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돈'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손에 쥐어지는 사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재화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의미의 돈 보다는 이미 다양한 형태로 변화해버린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고대로부터 계속 이어져 왔다. 이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언제나 있어왔고, 성경을 넘어서 사회 구조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도 새롭게 제시 되었다.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이후에는 계급 투쟁의 관점으로 돈을 이해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관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돈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적 관점에서 고찰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경제에 관한 현대의 체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요, 또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다. 물론 사회주의가 있기는 하지만, 사회주의 자체로의 의미는 잃어버리고 자본주의에 포섭이 되든, 공산주의에 포섭이 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를 대표하는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 둘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자본주의는 돈이 최고의 우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맘모니즘에 빠져 돈의 법칙에 따라 모든 결정을 내린다.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주고, 무한한 경쟁을 하며, 양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언제나 승리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돈에 대한 탐욕은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이 되며,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의 돈에 대한 탐욕을 인정받기 위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제공하는 것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런 도움을 제공하는 것 자체는 귀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형식이 되어 돈에 대한 탐욕을 합리화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산주의도 완벽한 대안은 되지 못한다. '각자에게 그가 일한 만큼',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이라는 원리는 이상적으로 아주 완벽한 주장이다. 이를 위해 사회제도가 바뀐다면 돈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관점 또한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자본가의 탐욕에 짓밟힌 노동자를 구원하고자 등장했지만, 오히려 자본가들보다 더 참혹하게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짓밟아버린다. 이들은 외적인 명분을 찾는다. 자본가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집단을 형성하여 여론을 꾸민다.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이 곧 자신의 삶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돈에 대한 열망이 강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크 엘륄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체제를 지지하기만 하면 내 돈과 내 처신이 한꺼번에 정당화 되는 것"1)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가 놓치는 것이 있다면, 인간 본성의 탐욕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어떤 이상적인 체제를 가져다 준다고 하더라도 그 체제 또한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제도적 접근을 통해 문제를 개선하려고 하지만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에서는 '맘모니즘의 위험성'의 모습으로, 공산주의에서는 '맘모니즘의 위선'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부패성에 대하여 깊은 고찰이 있는 성경적 관점에서만 바른 대안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는 없다. 언제나 그렇듯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악이고 무엇이 차악인가? 정답은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최악은 공산주의요, 차악은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은 권력층의 소수가 모든 돈을 독점하고 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 사람들의 인간성은 말살되고, 돈에 대한 생각을 하기 조차 어렵게 된다. 오직 권력층과 거기에 기생하는 소수만 돈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는 모든 구성원들이 돈에만 혈안이 되어, 오직 돈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여기에서는 그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많은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개선되어야 할 대상이지 전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법과 제도를 통해 인간의 탐욕을 적절하게 통제를 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궁극적으로는 성경적 관점을 통해 돈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진 인간관을 회복시켜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게 된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마저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올려놓지 않는 인간은 누구나 맘모니즘의 우상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아니,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들 또한 맘모니즘의 우상에 빠질 위험에 놓이게 된다. 거기에는 언제나 '위험성'과 '위선'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위험성'과 '위선' 양측을 올바르게 분별해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안목으로 사회 현상을 분석해야 한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에 동조하여 그 이면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만 만족하여 고통당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적인 관점으로 올바르게 사회를 재해석하며, '돈'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각주. 1) 자크 엘륄, 『하나님이냐 돈이냐』, 양명수 역(충남: 대장간, 201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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