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주치의 누가의 묘이다.


[누가의 묘는 왜 에베소에 있는가?]     /천헌옥

고대 유명 도시 중 하나인 에베소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하차한 우리를 가이드는오히려 에베소 반대편으로 안내해 갔습니다. 왜일까 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반가운 한글판 안내간판을 보았습니다. 누가의 묘지였습니다. 

이 무덤은 본래 의료의 신이라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었던 것을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된 후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가져와 묻었다가 그 후 이곳에 안장을 했었는데, 이제는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 머리는 로마 베드로 성당에 안치하고 몸은 파도바 시에 있는 성 기우시티나 교회에 보관 중이라 합니다.

누가는 ‘빛을 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소개된 그에 관한 기록과 교회사가들의 증언 및 전승을 토대로 종합해보면,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 출신이며 이방인(그리스 사람) 개종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수리아의 안디옥에 관한 기사가 유난히 많고 상세하게 기록한데서 알 수 있습니다(행 11:22-30; 13:1-3; 14:24-28; 15:30-41 등).

이 간판은 성지보존회에서 세운 것인데, 한국에서 관심을 가지기 전에는 방치되어 저 안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마구 밟고 다니기도 했지만 누가의 묘라고 확인이 된 다음에는 울타리를 치고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 놓았다.

수리아 안디옥 사람 누가는(골 4:14) 알렉산드리아에서 의술을 배웠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네압볼리로 가던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바울의 개인 의사로 함께 하면서 2차 선교 여행을 동행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임에도 요한과 바울을 만나 그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단편적으로 기록한 것들을 모아서(눅1:1-2) 누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면서 사도행전까지 기록합니다. 혹자는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바울이 유럽(네압볼리)에 첫발을 내딛게 된 데는 누가의 조력이 컸을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바울의 동역자가 된 누가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타지에서 복음 사역을 할 때도 계속해서 빌립보에 머물며 사역했고, 후에 3차 선교여행에 나선 바울이 다시 빌립보를 방문할 때 합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20:5-6). 

그후 바울의 1차 로마 투옥 때에도 함께 동행하여 거의 2년 정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 후반부 바울의 로마 여행 기록이 매우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납니다(행 28:8-9). 심지어 바울이 순교 직전 2차 로마 투옥 때는 누가만이 바울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딤후 4:11).

간판에 있는 사진에서 가져온 것이다. 오른편에 보면 십자가 밑에 황소가 새겨져 있다.

이곳이 누가의 묘라고 주장하는 것은 십자가와 황소의 그림이 부조된 것을 보고 그렇게 주장한다고 합니다. 황소와 누가를 어떻게 연결 시키는지에 대해서는 필자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의 말년에 관하여는 많은 전승들이 있는데, 혹자는 그가 74세까지 살면서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비두니아에서 죽었다고도 하며, 혹자는 그리스에서 순교 당하였다고도 합니다. 사도행전후서를 펴낸 토머스 E 슈미트의 기록에 의하면 누가는 주로 스페인, 소아시아(터키), 이집트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주후 80년 그리스에서 자연사 했다고 기록합니다. 성경기록에 없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단지 참고할 뿐입니다.

누가의 묘라는 사실을 저들도 확인하여 표지판을 세웠다.

요한이 누가의 유해를 수습하였다면 아마 에베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리스에서 사망하였을 가능이 크고, 요한이 그리했다고 하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유해를 부활할 몸으로 알고 귀중히 여겼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기사의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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