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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국교회를 위한 대처방안은 없다손봉호 교수, 목회자들의 위기의식과 대처방안
17일 오후 서울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한목윤, 위원장 전병금 목사, 서기 정주채 목사) 발표회가 열렸다. “한국교회의 위기와 미래”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발표회에서 손봉호 교수는 “목회자들의 위기의식과 대처방안”에 대해 발표했다. 다음은 손봉교 교수의 발표문 전문이다.

 

1. 한국 교회의 도덕적 위기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의 위기는 일본강점기 신사참배, 한국 전쟁 때 공산주의자들의 핍박 때보다 더 심각하고 위험하다. 그 두 위기는 교회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들이었다. 그런 외부의 핍박은 과거의 소련, 지금의 중국이나 북한처럼 물리적 폭력으로 신자들을 살해하고 억압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신앙을 더 강화하고 하고 정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한국교회 대부분이 지금까지도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수용하는 복음주의 신앙을 유지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에는 과거 일본과 공산주의의 핍박이 공헌했다. “순교자들의 피가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란 터툴리아누스 (Tertullianus)의 지적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만약 일본이나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이만큼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가 처한 위기는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것도 유럽의 교회들처럼 신앙의 열정이 식거나 전통적인 신학이 변질되어서가 아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 처한 위기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개신교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교회, 특히 목회자들의 도덕적 실패가 자초한 위기다.

김진홍 목사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약 10%는 절도요 강도와 같은 자들이고, 50에서 60%는 삯꾼들이며 다만 30에서 40%만 선한 목자들이라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아무도 정확하게 조사하고 분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관찰은 사실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 않고 따라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2017년 3월에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목회자를 불신한다는 사람이 50.2%로 평신도를 불신한다는 48.8%보다 더 많았다. 불교사회연구소가 2015년 10월 19세 이상 일반 국민 1200명을 대상으로 성직자들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신부는 51.3%, 스님은 38.7%의 신뢰를 받는 반면에 개신교 목사는 겨우 17.0%의 신뢰만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비슷한 반응은 기독교인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목회자협의회와 국민일보가 2007년 5월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 1500명을 대상 <한국교회 미래 방향성에 대한 한국교회 성도들의 의식>을 설문조사한 결과 기독교가 타 종교에 비해 호감을 덜 받는 이유는 57.5%가 “삶과 신앙의 불일치”, 41.1%가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이라 했다. (중복응답허용). 지금은 목회자들의 논문표절, 공금횡령, 목회세습 등의 부정이 폭로되었으므로 목회자들에 대한 반응은 2007년에 비해서 훨씬 더 부정적이 되었을 것이다.

목회자에 대한 불신은 곧장 기독교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앞에 소개한 기윤실의 조사에 의하면 가톨릭은 32.9% 불교는 22.1%의 신뢰를 받는 반면에 개신교는 18.9%의 신뢰밖에 받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개신교인이 전체 인구의 19%를 넘기 때문에 개신교가 18.9%의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개신교인에 의해서도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 마디로 한국 개신교는 윤리적 파산상태에 처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논리가 사람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함축한다. 동일하다면 계시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종교는 불교와 같은 자연종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파될 수밖에 없다. 계시의 종교는 깨달음이나 명상으로 접근할 수 없고 배우고 가르침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키엘케고르 (S. Kierkegaard)가 지적한 것처럼 스승으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제자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제자는 이미 진리를 타고 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으로서의 하나님은 제자가 전혀 무지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계시하시고 가르친다. 복음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전파하는 자가 전해주어야 알 수 있고, 따라서 성경, 선지자, 설교자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항상 논리적이고 이해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참됨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들이었고, 복음을 가르치는 목사, 교사는 증인들이라야 한다. 그런데 증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 곧 “신실함” (pistos)이다 (고전 4:2). 그런데 그 가르치는 자, 증인이 신임을 잃어버리면 그의 증거를 어떻게 믿겠는가? 그러므로 불교 승려는 신뢰를 받지 못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개신교 목회자는 신뢰를 상실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데 지금 한국 목회자들이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개신교 위기의 핵심이다.

 

2. 도덕적 타락의 원인: (1) 한국 문화의 차세중심적 세계관

무엇이 한국 교회를 이렇게 타락시켰는가? 우선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영향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이다.

한국 교회를 타락시킨 가장 중요한 힘은 한국 문화의 철두철미 차세중심적 세계관 (Diesseitigtkeit)이다. 한국인의 세계관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무속신앙과 유교인데 그 두 종교가 모두 차세중심적이다. 즉 초월적인 신도 믿지 않고 내세도 인정하지 않는다. 무속에는 귀신도 등장하고 황천도 언급되지만, 전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유교는 아예 무신론이고 내세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는다. 두 종교에서는 이 세상이 전부고 삶의 모든 가치는 이 세상에서 찾거나 이룩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세계관은 우선 엄청난 경쟁심을 유발한다. 이 세상에서 삶의 모든 의미를 찾아야 하고 모든 목적을 이룩해야 하는데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돈, 명예, 권력 같은 경쟁적 가치들이다. 한 사람이 많이 누리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적게 누릴 수밖에 없는 가치들이다. 유교는 효도를 최고의 미덕으로 취급하는데 효경(孝經)에 의하면 효도의 극치는 입신양명(立身揚名), 즉 출세해서 이름을 날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명해지려면 1등을 해야 하고, 일등은 하나밖에 없으므로 엄청나게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17년 OECD 교육전문가가 초. 중. 고등학생들에게 “반에서 일 등이 되고 싶으냐?”하고 물어본 결과 그렇다고 대답한 한 학생이 OECD 평균 58%였는데 한국 학생은 80% 이상이었다 한다. 영국 주간지 ECONOMIST 한국 특파원이었던 튜더 (D. Tuder)는 자기가 아는 한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심이 강한 민족이라 했다. 이런 경쟁심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해서 경제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경쟁적 부문에서 큰 성취를 거두도록 했다. 비서양 국가들 가운데서 유독 중국, 일본, 한국 베트남 등 유교 전통을 가진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빨리 성장하는 것도 유교의 차세중심적 세계관에서 유발된 경쟁심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개신교도 근면을 강조한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이유는 없다. 자본주의가 바로 그런 경쟁을 부추겨서 사회를 역동적이게 하고 발전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경쟁은 모든 분야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 지혜, 정직 같은 고급가치를 두고는 경쟁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많이 가져도 다른 사람이 적게 가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경쟁은 돈, 명예, 권력 같은 하급 가치에서만 일어난다. 현대사회, 특히 자본주의 제도에서는 돈은 권력, 명예, 쾌락을 얻는 수단으로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는 전 국민이 돈의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경쟁이 치열하더라도 그 경쟁이 공정하게만 이뤄지면 경쟁에 진 사람도 상대적으로 덜 불행할 것이다. 심판이 축구경기를 공정하게 심판하면 강팀이 지고 약팀이 이겨도 큰 불만이 없다. 그러나 심판이 불공정하면 강팀이 이기고 약팀이 저도 불만이 커진다. 차세중심적 세계관은 한편으로는 엄청난 경쟁심을 유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경쟁이 공정하게 일어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월적 인격 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면의 감시(police within)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철저한 인과보응을 믿지 않는다. 겉으로만 훌륭하게 보이면 되고 당장 이익만 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사회를 비롯한 유교사회에 외식(外飾)의 문화, 거짓의 문화를 심어 놓은 것이다. 국제투명성기구 (Transparency International)는 2017년 한국의 투명성이 세계 51위라 했다. 일본 (20위), 대만 (31위)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아프리카 보츠와나 (35위), 르완다(48위)보다 뒤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때 37위까지 올라갔으나 이명박 정부 말년에 47위로 후퇴했다. 경제 13위, 인간개발지수 15위, 교육 17위, 건강 16위 등 다른 분야들에서는 모두 10위권에 들어 있는데 유독 투명성에서만 51위로 뒤떨어졌으니 한국의 약점이 무엇인가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순위는 국제 조사기관이 편견을 가지고 한국을 바라보기 때문은 아니다. 그런 순위 매김이 옳았다는 것을 다른 통계들이 보여준다. 한국의 보험사기는 13.9%로 일본의 1%보다 거의 14배나 많고 교통사고 입원율은 일본의 8배나 되며 탈세율은 스위스 8.5%, 미국 8.6%, 영국 12.5%, 독일 16%인데 비해 한국은 26.8%로 이태리 27%, 그리스 27.5%에 육박한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적폐 청산에서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가가 잘 드러난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나 도덕적으로는 부패한 후진국이다.

한국의 최대 종교인 기독교가 그동안 이런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금의 역할을 못 했을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세속에 감염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런 것이 바로 타락의 전형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는 대부분 그 주위 이방 백성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며 그들과 비슷하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도 한국 사회가 우상으로 섬기는 돈, 권력, 명예를 물리치지 못하고 그것들을 얻고자 믿음의 순수성을 상실해 버렸다.

 

3. 도덕적 타락의 원인: (2) 한국 교회의 세속적 성공

한국적 세계관 외에 한국 교회를 위기로 몰고 온 또 하나의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한국 교회의 세속적 성공이다. 과거 한국 교회가 핍박을 받았을 때나 절대적인 소수의 지위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무 힘도,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을 때는 겸손했고 도덕적으로도 순수했다. 돈, 명예, 권력은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것을 얻을 가능성도 없었기 때문에 아예 탐하지도 않았다. 1960년대까지 목사는 여자대학생에게 가장 인기 없는 신랑감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교회가 급성장해서 교인, 교회, 헌금이 늘어나자 목회자와 교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것을 자랑하고 즐기게 되었다. 목회자에게 돈, 명예, 권력이 조금씩 주어지자 김진홍 목사가 말한 절도, 강도, 삯꾼들이 하나씩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돈의 우상을 섬기기 있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거의 과반이 거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명예를 위해서는 논문이나 설교를 표절하고 돈을 위해서는 공금을 횡령하거나 교회를 세습하며 명예를 위해서는 뇌물을 살포한 것이다. 그 정도로 타락하지 않더라도 전통적인 무속종교의 기복 사상에 젖은 한국인들에게 기복신앙을 전파하여 교인의 수와 헌금의 액수를 효과적으로 늘이는 목회자는 절대다수다. 그런 기복신앙은 이웃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십자가의 도에는 완전히 배치되는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목회자가 절대다수다. 그런 목회자들에 의하여 세뇌된 교인들은 글과 설교를 표절하고, 교회 돈을 횡령하고, 목회를 세습하고 뇌물로 선거부정을 저지르는 목회자들을 신처럼 받들고 구름 때처럼 따라다닌다. 그런 목회자들에게 아첨해서 취임하는 장로들 가운데는 교회건축과 시설 확충에서 리베이트를 받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런 일들은 일반 사회에서도 쉽게 용납되지 않는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목회자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세상이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비난의 정도를 넘어 조롱할 뿐 아니라 심지어 걱정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이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 위기와 위기의식

그러나 위기는 그것을 의식해야 극복될 수 있다. 병이 아무리 심각해도 환자에게 통증이 없으면 고칠 수 없다. 통증 불감증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일찍 죽는다 한다. 다윗은 흉악한 죄를 지었으면서도 나단이 직접 지적해 주기 전에는 자신의 죄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한 유다 왕들도 마찬가지다. 무시한 정도가 아니라 그를 감옥에 넣어 핍박했다.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가장 민감하고 심각하게 의식해야 할 사람들은 당연히 목회자들이다. 한국 교회를 위기에 처하게 한 책임은 물론 모든 교인이 다 져야 하겠지만 특히 목회자들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민주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성경에 의해서 결정되고, 그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인들은 자신들의 생업에 대부분 시간과 관심을 쏟지만, 목회자들은 교회문제에 전념하고 대부분 시간을 교회 일에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모습과 감당해야 할 임무를 가장 잘 알 수 있고 마땅히 알아야 할 위치에 있다. 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교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교회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도 교인들보다 더 잘 안다면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이 성경의 가르침에 어느 정도 충실한지, 어느 정도 벗어났는지도 더 잘 알 수 있고 더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도 과연 목회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나타나는 위기 현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핑계는 얼마든지 있다. 교인과 교회 수가 줄어드는 것은 경제 수준이 높아지고 민주화가 이뤄지므로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현세에 더 안주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유럽의 교회들이 약해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도 반드시 교회가 욕먹을 짓을 해서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동안 기독교 세력이 너무 커져서 한국의 제일 종교가 되었고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일종의 질투와 두려움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엄청난 공헌을 했는데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기 때문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고 언론들도 기독교의 공헌보다는 약점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고 핑계할 수 있다.

실제로 좀 부족한 점, 잘못된 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목회자들도 그 정도가 위기라 할 수준은 아니라고 자위하기도 한다. 땅 위에는 항상 알곡과 가라지가 있게 마련인 것처럼 기독교에서도 항상 옳고 좋은 교회만 있을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소 미흡한 점도 있고 부족한 교회와 목회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건강하고 강한 교회가 더 많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들은 모두 건강한 교회에 속한 선한 목자들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그러해야 하듯이 경계하고 회개하고 고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국 기독교가 그렇게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고 과장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그런 핑계들은 그 자체로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런 요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지금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약점들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로 객관적이고 정확하며 공정하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가다. 예를 들어 상당수 목회자와 교인들은 목회 세습을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하거나 가장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심각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논문이나 설교 표절도 마찬가지다. 과연 그렇게 용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만약 한국 목회자들이 한국 교회에 대해서 위기의식을 갖는다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위험은 그들이 어떤 목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절도나 강도, 삯꾼 목자들은 한국 교회의 세속적 세력이 약해지는 것을 가장 걱정할 것이다. 교인 수와 연보 액수가 줄어지면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 지금과 같지 않거나 실직할 것이고 교회나 사회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력과 누릴 수 있는 명예가 줄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받을 수 있는 핍박은 큰 걱정거리가 아닐 것이다. 핍박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믿음을 배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선한 목자들도 교회와 교인 수가 줄어지는 것을 좋아할 리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의 세속적 세력이 약해지는 것보다는 전도와 선교가 어렵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지 못하며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기능을 할 능력도 약해지는 것을 걱정할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 가해질 수 있는 핍박도 걱정거리일 수 있다.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지거나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절도나 삯꾼들의 위기의식은 진정한 것이 아니고 교회개혁을 위해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지만, 선한 목자들의 위기의식은 진정하고 순수하며,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필수적인 위기의식이다. 역설적이게도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하도록 한 장본인들은 필요한 위기의식을 갖지 않는 반면, 그런 위기상황이 일어나게 하는데 책임이 없는 선한 목자들이 오히려 진정한 위기의식을 갖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5. 대처방안?

이런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뻔하다. 위기를 의식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뻔한 대처는 대처가 될 수 없다. 뻔한데도 그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위기가 온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죄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단이 불의한 부자 이야기를 했을 때 다윗은 자신이 그보다 더 불의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부자에 대해서만 화를 냈다. 그러나 나단이 “당신이 그 사람이라” 했을 때 다윗은 회개했다. 그러나 한국의 삯꾼들 대부분은 그런 지적에 오히려 화만 내고 반항할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의식하게 하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위기를 해결할 방안도, 목회자들로 하여금 위기를 느끼게 할 인간적 방안은 없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다.

물론 소수의 선한 목자들에게 기대해 볼 수 있으나 그들 대부분도 하나님 나라보다는 “우리 교회”에 집중하는 이기주의자들이다. 더러운 물에 손 담그다가 자신들조차 더러워질까 걱정되어서 “한국 교회”, “하나님 나라” 에 관심 쓰기보다는 자신의 목회만 제대로 하는 것에 몰두한다. 그들은 한국 교회가 완전히 망한 후에 “그루터기”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망해가는 교회를 정화하는 “청소부”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목회자보다는 의식이 깨인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기대해 볼 수는 있다. 복음주의 교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 NGO들은 목회자들에 비해서 교회의 위기상황을 좀 더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 교회와 목회자들을 타락하게 하는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이해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외침에 대해서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너무 냉담하다. 그들의 수는 너무 적고 재정적으로 너무 약하며 대중의 신뢰와 호응을 많이 잃어버린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일반 NGO들과 함께 도매금으로 매도되기가 십상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간섭이 없는 한 한국교회는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유럽 교회와 같이 전혀 무력하게 되거나 트럼프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든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처럼 보수적인 소수집단으로 남아 자신들의 세속적 이익에만 몰두하고 사회에 아무 긍정적인 공헌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이대로 계속 타락하고 약해져서 사회의 비판과 조롱을 받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무 특혜도 누리지 못하고 아무 권한이나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될 때 비로소 한국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하다. 세속적으로 아무 이익도, 특혜, 특권도 없어지고 오히려 무시와 핍박의 대상이 되면 대부분의 삯꾼과 기복신앙 신자들은 교회를 떠나고 오직 진실하고 순수한 그리스도인들만 남을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한국 교회의 진정한 “그루터기”가 되어 한국 교회를 새롭게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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