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자유게시판

제목

내 사랑하는 믿음의 청년들에게 (행복한 삶을 고민하는 당신에게)

닉네임
이주민
등록일
2020-04-15 14:55:15
조회수
527

코로나에 핍박 받은 부활절, 차가운 카메라 몇 대에 둘러싸여 드린 부활절 예배는 참 낯설었다. 온라인 예배를 폄하 할 생각은 없다. 교회개혁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숨길 수 없다. 울적한 마음에 뉴스를 뒤적이다 연세대 의대생인 가난한 막노동자 딸의 사연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빠는 랍스터 앞에서 펑펑 울었다.” 의대생 딸 때문에 나아진 형편에 처음으로 랍스터를 사주는 막노동꾼 아버지는 미안해서 울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홀아비 인생을 참고 살아준 아버지를 보며 딸들도 울었다. 나도 글을 읽으며 함께 울었다.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이런 가족들이 있는 나라는 희망이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청년들이 묻는다. 죽일 것처럼 싸우다가 금방 아무렇지 않게 사는 부모를 보면서 “난 결혼 안해! 절대 엄마, 아빠처럼 안 살거야! 난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거야!“ 그렇게 답한다. 나는 중학교 때 출가?했다. 공식적인 가출이었으니 멋있게 출가라고 하자. 빡빡머리 사춘기 중학생은 집안 꼬라지도 공부도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냥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제과점 시다바리로 취직해 다섯 평짜리 빵 공장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쏟아내는 스텐 그릇들을 씻고 또 씻었다. 차별과 강요, 미움과 권모술수, 위선으로 가득한 다섯 평짜리 빵 공장은 부조리한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좋은 것을 좋다고,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항구보다 낫겠지 생각했던 인생의 푸른 바다 저쪽에는 조각배의 꿈을 삼키는 시커먼 자본주의 괴물이 살고 있었다.



나는 요즘 고민이 많다. 남쪽 바다 마산에서 배운 시골 사람 신앙과 서울 사람 신앙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시골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금 정권은 참 나쁜 사람들인데 똑똑한 서울 사람들은 안 그런가 보다. 동성애 축제를 지원하고, 무신론 사상에 동의하고 미투로 성 문제가 터져도 웬만한 이슈로는 휴머니즘 좌익 사상을 흔들기에 턱도 없다. 내가 성경을 잘 못 배운 건지, 내 신앙이 잘못된 건지 고민이 많다. 갈릴리 시골길 따라 가르치셨던 주님도 같은 생각이실까? 고민은 더 깊어진다. 그래서 사회주의 사상에 열광했던 19세기 도스토예프스키의 눈으로 지금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가난한 대학생 라스꼴리니코프는 현실의 불합리를 혁명하려는 무신론 청년이다. 그는 약자의 행복을 뜯어먹는 자본주의 괴물전당포 주인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다. 어느 날 그는 집안을 먹여 살리기 위해 창녀가 된 쏘냐를 만나게 되고 연속된 불행과 불합리한 세상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하나님을 믿는 쏘냐의 영혼에 갈등한다. 몸이나 파는 여자라고 생각한 쏘냐를 통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위대한 혁명의 정신보다 보잘것 없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초라한 영혼을 발견한다. 마침내 그는 죄를 고백하고 시베리아의 감옥에서 참 자유를 얻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영혼이 주는 행복과 기독교적 사랑의 실체를 보여준다. 무신론적 휴머니즘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행복이 뭘까? 혁명은 행복을 줄 수 있을까? 랍스터를 앞에 두고 울었던 의대생 가족을 생각하면서 행복은 평등한 분배가 아니라 노력을 통해 성취하는 목표라는 것을 확신한다. 사랑하는 믿음의 청년들에게 묻고 싶다. 무엇이 다섯 평 빵 공장 시다바리의 삶을 바꾸었을까? 부의 평등, 차별 없는 제도 때문인가? 아니다 분명한 목표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목표를 주셨고, 이것이 나에게 열정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취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의대생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난은 삶에 목표를 주었고, 함께 희생하고 성취하여 행복을 얻었다. 목표는 사람에게 행복을 준다. 모두가 똑같이 소유하면 행복할 거라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어떤 부자에게 랍스터는 식상한 메뉴일 수도 있지 않은가? 욕심은 채울 수 없는 구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겸손한 부자와 부끄럽지 않은 빈자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주는 곳이다.



이쯤 되면 아브라함 카이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카이퍼는 하나님 나라를 현실로 만든 사람이다. 카이퍼는 바다 근처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지만 개혁파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학을 하게 되었다. 레이든 대학교에서 ‘근대신학(Modern theology)’을 접하고 자유주의자(Religious liberal)가 되었다. 촉망받았던 자유주의 목회자의 첫 실험은 베이스트의 시골교회에서 결혼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젊은 목회자의 자유주의 신학은 곧 벽에 부딪혔다. 화석화되었다고 생각한 칼빈주의 신학이 도전해온 것이다. 칼빈주의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시골 소작농들의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다스리신다. 우리가 죄인 임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헌신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가정과 사회에서 이루어진다. 카이퍼는 지성적 사고는 만족시키지만 순수한 신앙과는 거리가 있는 자유주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소작농들의 신앙을 통해 정통 칼빈주의로 개종하였다. 19세기 후반 네델란드는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영역을 자유주의 사상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특히 젊은 엘리트들이 열렬히 지지했다. 의회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통제되었고, 보수주의자들은 미래의 흐름으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카이퍼는 목사직을 사임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전해준 순수한 신앙은 죽었고 신앙의 자유를 뺏기고 있다고 불같이 선포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시골 소작농들이 전부였지만,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다. 자유주의 정치가들은 높은 지지를 기반으로 종교적인 학교(Religious schools)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금지하고 종교 활동을 제약할 수 있는 다양한 법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카이퍼는 종교탄압을 느낀 카톨릭과 불가능한 정치연대를 만들어냈고, 1884년 하원의 다수석을 차지한다.



수상이 된 카이퍼는 암스테르담에 자유대학(Free University)을 만들어 비윤리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가짜 칼빈주의에 대항했고, 젊은 목사들을 정통 칼빈주의로 돌아오게 했다. 또한 무신론 사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를 주창해 맞서나갔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참정권을 확대하고, 반윤리적인 제국주의 식민정책을 철폐하고 ”국가의 정책은 이익보다 윤리에 기초해야 한다!“는 윤리적 국가관을 제시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지배한다는 하나님 주권 사상에 기초한 법과 정치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는 네델란드를 살린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오늘날 믿음의 젊은이들이 성경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보지 못한다면 젊은 카이퍼의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약점인 잔인한 적자생존의 법칙은 강조하고, 공산주의의 비인간적인 평등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사회주의가 타락하면 필연적으로 전체주의가 되고 종착역은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적자생존의 잔인함이 있지만 양심과 사랑의 역할을 감당하는 종교를 통해 이러한 약점이 보완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간과하지도 말고 자본주의의 밥그릇을 깨뜨리는 무신론적 사회주의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 태어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니라 (욥5:7-11)



세월이 흘러 부모가 되면 자식들 입에 밥 넣어주는 것이 고생의 대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 팔고 논 팔아 자식 뒷바라지 해 준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부모는 성공한 자식들 앞에서 운다. 나는 독재자와 군사정권을 향해 이념 투쟁했던 운동권 사람들보다 힘겨운 노동을 견디며 자식들 뒷바라지했던 아버지 엄마들의 투쟁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글을 맺는다. 행복을 고민하는 믿음의 청년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행복을 위해 살지 말고 믿음의 목표를 위해 살라는 것이다. 고교 시절 가슴을 뜨겁게 했던 S.F.C.강령은 우리의 목표를 분명하게 밝힌다. 믿음의 목표는 참 행복을 줄 것이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세상이 알 수 도 없는 행복을 가지게 될 것이다. 믿음의 목표는 세상 사람들의 목표보다 이루기가 더 어렵겠지만 정직과 성실의 돛을 달고 인내로서 경주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항해가 끝나는 어느 날 나의 행복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던 시간이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학생신앙운동(S.F.C.)강령-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및 대소교리 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을 우리의 목적으로 한다. 우리의 사명은 다음과 같다.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 우리의 생활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고신의 작은 선교사

작성일:2020-04-15 14:55:15 5.76.247.4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