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학자 인터뷰, 공공신학자 칼빈을 연구한 김민석 박사

최근에 Stellenbosch 대학교에서 특별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김민석 목사를 지난 12일 경기도 어느 카페에서 만났다. 현재는 Stellenbosch 대학교 신학부와 The Beyers Naudé Centre for Public Theology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 박사에게 평소 궁금했던 공공신학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식사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논문은 뭐 썼어요?”라는 사적 질문을 받을 때 자세하게 설명할 수도 없고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30~40분 설교를 한마디 주제로 말할 수 있어야 하듯이 김 박사님 논문 한마디로 하면 뭡니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한 마디로 제 논문을 표현하자면, 제 논문 제목인 John Calvin as Public Theologian? Reading Calvin's Theology in the Light of Contemporary Discourses in Public Theology with Reference to the Korean Context에서 보이듯이, 칼빈의 신학사상과 그의 제네바 목회를 공공신학적 관점에서 재고한 후 한국 교회 특히 한국 개혁교회에 적용점을 찾아보는 시도입니다.

인터뷰하는 김민석 목사
인터뷰하는 김민석 목사

 

공공신학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 같은 보수적인 신학교 출신들은 솔직한 반감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그러면 우리가 해왔던 신학은 공공신학 아니고 사적 신학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입니다. 용어를 꼭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자님께서 질문하신 이 의문은 제가 공공신학을 전공하기 전에 가졌던 의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저도 보수 교단 출신 목사이고, 정치나 신학적 관점이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에 공공신학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을 때부터 이미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공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이것이 주장하고 추구하는 바는 우리 개혁주의 전통이 그동안 주장하고 추구해왔던 바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공공신학자들 중에서 특히 진보적인공공신학자들이 매우 싫어하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저에게 있어서, 공공신학적 관점들이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역시 발견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수의 공공신학자들이 그 신학적 근거를 아브라함 카이퍼에서 찾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더 거슬러 올라가 종교개혁자 칼빈에게서 그 근거를 찾으려고 시도하였고요.

그렇다면 굳이 공공신학이라는 카테고리를 하나 더 만들어서 새로운 신학으로 주장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개혁 이후로 나타난 현대 신학들이 어떠한 반동에서 나타났다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너무 감정에 치우쳐서 성경이 무시 될 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시작되었고, 반대로 너무 지적탐구에만 치우친 신앙이 유행할 때는 감정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어떠한 새로운 신학적 흐름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결국 그 시대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세기 말 이후 세계 교회의 그리고 최근 한국 교회의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현상은, 교회가 그리고 복음이 공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사적인 영역으로 숨는 듯한 양상에 대해 반응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중세에도 역시 성경 말씀을 보고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올바른 복음을 보여주지 못한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반응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처럼 말입니다. , 공공신학의 목적은 이미 전통적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공공성을 더욱 강조하여 교회로 하여금 공적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개혁주의 전통이 사적 신학을 해왔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공공성을 재발견하자는 운동이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작금의 사회는 교회의 이러한 역할을 기대하는 최적의 상황이 된 것입니다. “공공신학이 아니면 사적신학이라는 말이냐?”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피하고, 공공신학은 복음이 지닌 공적 진리, 공공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꼭 공공신학이라는 용어를 써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저는 아니요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공공신학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신학적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이름일 뿐입니다. 제 논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미 많은 공공신학자 또는 공공신학자로 평가되는 분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거나 또는 일부러 사용하기를 거부하기까지 합니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 있는 교회들과 학자들 그리고 많은 성도들도 - 공공신학의 의미를 모르더라도, 공공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 공공신학자의 삶, 공공신학적 삶을 이미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공공신학이라는 그 용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석 박사
김민석 박사

 

공공신학이라는 말은 소위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이미 오래된 용어입니다. 비전공자들이 볼 때 그분들의 영역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보수신학도들이 공공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도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는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한국에 소개된 공공신학은 그 양에 있어서 매우 부족합니다. 제가 한국에 소개된 한글로 작성된 글들을 거의 모두 읽어보고 가서 지도교수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지도교수님의 첫 마디는 네가 말한 공공신학은 공공신학 전체 스펙트럼 중에 매우 일부분만을 말한 것이다. 네가 가진 사고는 매우 편협하고 편파적이라고 볼 수 있다.”였습니다. 저는 제가 공공신학을 공부하면서 수백 편의 원서와 영어 논문들을 읽어보고 나서야 지도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 한국에서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공공신학에 대한 지식은 매우 적고 좁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한국에 공공신학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한보수교단 목사님께서 공공신학을 비판하셨는데 제가 읽어보니 공공신학을 전혀 모르고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대부분은 공공신학을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과 구분하지 못하십니다.

둘째로, 이 적은 양의 글들마저도 대부분 - 보수신학을 공부하신 분들의 기준으로 보면 - 진보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소개되었으니 더욱 반감이 클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학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과 일치하는 이야기만 소개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보수 신학자가 진보적인 부분을 강조하기 쉽지 않듯이 진보 신학자가 보수적인 부분을 강조하기 쉽지 않은 것이 솔직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보수 신앙인들은 공공신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분의 교단적 배경이나, 그들이 소개한 진보적인 내용으로 인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는 관심이 생기기도 전에 경계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보수신학을 공부하신 분들에게는 공공신학 자체가 의심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공신학은 자유신학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저는 공공신학을 종교개혁자 칼빈과 연결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보수신학자들이 공공신학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공신학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습니다. 보수에서 진보를 아우릅니다. 하지만 한국 보수신학이 공공신학을 터부시한다면, 한국에는 공공신학의 보수적 관점이 전해질 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보수 신학자들이 공공신학의 보수적 관점을 연구하고 보급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공공신학은 이미 확정된 패러다임이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공공신학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 공공신학은 아직도 활화산과 같고, 지금도 형성되고 있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제 논문 2장에서 저는 이것을 공공신학의 애매모호성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만큼 공공신학자들 사이에도 공공신학의 정의에 대해서 합의된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기회, 즉 공공신학의 보수적인 관점을 주장할 수 있는 그래서 어느 정도의 지분(?)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세계 공공신학은 특히 한국에서의 공공신학은 아마 진보적인 색채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제 논문이 이러한 부분에 기여를 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공공신학자들이 좋은 평가를 해 준 것 같습니다. 공공신학자들은 대체로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는 듯 보입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보수 교단 신학교에서 - 프린스턴 대학교의 Abraham Kuyper Center for Public Theology 와 같은 - 공공신학 센터를 세워서, 한국을 대표하는 공공신학 센터로 자리매김하고, 세계 공공신학회에서 한국적, 개혁주의적 공공신학을 활발하게 소개하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교들에서 신학적인 갈등이 많이 일어납니다. “보수적인 신학교에 자리 잡은 교수들이 보수신학을 하고 있는 게 맞냐?”의심을 하는 분들이 보입니다. 칼빈 선생이 이런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름다운 보수신학을 지키고 후대에 전하려고 하는 목사님들의 염려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저도 보수신학교가 보수신학의 장점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보수의 가치는 그저 외부로부터 귀를 닫는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외부 목소리와 비견될 때, 보수신학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보수신학교에서도 현대의 신학적 흐름을 꿰뚫고 있는 실력자들이 기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보신학을 답습하고 동의하여 주장하는 것과 진보신학을 비교 대조하면서 소개하며 보수신학의 정수를 더욱 발견하도록 돕는 것은 다르며, 후자가 실력 있는 후세대를 양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개방적일 필요도 없지만, 지나치게 수비적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 개혁신학이 가진 장점은 그 어느 신학보다 뛰어나고, 개혁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은 진보신학을 통해 개혁신학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지 개혁신학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우리의 현 위치를 제대로 볼 필요는 있습니다. 저는 진보신학이 이런 거울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경계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에게서 그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성경적이면서 동시에 시대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신학자이자,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성경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조언을 하기 위해 고민했던 목회자인 칼빈의 신학사상과 제네바 목회를 연구하면서 그 한계를 설정하면 신학교들의 염려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Beyers Naudé Centre for Public Theology University of Stellenbosch/ 세미나 현장
Beyers Naudé Centre for Public Theology University of Stellenbosch/ 세미나 현장

 

  이번에 독일에서 김 박사님의 논문을 출판한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끝으로 김 박사님의 학문적 소망 혹은 비전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세요.

독일의 LIT 출판사에서 공공신학 시리즈인 Theology in the Public Square를 출판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11권이 출판되었는데, 그중에 절반 정도는 콘퍼런스에서 발표된 학자들의 글을 모아 출판한 것이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각각 한 명의 신학자가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이 시리즈에 기고하는 학자들은 공공신학계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며, 세계의 곳곳에서 공공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비중 있게 읽어보는 시리즈입니다.

감사하게도 제 학위 논문을 이 시리즈 중에 한 권으로 출판하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작품들 중에 제 논문이 포함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면서도 매우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저를 통해 한국적 또는 보수 개혁주의적인 공공신학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기회가 된다면, 세계 공공신학계에서 좀 더 보수적인 접근을 하는 공공신학을 주장하고 설득해 보고 싶습니다.

국내에서의 제 희망은 먼저 세계의 다양한 공공신학들을 풍부하게 소개하여 공공신학에 대한 지식을 최대한 제공하는 것이고, 좀 더 바란다면 공공신학의 보수적 측면을 보수 교단 신학생 또는 목회자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공공신학은 원래 매우 실천적 신학입니다. 따라서 공공신학이 신학교에서 교육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 목회 현장에서 고민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소개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혹시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불러주신다면 그분들에게 공공신학을 소개하고, 그들의 현장의 고민들을 들어서 다시 연구결과를 내놓는 선순환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