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들의 도전과 고신의 응답

이주민 선교사 (고려신학대학원58회졸업, 고신대학교선교대학원(Th.M), 사직동교회 부목사, 현 KPM 카자흐스탄 선교사-거제섬김의교회파송)

한국 사회는 홍해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 버렸다. 사회주의 정권 지지자들의 과도한 사회주의화에 본능적 위기감을 느낀 소시민들의 프로테스탄트적 반응이라는 생각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권력을 뺏기지 않겠다고 이를 악문 거대 정권 앞에, 정책을 넘어 국가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위기감도 확산되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무신론의 이데아에 세워진 인본주의 시스템이며 과학과 이성을 통한 인류구원을 목표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내부는 더 혼돈이다. “사회주의적 가치가 뭐가 그리 나빠?”라는 감성 프레임에 동의하는 크리스천들이 늘어나고, 기독 엘리트들은 사회주의가 교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과소평가한다. 아니다!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에 교회가 동의한다는 말은 휴머니즘을 통한 인류구원의 가능성을 성도들에게 열어준다는 메시지이며, 그리스도 없는 지상천국에 동의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배교이다! 18~19세기 유럽교회를 뇌사상태로 만든 사단의 고등전략이며, 그 결과는 교회에 대한 혐오와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 말만 잘하는 사람이 득세하는 비상식적 사회이다.

사회주의적 가치와 기독교적 가치가 같은 지붕 아래 끝까지 동거할 수 있는가? 역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권과 약자 보호라는 진보의 논리 뒤에 숨은 반기독교 정책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심지어 이 정부의 방향이 기독교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교회의 고민이 더욱 깊어진다. 이런 혼돈 속에서 민주당의 선거 압승은 성경적 가치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보수적 크리스천들에게 두고두고 기억될 역사적 트라우마를 선사했다. 바야흐로 「진보」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8~19세기 유럽은 「진보」의 시대였다. 흥망성쇠라는 순환 역사관이 힘을 잃고 인류는 역사를 「진보」의 시각으로 해석하였다. 진보 역사관의 두 증인이라 부르는 과학과 이성은 각각 인류의 과거를 밝혀주고, 미래의 문을 열어 줄 마법 지팡이로 여겨졌다. 더욱이 과학의 발달은 대량생산을 통한 빈곤 해결에 대한 꿈을 주었고, 이성의 발달은 교육을 통한 정신적 결핍을 해결할 소망을 주었다. 사회학의 아버지 어거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사회발전을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로 설명하면서, 사회는 종교사회, 이성 철학 사회, 과학 만능사회로 진보한다고 주장했다. 과학만능사회란, 인류의 문제를 위해 더는 신을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고, 언젠가 창조주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외계인 창조설과 UFO 등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은 과학만능주의에 영감받은 것들이다. 「진보」의 역사관은 그렇게 종교가 되었으며, 18~19세기 유럽에 전반적이고 보편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위그노를 연상케하는 Stone Pine(돌소나무/잣나무), 핍박을 피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도착한 프랑스 위그노들이 웨스턴케이프에 이 나무를 심었고 이 나무를 보면서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 위그노를 연상한다. / 사진@김대진

진보숭배의 클라이맥스는 국가사회주의이다. (나치즘 Nationalsozialismus 발음이 나치오날조~로 발음된다.)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히틀러당)은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와 개신교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사회주의가 카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호페트(M. Frederic Hoffet) 는 히틀러, 괴벨스, 힘러와 나치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카톨릭 교도였다고 밝힌다. 카톨릭제도를 잘 아는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제도는 대부분이 카톨릭제도의 짝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카톨릭제도와 국가사회주의제도가 쌍둥이처럼 유사한 이유이다. 심지어 악마의 선전가로 불린 괴벨스의 경우 예수회 대학을 졸업한 카톨릭신학도였으며 그는 저서에서 "복종을 위한 어떤 거짓은 우리의 양식만큼이나 유용하다!"라고 말했다.

나치즘의 정치적 성취 목표는 반대기업주의,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이상적인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위해 대기업, 자본주의와 손을 잡았다. 사회혁명을 위한 대규모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획득된 재정은 진보적 관점의 역사 교육에 투여되었고, 사회주의 이상국가를 위한 복종적인 인간들을 길러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사람들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비이커 속에 끓고 있는 개구리처럼 저항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는 국가의 목적을 위해 역사를 통제할 수 있다고 한다. 역사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국민들에게 정보와 오보(誤報)가 혼합된 역사를 제공하여 역사의 관점을 흐리고, 교육을 통해 진보 역사관을 반복시켜 진화론적 세계관을 가지도록 인도한다. 체계에 반하는 역사서들은 금지하거나 논의에서 제외시켜 사회의 이슈가 되지 못하게 한다. 횃불을 들고 책을 불태우는 어린 독일 학생들의 분서(焚書) 선전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다양한 의견을 말살하고, 정신의 자살을 강요했던 「진보」의 과거사이며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미래상이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죽지 않았다. 침묵한 다수의 교회들과 달리 양심적인 성직자들은 저항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 외에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는다는 <바르멘선언>을 통해 히틀러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하고 혹독한 핍박을 받았다. 사회주의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한 한 명의 프로테스탄트를 그린 영화가 있다.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볼만한 영화이다. 사회주의의 도전에 신앙으로 응답(Response)한 시골 남자의 실화이다.

오스트리아의 푸른 들판 우뚝 솟은 바위산, 꿈엔들 잊히랴 생각되는 산골 마을에 가정을 꾸린 행복한 시골 남자 프란츠 예거슈테터, 교회 종소리가 울리고 프란츠는 전쟁에 참여한다. 몇 년 후 프란츠는 전쟁터에서 돌아오고 불안한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다시 울리는 교회 종소리, 프란츠는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고민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념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마을 시장은 맥주에 취해 히틀러처럼 말한다. “이민족들은 해충이야! 우리를 갉아먹지!” 답답한 마음에 찾아간 주교는 말한다. “사도바울을 기억하세요. 교회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울리는 교회 종소리,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비겁한 소리였다.

병역을 거부한 프란츠는 감옥으로 끌려가고, 그곳엔 양심을 따라 감옥을 선택한 지식인, 종교인, 탈영병들이 뒤섞여있다. 사형선고를 앞둔 프란츠에게 재판장이 묻는다. “Do you judge me?” 프란츠는 답한다. “나는 착하고 나쁘고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내 양심이 바르지 않다고 믿는 것을 도무지 할 수가 없습니다.” 시골 농부의 양심 앞에 독일의 최고지성은 침묵한다. 그도 알고 있으므로……. 독일군은 괴물들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연합군은 천사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둠이 오면 진리의 편에 선 자들이 누군지 분명히 구분된다.

사형집행 통지서를 받은 아내는 프란츠를 만나고, 변호사와 동네 신부는 프란츠를 설득한다.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둬요! 말만 바꾸면 되요! 전쟁이 곧 끝날 수도 있잖아? 하나님은 말이 아닌 마음을 보셔! 말로만 맹세하고 자유를 얻으란 말일세!” 그러나 아내는 말이 없다. 시골 아낙네는 프란츠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사랑해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무슨 일이 있든 난 당신편이에요. 옳은 일을 하세요!” 시골 부부는 학문이 아니라 삶을 통해 진리를 분별하였다. 죽음의 공포 앞에 선 프란츠, 남편 없는 삶의 공포 앞에 선 아내는 믿음으로 승리한다. <A HIDDEN LIFE 2019>

인류는 분명 진보했다. 그러나 이것은 체제의 완전성 때문이 아니다. 권력은 언제나 거짓과 야만성으로 끝난다. 인간이 아름답게 진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 때문이다. 가장 이기적인 인간이 가장 비이기적인 희생을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인류는 세계대전과 냉전이 끝난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진보」의 역사관에 빠져 자화자찬한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이 불과 수십 년 전에도 똑같이 유럽을 휩쓸고 전쟁을 불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글을 맺는다. 「진보」의 역사관으로 무장한 사회주의는 복음의 역사에 도전한다. 교회의 응답은 무엇인가? 코로나 이후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를 바라보며 우리는 어떤 응답을 준비할 것인가? 신천지에 빠진 젊은이들을 보며 오히려 나는 교회의 희망을 보았다. 6개월이 넘는 교리과정을 견디고, 시험을 치고 부모까지 버리면서 저들은 헌신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신천지에서 빠져나온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따뜻한 모임 때문이라 말했다. 그들을 보면서 내 기억 저편에 따뜻하게 자리 잡은 모 교회의 모습을 떠올랐다. “아! 맞다! 이게 내가 자랐던 교회였지!”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프로테스탄트의 피가 흐르는 우리의 응답은 더 많은 교회 모임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며 사랑과 관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초연결사회에서 온라인과 더불어 더 많은 오프라인 모임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할 수 있다면 교회는 더 작은 모임으로 분화되어야 한다. 가정교회운동, 작은교회운동, 소그룹운동, 선교회 등 하다가 없어져도 좋으니 교회 안에 교회가 될 수 있는 모든 모임을 장려해야 한다. 안되면 밥이라도 자주 먹자!

아이들이 모이게 해야 한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이십 대를 통해 자라나는 아이들의 희망을 보았다. 이십 대는 상당한 비판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를 통시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나는 이런 능력이 어릴 때 책을 읽고 토론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생활형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어른들이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더라도 공간을 마련해서 카페도 만들고, 풋살장, 농구장도 만들고 부엌도 활짝 열어야 한다! 능력이 없으면 놀이 강사라도 고용해서 아이들이 교회 중심으로 살도록 시선을 돌려야 한다!

중고교 S.F.C. 운동을 일으키자! 우리 청소년들이 목적 있는 삶을 살도록 교회교육을 교리화 이념화시켜야 한다. 세상의 부조리를 바꾸는 영적 혁명가를 꿈꾸게 해야 한다. S.F.C.강령을 외우고, 순회예배와 각종 대회를 지원해 지도력 있는 아이들을 발굴해야 한다. 교회 학생회를 활성화하고 지구위원, 지방위원, 전국위원 같은 대학선배들과 만나도록 조직을 연결해야 한다. 노회원, 총회원, 선교부원들이 안 가더라도 해외선교의 기회를 아이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를 보는 안목을 가진 다음세대들이 우리 교회를 책임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교회에 도전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한 프로테스탄트들의 충분한 응답이 되길 기대한다.

 

고신교회를 사랑하는 작은 선교사

<영화볼 수 있는 Site>

https://t7.fun2story.com/bbs/board.php?bo_table=streaming05&wr_id=39689&page=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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