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 찾아올 부흥의 시대를 기대하며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쾌락주의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일찍이 인류가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자부할 것이다.”-괴테, 최후의 인간-

 

이주민 선교사 (고려신학대학원58회졸업, 고신대학교선교대학원(Th.M), 사직동교회 부목사, 현 KPM 카자흐스탄 선교사-거제섬김의교회파송)

코로나 이후 축소되거나 망할 사업들이 있다. 크루즈여행, 극장, 스포츠, 항공사, 쇼핑센터 등 주로 밀집되거나 공간이 개방되지 않는 사업들이다. 반대로 부흥할 사업들이 있다. 온라인 마케팅, 원격의료, 택배, 소셜미디어, 온라인게임 등 비접촉 사업과 미디어 컨텐츠, 원격 서비스 사업들이다. 세계경제가 폭망했지만 오히려 더 성장한 애플, MS, 아마존, 페이스북, 알리바바는 좋은 예가 된다.

산업혁명을 이끈 증기기관처럼 Untact(비접촉) 사회의 엔진은 온라인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산업의 보조역할에서 국가 산업을 이끄는 리더로 자리바꿈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전 세계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세계화의 비전은 날개 없는 새처럼 추락할 것이다. 국가들은 서서히 무역의 문을 걸어 잠그고, 최소한의 접촉으로 이뤄지는 소규모 생산과 내수 위주의 온라인산업으로 재편될 것이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는 Untact의 벽에 부딪혀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장례식 위원회로 전락하거나 교회의 벽(개념)을 부수고 새로운 부흥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번영신학, 성공하자마자 떠나는 교인...

번영신학에 바탕을 둔 교회의 대형화와 비즈니스화는 외적 성장에 도움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의 더운 피를 끓어오르게 하지 못했다. 성공을 강요하는 교회, 성공이 비전인 교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세상과 똑같이 루저로 느낄 뿐이다. 똑똑하고 생각 있는 젊은이들은 십자가는 성공을 위한 과정이지 목적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성공하자마자 교회를 버리고 떠났다.

칼빈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절망적인 탐욕 앞에 무너진 교회를 개혁하고 무기력한 인류를 가난으로부터 구원했다. 그러나 500년이 지난 지금 프로테스탄트는 통제불능에 빠진 자식처럼, 정신 빠진 자본주의의 탐욕에 찔려 죽게 생겼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20세기 명저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베버는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주의자”라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며 프로테스탄티즘의 절제와 소명을 짓밟는 자본주의 짐승들의 등장과 사회의 종말을 예언했다. 마치 영혼이 없는 전문 목회자와 희생의 기쁨을 모르는 합리주의 신자들이 주도하는 21세기 예배당을 미리 본 것처럼 말이다.

1913년 12월 29일 Times에 이런 광고가 떴다. “탐험가 구함. 위험한 여행, 낮은 급료, 극한의 추위와 어둠 속에서 몇 개월을 보내야 함, 끊임없는 위험에 안전한 귀환을 보장할 수 없음, 성공한다면 영광과 명예를 얻을 수 있음. - 어니스트 섀클턴, 뷰링턴가 4번지-” 역사상 가장 솔직한 광고였을 뿐 아니라 탐험 역사상 가장 많은 지원자들이 응답했다. 5천 명 이상이 지원하여 197대1의 경쟁률을 뚫고 27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실패의 이야기를 창조해 내었다.

위대한 광고(Calling)를 기다리는 젊은이들...

교회에도 이런 무모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부모와 가족, 친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대한 광고(Calling)를 기다리고 있다. “선교사 구함. 확실치 않은 목표, 낮은 급료, 정신적 스트레스와 가족 간의 불화, 자식들 교육을 책임질 수 없음, 좋지 않은 환경, 각종 병에 시달릴 수 있음, 성공해도 본국에 집 한 칸 구하기는 어려움. 천국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와 동역한 명예를 얻을 수 있음. -예수그리스도, 골고다 언덕-”

선교(Mission)라는 말은 ‘보낸다’(Send)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 ‘mitto’에서 파생되었다. 선교의 목표는 성과가 아니라 믿음의 증인들을 땅끝으로 보내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땅끝으로 몰아내신다. 주님이 먼저 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땅끝으로 가야 한다. 그곳이 어디인가?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관계적으로 해석한다면 나와 관계가 가장 먼 사람이 아닐까? 사람의 관계는 여섯 단계를 건너면 세상 모든 사람과 연결된다고 한다. 네트워크 시대에 열린 새로운 땅끝이다. 코로나로 확실하게 열린 새로운 신세계이다. 그리고 이 땅에도 부흥이 필요하다. 부흥을 위해 교회는 이전의 개념을 깨뜨리고 개혁되어야 한다. 빙판에 버려진 27명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쪽배를 타고 남극의 폭풍우를 건넜던 새클턴처럼 온라인에 버려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위대한 실패에 도전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첫째, 교회는 영혼 있는 집단지성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21세기 에스라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 부흥은 성경 부흥이다. 다니엘의 예언처럼 지금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시대이다. 몇몇 지성으로 정보의 바다에 사는 현대인의 다양한 질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아니다! 사람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여전히 진리에 목마르다. 대안은 무엇인가? 집단지성이다. 교회는 모든 질문에 모두가 답할 수 있는 성경전문가 집단이 되어야 한다. 100가지 질문에 100가지 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지금까지 100개의 질문에 1가지 정답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사람들은 정답을 원한 것이 아니다.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과정에 참여하고 싶을 뿐이다. 이런 대답은 몇 사람만으로 할 수 없다. 고민하는 집단지성들이 있어야 한다. 가르치고 살고 증언하며 함께 해 주는 사람들이다. 교회가 영혼의 문제를 고민하는 집단지성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설교자 중심의 획일적 사고를 강요하거나 슈퍼지성 설교자를 찾아 헤맨다면 교회의 다음 세대는 낡은 건물과 방석만 덩그러니 남은 빈 의자들이 될 것이다.

둘째, 교회는 따뜻한 가슴들이 모인 즐거움의 공간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오프라인 모임은 줄어들 것이다. 대규모 모임에 대한 거부감은 전통적 예배형태에 압력을 줄 것이다. 사실 젊은이들은 진즉에 기계처럼 동원된 예배형태가 변화되길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욕구는 코로나 이후 폭발할 것이다. 대규모 전도 집회가 연령별, 세대별 전도 집회로 다양화되고 형식이 파괴된 것처럼 예배는 다양한 연령과 문화적 차이가 있는 세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형태로 세분화되고 더 많아져야 한다.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주목하는 작고 따뜻한 모임을 그리워한다. 한정된 목회자원으로는 이 모든 것을 커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신천지는 해내고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모임을 만들고 시간을 투자한다. 달타냥의 구호처럼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이다. 교회의 지도자가 한 영혼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주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무신론의 시대에 위대한 부흥을 기대하며

사회주의 국가였던 나라에 부름받아 선교하면서 한국사회가 진짜 휴머니즘인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정신을 잃어버리고 사회주의자들의 무신론 철학과 감성팔이 휴머니즘에 속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지만 어둠이 깊어지면 빛이 가까운 것이다. 18세기 무신론의 시대에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날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영혼 없는 전문가들이 더이상 교회를 속이지 못하도록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로 돌아가자! 가슴 없는 쾌락주의자들이 우리 자녀들을 더이상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喜怒哀樂(희노애락)이 어우러진 자본주의의 소명을 회복하자! 18세기 가장 어두웠던 과학 만능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영적부흥을 주신 하나님께서 다시 교회에 부흥을 주실줄 기대한다.

고신의 작은 선교사

 
 
※ 본사에 기고된 글은 개인의 의견임으로 본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