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

신요한(새언약교회 전도사, 코닷 수습기자)

대한민국의 유일한 자원

우남 이승만 박사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자원을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우남은 군사력이나, 외교력으로는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부족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 취임 후 정책에 있어서 교육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고, 하야 당시에도 국민의식이 고양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겼다고 알려져 있다. 지하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교육이 대한민국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이 요즘 이 유일한 자원을 두고 몸살을 앓고 있다.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공교육은 물론 대학교, 교육방송, 심지어 신학교까지 모든 교육계가 총성 없는 전쟁 중이다. 물론 오래 전부터 꾸준히 지속되어 왔던 싸움이었지만 이번 정권이 집권하면서 더욱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어떠한 국가적 어려움에도 국민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그것을 극복했던 수 많은 역사들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학교와 교회, 친구와 가정까지 분열되는 사상(史上)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국가적 위기를 이겨내는 우리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국민적 화합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된 것 같다.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몸살을 앓고 있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하는 교회의 지도자를 기르는 신학교도 여기에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세상에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교회가 그 능력을 상실했다. 신학교육의 현장에서도 좌우로 분열되어 이데올로기 전쟁 중이다. 주의 선지동산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사상(思想)냉전 시대의 도래

동북아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평화로웠던 시대가 없었다. 북한은 물론이고 최근의 미중 무역전쟁까지, 이러한 정세들이 동북아의 불안정한 상황을 말해준다. 한 마디로 동북아는 여전히 ‘냉전’ 중이다. 냉전은 정치∙경제∙외교∙이념∙군사적 도발 등의 갈등을 통해 벌이는 잠재적 권력투쟁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한국이 휴전국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냉전국가로 인식한 적은 많지 않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에 대항하던 운동권 세력이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사상(死傷)하는 부작용들이 발생하면서 공교육에서 반공교육은 사라지게 되었다. 반공교육이 사라지면서 냉전의식도 점차 사라져 갔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냉전의식은 철지난 이데올로기로 치부된지 오래이다. 평화의 시대인 만큼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지향해야 하며 냉전의식은 파시즘을 부른다는 이유에서다. 

반공교육이 사라지면서 공교육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 열린 문으로 다양한 진보적인 사상(思想)들이 유입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반공의식은 국민들 사이에서 점차 진보사상들에 의해 잠식되어져 갔다. 교사는 정치적 중립을 철저히 지켜야 하고 학생들에게 사상을 설파해서는 안된다는 명목으로 다양한 진보적 사상들을 공교육에 녹이기 시작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아니한가? 정치적 중립은 곧 진보적 사상의 유입을 낳았다. 곧 진보적인 성향이 중립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반공교육에 급진적으로 반동적인 결과이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무르익자 고삐가 풀렸는지 공교육 지도자들은 진보사상들을 맘껏 표출하기 시작했고 결국 교육부의 도둑날인 사태와 인헌고 사태와 같은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 시켰다.

안보도 예외가 아니다. 2018년 국방백서에서도 “북한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면서 안보의식에도 북한에 대한 특별한 적대감이 잠식되었다. 개인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대한민국이지만 사실상 반공과 반북(反北)이 동치로 여겨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이제는 북한에 대한 특별한 위협감마저 희석되고 있다. 이처럼 교육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사상적 중립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절대진리를 상실한 신학교

진보사상의 확장은 결국 교회와 신학교에도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교회는 항상 보수정권과 군사정권을 옹호한다”는 프레임이 사람들로 하여금 보수주의에 경계하도록 만들었고 이미 잠복해 있던 진보적인 신학 사상들이 비로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때가 바로 오늘날이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을 마치 군사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의 부작용의 연장선으로 프레임을 씌워 사람들로 하여금, 심지어 기독교인들마저 보수에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이때를 기회삼아 정체를 숨기고 있던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 교수들이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무르익자 자신들의 진보적인 사상과 철학을 드러내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신학생들도 동아리 활동을 통해 진보사상들을 신학교 내에서 본격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에 반동하여 이렇게 진보적인 사상들을 흡수하면 결국 오직-전체성경(Sola-Tota Scriptura)과 사상철학을 이분화하여 생각하게 되는 이신론의 경향을 갖게 된다. 최근 모 진보언론의 인터뷰에서 “나는 동성애를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차별금지법에 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모 신학교수처럼 말이다. 필자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신대원에 재학 중이었을 때에도 이런 교수들과 학우들을 정말 많이 접했다.

여기에서 그치면 일단 전체성경이 남아 있기에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과 맞물리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신학적 체계를 구성해야만 기독교가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오직-전체성경을 포기하고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신학적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예컨데 사회주의에 근거하여 신학을 세우면 결과적으로 무늬만 기독교인 사회주의 이론만 남게 된다. 이같은 원리로 민중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퀴어신학 등 다양한 진보적인 신학 사조들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조(變潮)시켰다. “십자가를 통한 죄로부터의 대속과 부활”이 아니라 “인권”이 기독교 진리의 코어(core)를 대체하였다. 세상도 “기독교다운 기독교”를 이렇게 인식하게 되었다. 

신학교육에서 이데올로기와 인권은 이렇게 성역화 되었다. 누구든지 이데올로기와 인권을 건드는 사람은 정죄 당해야 마땅하게 되었다. 예컨데 퀴어신학에서는 동성애를 포함한 성적지향 또는 성정체성, 그리고 성소수자의 인권이 “성역”이다. 다른 모든 죄는 성경에 입각하여 비판할 수 있어도 동성애라는 죄를 비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성경의 권위보다 퀴어사상의 권위가 더 높다는 것을 나타내는데도 퀴어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절대 의식할 수 없다. 이미 신학이 퀴어사상을 기반하여 세워졌기 때문이다. 최근 총신대 이상원 교수와 “FTNER”(에프티너)라는 유튜브 채널의 운영자 김영현 전도사가 이 “성역”을 건드려버렸기 때문에 신학교로부터 불이익을 당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작년과 올해를 뜨겁게 달궜다.

 

지난 1월 20일 총신대학교 앞에서 열린 이상원 교수 징계위 회부 결정에 대한 반대 기자회견.
유튜브 채널 FTNER(에프티너)의 운영자 김영현 전도사가 신학교의 실태에 대해서 폭로하고 있다. (출처: 유튜브 채널 <FTNER> 영상캡쳐 https://www.youtube.com/watch?v=iJgk1w9_UGg)

이스라엘판 포스트모더니즘, 사사기 결론부의 교훈

사사기 17장에서 21장은 사사기의 결론부에 해당한다. 결론은 전체 줄거리에 내재되어 있는 특성과 저자의 메시지를 함축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는 ‘미가 사건’과 ‘열두 토막 살인 사건’이 나오는데 이 두 사건 모두 레위인으로부터 전개된다. 17-18장은 모세의 자손인 요나단이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미가의 가정에 제사장으로 들어갔다가 더욱 큰 명예를 얻기 위하여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사건을 진술하고 있다. 모세의 자손이 아론의 자손에게 주어진 제사장의 직분을 담당하는 것은 불법인데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모습이 그려진다(삿 18:30). 19-21장에서는 레위인이 윤간을 당한 자신의 첩을 토막내는 잔인한 범죄는 이스라엘을 결국 지파 간의 전쟁으로 번져 수 만명의 사람이 죽고,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는 대를 이을 여자도 전멸하게 되는 파국의 시발점이 되었다. 사사기의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 지파의 타락으로부터 곧 사사기 전반에 걸쳐 진행된 이스라엘의 혼돈이 시작되었다는 두려운 메시지로 우리를 교훈하고 있다. 이 결론부에서만 사사기의 핵심 메시지가 두 번 등장한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

이것은 마치 21세기에 만연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의 양상을 연상시킨다. 신학교에서 이미 성경의 절대적 권위는 이렇게 무너진지 오래다. 말씀이라는 “왕이 없으므로”, 즉 말씀의 권위가 무너진 신학교육 때문에 현대판 레위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 각자의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이것이 묵인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지금도 정말 답답한데, 수 년 후이면 이런 신학교육을 받고 졸업하는 사역자들이 버젓이 한국교회의 주류가 되어 사역하고 있을 상황을 상상해 보니 이보다 더 두렵고 절망스러운 것이 없다. 사사기의 결론의 교훈처럼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계 전반의 극심한 혼돈에 대하여 교회의 타락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교회의 타락은 신학이 무너진 것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교회와 신학교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수도 있다. 

 

심판은 회복의 예비하심

그러나 필자는 사사기라는 혼돈의 시대에 사무엘이라는 사사를 보내셔서 다윗 왕국을 예비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겪는 혼돈이 한국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주의 종을 기르는 선지동산은 하나님의 호소에 반응해야만 한다. 오늘날의 한국의 혼돈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인식하고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선지자의 외침에 참여할 것인가(호 6:1)? 아니면 여전히 진리에서 돌이켜 자기의 소견에 맞는 스승만을 따를 것인가(딤후 4:3-4)? 그렇다. 단연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학이 회복되면 이 나라가 회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말씀의 권위가 회복된 진정한 신학교육이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가 세상의 대안이 되기 위해 이것이 목회자를 통해 교회에 어떻게 확장되어야 하는지를 모색해야 하는 숙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고민들을 향후 연재하는 기사들을 통해 함께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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