하지도 못했고, 부모님으로부터 물질적인 유산을 넘겨 받은 것도 없지만, 두 분이 전해 주신 믿음의 유산 그리고 두 분이 전해 주신 정신적인 유산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하였으며, 그 믿음 덕분에 오늘의 분복에 자족하며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저도 이 유산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유산. 그 말씀의 빛을 따라, 개인주의적인 관심을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의 유산. 물질에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그리고 정신에 희망을 거는 삶의 유산.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고 살아가는 삶의 유산.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그 나라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의 유산. 바울이 말한대로,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는 것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유산. 그런 유산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그런 유산이라면, 저의 자녀들이 두고 두고 참된 행복을 누릴 것이며, 다른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물질적인 유산은 물려주기 쉽습니다. 자식도 물려 받고 싶어합니다. 서명 몇 번만 하면, 소유권을 이전시켜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물려주기를 바라는 이 영원한 유산, 이 참된 유산은 서명 몇 번으로 소유권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좀처럼 이 유산의 값어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이 유산을 물려줄 방도가 없습니다.

방법은 우리 부모 세대가 그렇게 살아가면서 물질에 빠져 있는 삶보다 영적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그렇게 살아, 나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보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그렇게 살아,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복된 삶인지를 보이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체험하여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부모라고 해서 자신의 믿음을 자녀에게 대물림 할 수가 없습니다. 자녀가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도록 돕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 자녀들의 신앙 활동을 위해 더 열심히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학원에 보내는 일에는 열심을 내면서, 교회에 데리고 오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주일 한 시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매일 매일 기도와 말씀 읽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소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Ivy League 대학교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이 문제를 두고 진지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를 청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유산을 물려 주었습니까? 앞으로 어떤 유산을 물려 주려 합니까? 혹시나 물려줄 것이 물질 밖에 없다면, 차라리 유산 상속을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 모릅니다. 그 유산을 선교나 구제를 위해 헌납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물려 주어야 할 유산은 보이지 않는 유산입니다. 그 유산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에게 없는 유산을 어떻게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 보십시다. 우리가 혹시 기드온과 같은 가치관과 삶의 방법을 물려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두고 두고 우리의 자녀들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할 영적, 정신적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지요?
작성일:2008-02-05 18:19:27 67.109.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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