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셩령강림주일과 어버이주일을 동시에 맞춘설교

닉네임
황 창 기
등록일
2008-05-23 04:46:53
조회수
4975
첨부파일
 성령중심 부모자식관계.hwp (32768 Byte)
1.첨부파일을 열어보세요.

2.성령강림주일과 어버이주일을 동시에 겨냥한 설교이기에 제가 오히려 본문에서 벗어난 점이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3. 설교제목 :성령중심 부모자식관계[마15:1-9]
4. 본문과 거리가 먼 설교는 다른 곳에서 옮겨 온 두 편입니다.

=========== 이 아래가 첨부파일 내용임========

마 15:1-9에 대한

가 본문과 거리가 먼 설교

ㄱ] 제목 : 넘어지지 않도록 [15:1-3]

1.외식주의를 경계해야 함 [사 1:13, 갈 4:10-11,딤후3:5]
2.주님의 뜻을 이해해야 함 [롬 12:1-2, 엡 5:17, 마 7:12]
3.영적 교만을 버려야 함 [마 23:11, 잠 15:25, 고전 10:12]

ㄴ] 제목: 참된 경건 [15:4-9]

1.주의 말씀을 순종해야 함 [시19:7-11, 시119:105,
삼상15:22-23,딤후 3:16-17]
2.형식주의를 극복해야 함 [시1;13, 29:13, 갈 4:10-11,
롬 2:11]
3.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함 [잠 16:2, 렘 17:10, 갈 6:7-8]

ㄷ] 비평[批評]
① 이런 설교 요지를 정하기에 어렵다.
② 신령과 진정을 구원[계시]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배드리는 자의 태도 및 정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③ 기독교의 윤리 도덕은 주님의 고난과 부활로 이룩한 구원 사역에 근거하는“그러므로”의 윤리요 도덕이다. 그러나 위의 설교는 구원사역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성경 본문의 의도가 아니라 설교자의 의도대로 꾸며진 설교로 주님이 이룩하신 생명의 구속사역과 연결되지 않는, 그야말로 교장선생님이나 지휘관의 훈시와 다를 바 없다.

(4) 그렇다면 이런 설교에는 생명력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윤리도덕적인 설교가 만연한 한국교회가 불신자보다도 비윤리적이요 비도덕적인 교회가 되어 이제는‘위조복음’을 남발하고 있다고 하겠다.
⑤ 또 어떤 비평 ????

나. 통합설교 : 성령강림절 및 어버이 주일 설교

[지난 5월 11일 주일은 교회력상 성령강림주일인 동시에 우리 사회가 지키는 가정의 달의 일환으로 한국 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지켰다.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택한다면 교회력을 택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상 두 가지를 한꺼번에 충족시키는 설교를 아래와 같이 작성해 보았다. 여러 분의 비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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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5: 1-9 [사 29:9-14] 찬송 169

성령중심 부모자식 관계

서론 : 이번 주일 [오늘]은 성령강림절이고 또한 어버이 주일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이런 기간 동안만이라도 주님 앞에서 성령의 역사에 더 민감한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부모님 공경은 물론 삶의 모든 영역에 성령님을 섭섭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보다 세심한 배려가 있기를 바란다.
요지[theme]: 하나님의 말씀 따라 진솔한 삶을 살자! 예를 들어 말하자면?
1. 주님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2-6]
남의 눈을 위해서가 아니고, 순수하게 말씀 따라 모든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부모 자식 간에도 막힌 것이 없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난에 답하였다. 그들이 무엇을 비난했는가?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들의 유전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과 관습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 온 후에 점점 쌓여갔다.
이 때 예수님은 ‘너희들은 어찌하여 유전 즉 전통 및 관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고 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약 말씀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은 십계명 중 제 5계명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 20;12] ‘아비나 어미를 훼방[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출 21:17]

하는 계명을 진심으로 지키지 않았다. 대신에 잔꾀를 부려 이 부담을 피하려고 하였다. 순수한 마음보다도 눈가림으로 부모를 섬기는 체 한 것이다.
당시에 사람들이 부모 공경에 대한 부담을 피하고자 쓰는 유전[관례]가 있었다. 그 당시 쉬운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렇다,
포도 [또는 다른 과일]를 부모님께 드려야하는 처지에 있는 아들이 이렇게 변명하면 그 만이었다. : “아이고, 어머니, 아버지! 이 포도를 드렸으면 좋을 뻔 했는데, ‘하나님 앞에 바치기로 한 포도’이기에 못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드려진 선물’ [고르반; korba/n]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얼마나 외식과 형식으로 부모를 섬겼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우리 삶이 이래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이런 가식적인 삶을 산다면 0점짜리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진실이 없는 거짓된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실하지 못함을 주님이 너무 너무 잘 아시지 않는가!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 사회가 그 동안 너무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유교적인 전통이 지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부모 공경에 관해서는 성경보다는 ‘유교적인 관습’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 가정에 이런 모순들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녀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엡 6: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러니까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해야지 유교 전통대로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지 전통적인 방식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선배, 후배가 뚜렷이 너무 구분하여 양심의 자유까지 속박 받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위의 문맥적 배경 속에는 다음과 같은 5:31-32의 말씀이 있다.

(엡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남편과 아내가 부모를 떠나 서로 합하여 하나 되는 원리가 복음이 들어오는 우리 나라 초대교회부터 바로 실천되기 어려웠다. 당시 사회에 유교 사상과 무속 신앙에 물든 가문의 전통과 관습 때문이었다.
남편이 된 남자도 아내가 된 여자도 결혼한 다음에는 자기 부모를 떠나는 것이 성경적이다. 떠나고 한 집에서 함께 살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의 사회구조에서는 정말 실현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꼭 같이 살기를 원하면 이웃에 가까이 사는 것은 모르지만 함께 사는 것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함께 살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모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를 공경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는 가장 어려운 과거를 살아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 기를 거쳐 정말 고생을 많이 한 분들이다.

다른 것보다도 자주 찾아봐라. 안되면 전화라도 자주 해 드려라.

[부모들]
그리고 부모 쪽에서도 꼭 기억할 것이 있다. 나이 많아 건강이 예전같이 않은데다, 경제 사정이 안 되어 자식 집에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비록 막내아들이라도 그 새 가정의 가장[head]은 자기 막내아들이다. 그러므로
ㄱ) 그 아들 가정에 주인 노릇하지 않아야 한다. 시어머니로서 잔소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기도하는 분위기를 깨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부모 친척들도 조심하자. 특히 시누이가 친정 와서 자기 올케를 꾸중하여 괴롭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ㄴ)부모를 늘 모시고 있는 맏이를 예사로 여기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쩌다 찾아오는 둘째, 셋째를 더 칭찬하는 편애도 하지 말아야 한다! 편애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공평하지 못한 잣대를 가져서도 안 된다. 즉
사위가 부엌에 들어가 그릇 씻고 설거지하면 아이고 우리 사위 최고야! 하다가 자기 아들이 부엌에 들어가면 ‘그 놈의 새끼’ 하면서 못 참는 이중적인 부모 노릇을 하지 말자.
ㄷ) 또 자식들도 부모를 기대지 말자. 이제 결혼한 다음에는 부모를 떠났음을 기억하자. 만일 아이를 낳아 기르는데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하면 그 부모님의 수고비를 톡톡히 지불하고 극진하게 대접하여야 한다.

다시 정리하자.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주 안에서 진솔하게 살아야 한다. 자식들은 자기 부모님도 진솔하게 공경하며 살아가자. 부모님들도 공경 받는 것을 지나치게 고집을 피우는 경우는 없는지?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나 자신보다 더 중시하는 경향이 없는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진솔한 삶을 살자! 왜 그런가?

[마지막 둘째로] 2. 성령이 역사하지 않아 변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7-9]

전통과 관습 때문에 이중적이고 진실하지 못한 당시 사람들에 대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하시였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자.

(마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이런 믿음에 대하여 이사야선지가 이미 예언한대로 [29:13] 당시 예수님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시대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입술로는 공경하되, 하나님에게서 멀도다. 하시며 그 마음 자세를 꿰뚫어 보고 있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적용한 것을 오늘 우리시대에 적용해보자.
주님과 함께 부활한 우리들에게는 오순절 성령과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우리 성도 속에는 ‘살려주시는 영’이 계신다 [고전 15:45].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서 화해가는 [고후 3:18]것이 우리 성도들이다. 그런데 주님을 바로 섬기지 않으면 이러한 성령의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나의 삶이 성령에게 이끌리는 삶이 아니고 육에 끌리는 삶이 된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하늘에 앉힌 자의 삶을 살지 못한다. 성령의 열매도 없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고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9절 마지막에 말씀하신다. 성령과 뒤틀린 관계를 맺고 있으면 올바른 예배생활이 안 된다는 말이다. 주님 앞에서는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이다. 매 첫날인 주일날이면 오전예배, 오후예배 [Morning Service, Evening service]를 드리고 그 주의 둘째 날인 월요일의 삶을 시작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삶[service]을 살기 시작한다.
이 예배가 잘못된다는 말은 온 인생의 삶이 헛 돌아간다는 말이다. 나의 예배가 형식적이란 말은 인생 삶을 모래위에 집짓기가 된다는 말이다. 자기를 열고 솔직하게 우리가 순수하게 살지 않고 외식 적으로 살면 성령님을 속이는 삶이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자식 농사 망친다. 오늘 교육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성령님의 인도가 아니고 어떻게 하겠느냐!

꼭 공부 잘하는 것만 생각지 말라. 공부 잘하고 출세하여야 성공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점이 많다. 기독교의 성공은 무엇이라 하였는가? 아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맡은 일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다! 공부는 못해도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 많다.

[우리 문화와 사회는 이중인격자가 양산하는 분위기이다. 우리의 인사는 “식사하였습니까?”또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식의 헛 인사가 많다.

그 위에 지금은 ‘실용주의’ 시대에 돌입하였다. 대통령이 이 길로 가고 있다. 결과만 따진다! 동기와 과정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실용주의가 온 사회를 휩쓸기 시작한다. 교회도 그리로 갈 것이다. 무슨 박사가 되고, 무슨 직을 가졌다고 성공이 아니라고 했다. 2 달란트 받은 자, 5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은 구별하지 않는다. 그 일에 얼마나 충성하였는지가 중요하다. 교육문제; 공부 잘 하는 자만 복 있는 자가 꼭 성공 자 아니다.]
결론: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는 말씀대로 외식과 형식 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과 거리가 멀다. 즉 성령님과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반대로 진심으로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여 성령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자! 천국을 실현하는 온 가정이 되도록 부절히 노력하는 가정이 되자!
부모 공경을 포함한 우리의 삶이 말씀대로의 삶이 아니면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적 삶이 안 된다. 인생전체가 잘못되기 시작한다. 말씀 따라 살면서 말씀 따라 순수하게 부모공경도 하자.
작성일:2008-05-23 04:46:53 125.189.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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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panta 2008-05-23 17:20:50
설교의 띄어 쓰기와 '비평'의 몇몇 표현을 고쳐서 첨부파일과 약간 다릅니다. 그래도 첨부파일의 설교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Christpanta 2008-05-23 16:57:59
천목사님의 친절로 혹시 헷갈리는 분은 '첨부파일'을 열어보면 더 명확해지리라 생각됩니다. 첨부파일을 열어서 좀 기다렸다가 open을 클릭해야 잘 열리네요.
admin 2008-05-23 09:18:42
보기 쉽게 수정하여 올립니다
Christpanta 2008-05-23 04:49:26
본문과 거리가 먼 설교 두편의 요약과 그 비평을 먼저 올리고 위의 설교를 그대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