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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나때 현장예배를 고수하는 교회를 보며

닉네임
오뚜기
등록일
2020-04-14 13:47:16
조회수
704

https://ohthoogi.blogspot.com/2020/04/blog-post_4.html



코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현장예배를 고수하는 많은 교회를 보게된다.

여기서 또 궁금증이 폭발한다.

그들은 뭐라고 하면서 현장예배를 주장할까?

크게 2가지 주장으로 압축되는 것 같다.



1)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예배이다.

그럼 당연히 예배의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도대체 예배라는 것은 무엇인지?

여기저기 검색해 보니 사전적 의미는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리는 것이 예배적 의미이고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 보면

진정한 예배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를 보게 된다.

진정한 예배의 정의는 대부분의 검색에서는 신령과 진정이란 단어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 행위를 위해서는 시공간을 뛰어넘음을 의미한다.

교회에서의 경배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모든 공간에서 드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안에 가두어 좁은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창조주의 하나님을 선포하기에 굳이 교회안으로 한정하지 않고 민족을 뛰어넘은 예배를 의미한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과의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예배의 장소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유대인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만을 고수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의 4장의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념처럼 떠 받쳐던 예루살렘의 예배를 허물고 계신다.

장소가 그렇게 중요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이때"라는 시간에 초점을 두고 "신령과진정"이라는 자세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도 꼭 교회에서만 예배드려야 하는가?

다음을 가정하며 이런 자들에게 묻고 싶다.

전쟁중이라고 하자. 1000명의 무리와 함께 산길을 헤치며 피난길에 올랐다.

산턱 중간에 적들이 있기에 침묵을 유지하며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

피난중에 일요일 11시가 되었다. 피난민 중에 50명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있다.

일요일 11시이니 우리의 예식대로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려야겠다며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적들에게 들켜 나머지 950명도 같이 몰살당했다.

이런 극단적 예를 제시하였음에도 그 상황이라도 예배를 드리겠다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제로 많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이 상황에서도 예배를 드릴려고 할 것이다.

옆에 죄없는 나머지 950명이 죽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그런 예배를 기뻐할까?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기 위해서 50명이 목숨바쳐서 예배 드렸고 그 중에서 나머지 950명도 같이 목숨을 바치게 만든 그 예배..

가정예배도 있고 온라인예배도 있다. 단지 불편한 뿐이다. 예배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그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인지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봤으면 한다.





2) 왜 교회만 문 닫아야 하는가?

이 주장을 하면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흔히 좌파세력의 기독교 죽이기이다.

공산주의 세력들이 득세하면서 유독 교회에 대해서만 바이러스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임시적으로 문을 닫게 한 후에 장기적인 계략으로 북한이나 중국처럼 모든 교회 문을 닫게 만든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더 논의하기 위해서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필요하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고 교회 구성원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

교회 역할은 사랑을 하고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딱 2가지이다.

여러 책들에서 교회의 역할을 3가지로 혹은 10가지 나누어 설명하지만 2가지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일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그 예배에 관한 것은 첫번째 주제에서 논의하였기에 넘어가자.

두번째 이웃사랑의 관점에서만 보자.

백화점도 식당도 문열고 영업하는데 왜 우리만 닫아야 하나?

그 항변에는 영업적인 측면에서는 동의하지만 이웃사랑의 관점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교회는 장사하고 영업하는 곳이 아니고 대중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곳이다.

그리스도가 누군인지를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는 곳이다.

선교 초기에 왜 대중들은 그리스도를 주라 받아 들였을까?

논리적인 연결이 아니라 감성적인 연결이었다.

감성이 아니라 어쩌면 감동적인 연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지 모르겠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면 당황하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까?

왜 나에게 이런 혜택을 베푸는지..

그게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어찌 궁금하지 않으랴..

이런 교회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왜 우리만 문 닫아야 하는가라고 천박하게 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내의 집단 감염이 생기면..

교회 모든 사람들이 다 자살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웃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감동이 아니라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또 예배를 거론하지 말기를 바란다. 첫번째 주제에서 이미 논했기에..

교회는 백화점도 식당도 아니고 거대한 비지니스를 행하는 대기업도 아니다.

거저 섬기고 바보같이 퍼 주는 곳이다.

제발 교회가 피해자인냥 코스프레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다가 핍박받는 것은 핍박이 아니라 인과응보이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더 나아가 섬김의 자리까지 이르렀지만 예배만으로 미움을 받을때가 핍박일 것이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공감하기 어려운데 어느 누가 공감하랴?



보수 기독교 신문에서는 연일 코르나에도 왜 예배를 강행해야 하는지를 논설로 싣고 있다.

다소 현학적인 보이는 역사적인 해석부터 짧은 주장까지..

마지막으로 변호인 영화에서 송강호의 이 대사가 떠 오른다.

"니는 니가 애국자 같나? 천만에 니는 죄없고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이다"

나에게 적용하자. 현상과 해석에 대한 통찰을 더 주의깊게 바라보자.

잘못된 신념으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났을때

애국자가 아니라 버러지의 삶을 살아왔다는 비극을 맞지 않기 위해서.

작성일:2020-04-14 13:47:16 61.76.27.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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