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와 만주교회 이야기 2

김동춘 목사 (SFC대표간사, 연변대 역사학박사/만주 근대사)

흥미로운 것은 조선족의 사투리를 통하여 그들의 이주 시기, 출신지, 집거지가 자연스럽게 알려진다. 조선족의 사투리에는 그들의 이주역사가 들어가 있다. 

조선족의 이주역사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두만강을 넘어 간도를 개척하던 시기 1860년~1905년까지 즉, 북간도 개척시대이다. 2기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가지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던 시기 1906년~1930년까지 즉, 정치적, 경제적 망명 시대이다. 3기는 만주국 이후 자유롭게 국경을 넘어 이주하던 시기 1931년~1945년까지 즉, 조선 지역민 이주 시대이다. 

이 시기 만주 특히 북간도 지역의 조선인 이주민 수는 북간도 지역의 전체인구 중 약 65~70%를 차지하였다.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한 순서로 보면 회령, 종성, 무산 등의 두만강 대안 지방-지금의 용정, 활용, 훈춘 등-에 제일 많았고, 그 다음으로 두만강에서 해란강 사이, 그 다음으로 압록강 이북, 그리고 목단강과 송화강 유역 순으로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그런데 각 시기마다 넘어온 조선인들은 각기 다른 지방에서 올라왔지만 정착한 공동체 마을마다 지방색을 띠게 되었고 언어적 공통점을 가지게 되었다. 청나라의 봉금조치에도 불구하고 함경도의 대흉년으로 두만강을 몰래 넘어 간도를 개척하게끔 된 1기의 조선족은 주로 북간도, 즉 현재의 연변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이다. 그래서 현재 연변의 조선족은 함경도 사투리를 쓰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망명시기(2기)는 일본에 의한 조선의 주권이 빼앗긴 1905년 이후 좁고 얕은 두만강을 넘어 간도를 형성하던 것을 넘어서 깊고 넓은 압록강을 건너서도 이주가 계속되어 두만강 이북은 ‘북간도’, 압록강 이북은 ‘서간도’로 지칭하게 되었다. ‘서간도’ 그러니까 심양을 비롯한 요녕성 지역의 조선족은 평안도 출신이 많다. 자연히 그쪽 지역의 조선족은 평안도 사투리를 쓴다. 북한 식당의 종업원은 대부분 평안도 쪽 사람들인데 그들의 사투리가 요녕성 조선족 사투리와 유사한 것은 그 때문이다. 

만주국 설립 이후 다양한 조선인의 이주시대(3기)는 1930년대 초 만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다양하게 이주하던 시기이다. 조선 총독부는 만주에 대한 이주를 장려하였다. 일제는 자신들을 1등 민족, 조선 민족을 2등 민족, 중국인을 3등 민족으로 간주하여 한인들을 북만 일대에 이주시킴으로써 중국인들과 이간시키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이 시기 일본은 만주국의 수도를 장춘(신경)에게 건설하여 장춘 이북 지역, 지금의 흑룡강성에 한인들을 집단 이주시켰는데, 장춘, 하얼빈, 치치하얼, 목단강 유역에 조선족이 많이 살게 되었다. 또한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두만강을 넘는 것은 국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을 넘는 것처럼 되어 한반도 남쪽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이주민이 넘쳐났다. 장춘 이북 지역에 이주해 온 조선족들은 경상도 출신이 많다(일부 다른 지역 출신들도 있지만). 흑룡강성 조선족 중에 뜻밖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부분 3기 때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정리하면,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주로 연변사람들로서 북간도 초기 개척 시절부터 들어와 살던 함경도 출신들이다.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주로 요녕성 심양일대에  초기에 압록강을 넘어 온 평안도 지역 출신들이다. 어떤 조선족은 뜻밖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도 하는데 이들은 주로 1930년대 이후 함경도 출신들이 차지한 연변을 피해 목단강 쪽으로, 혹은 일본당국의 이주민 정책에 의해 길림, 장춘, 하얼빈 등지로 이주한 아랫지방 사람들로 경상도 출신이 많다. 

이처럼 다양한 조선족의 사투리는 조선인의 이주역사,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보여주는 우리 민족의 슬픔과 애환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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