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공동체 세우기 시리즈/ 2

“식구가 머여?”


이 황량한 땅에서 배고픈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 그분이 베푸신
음식을 함께 먹는다. 바로 여기, 바로 지금 잠시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의 다가올 세상을 보여 주는 광경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자 표지판이다. 우리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다.

우리의 식사는 장래에 있을 메시아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일이다.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보여 주는 일이다.“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 팀 체스터,

 

정복기 목사 (현 서울시민교회 부목사/ 전 향상교회 전도사, 한국기독학생회(IVF) 전임간사-고신의대사역,  학사 46기 포병장교)
정복기 목사 (현 서울시민교회 부목사/ 전 향상교회 전도사, 한국기독학생회(IVF) 전임간사-고신의대사역,  학사 46기 포병장교)


!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밥맛이 없을 때가 있다. 실제로 끼니를 때우기 위해 억지로 먹는 경우도 종종 있다. 밥을 먹지만 어쩔 수 없이 먹었던 맛없는 밥을 기억하는가? 한번은 예비군 동원 훈련에 참석한 적이 있다. 어딘가 처박아 두었던 군복과 전투화를 겨우 끄집어내어 훈련장으로 간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무언가 힘이 없고 영혼이 없는 듯한 좀비들의 집합소 같다. 아는 사람도 없다. 다들 억지로 의무 시간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모인 이유다. 오전 교육과 훈련 일정이 마치면 점심을 먹는다. 내 생각에 이때 먹은 점심이 가장 맛없었던 것 같다. 훈련장 주변에 그냥 엉덩이를 깔고 앉아 도시락 같은 걸 먹는다.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그냥 적당히 배를 채우기 위한 정도로만 먹고 만다. 밥을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배만 채우고 목숨을 연장하는 정도의 차원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밥은 식구로 이어지고 공동체로 나아가게 하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다. 3개의 영화를 살펴보며 밥이 내포하는 공동체적 의미를 살펴보자.

영화 친구2에서 장동건의 아들 김우빈에게 유오성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행님 동생이 와 생기노? ! 피도 한 방울 안 섞인 새끼들이 행님 동생하며 뭉치 댕기노 말이다.” “같이 배고프고! 같이 도망댕기고! 같이 죽을뻔하고! 그래야 형님 동생 식구가 되는기다, 밥이 없어 함께 배고프기도 하고 함께 한 식탁에 둘러앉아 먹는 은 배우를 채우는 그 이상의 공동체적 의미를 가진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도 에 대한 명대사가 있다. 하루는 최민식이 경찰서에 수갑을 차고 들어가게 된다. 그 때 한 경찰의 뺨을 후리며 이런 말을 한다.”어디서 손을 함부로 놀리노! 느그 서장 어딨어! 강서장 데꼬와!“ 그 때 다른 한 경찰이 중재를 하며 실례지만 저희 서장님과 관계가...?“하고 묻는다. 그러자 최민식은 니 내 누군지 아나? 너그 서장 남천동 살제? 내가 인마 너거 서장이랑 어저께도 같이 밥 묵고! 사우나도 가고! 다했으!“ 최민식은 서장과 밥 먹는 사이를 강조하면서 그 특별한 관계를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다신 한번 말하지만 밥은 단순히 배를 채우고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에 불과하지 않다. ‘에 대한 최고의 명대사는 영화 비열한 거리의 주인공 조인성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식구가 뭐여? 같이 밥 먹는 입구녕이여, 그런 식구를 배반한 새끼는 호로새끼여!” 식탁이든, 밥상이든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배를 채우는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내포한다. 만약 함께 굶어야 했던 어려운 지난 시절을 공유했던 사람들에게 밥을 함께 먹는 다는 것은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함께 밥 먹는 사이! 함께 밥 먹는 자리에 초대받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 밥은 우리를 식구로 연결하고 공동체로 초대하는 매개체자 선물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밥상을 중심으로 모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6) 초대 교회 공동체는 주로 집에서 모였다. 집에 모인 사람들은 밥상을 중심으로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사도 시대 교회들의 모임은 다름 아니라 바로 밥상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혼밥과 삼시세끼 예능의 출현이 주는 의미

지난 2013혼밥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그 이후로 혼술, 혼라이프등 혼자 하는 행위들을 특징짓는 수많은 유사 단어가 만들어졌다. 1인가구가 점차 늘어나는 시대와 맞물려 혼밥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이 되어간다. 거기다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 글을 쓰는 지금 5인 이상 모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카페에 마주 않자 커피를 마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식당에서 5명 이상 둘러 앉아 밥도 못 먹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심지어 식사 전까지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며 대화를 지양하는 것이 사회적 미덕으로 간주되고 있다. 밥이나 커피를 매개체로 함께 모이고 대화하며 가족 됨을 누리고 공동체 모임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운동하고 혼자 사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겨 오는 모든 세대에 권장할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애청하는 TV 프로그램 중 하나가 MBN나는 자연인이다란 휴먼 다큐다. 깊은 산중이나 외딴 섬에 혼자 살고있는 사람을 개그맨 이승균과 윤택이 찾아가 자연인의 삶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방송에 등장하는 자연인은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첩첩산중에 홀로 살고 있다. 혼자 산속을 누비며 버섯을 채취하고 산삼을 캔다. 혼자 살아가기에 수염을 깎을 일도, 머리를 자를 일도 없다. 계절을 벗 삼아 자연에 적응한 채 혼자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되어 있다. 하지만 개그맨 이승윤과 윤택이 찾아가면 자연인들이 그렇게 좋아한다. 그동안 모아 둔 좋은 버섯과 귀한 산삼을 기꺼이 내어준다. 산속에서 애지중지하며 키운 닭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며 대화하는 중에 숨겨둔 마음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훔치는 경우가 많다. 자연인도 결국엔 함께 밥 먹고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나도 언젠가 산속에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면 좋겠다는 로망이 있다. 하지만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면서 대리만족도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니구나란 생각을 더욱 하게 된다. 한동안 전 국민의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1988”이란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 봉황당 골목이 배경이 되어 다섯 명의 친구들과 다섯 가족의 따뜻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 지붕 세 가족의 느낌을 물씬 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향수를 자아냈다. 이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은 한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 먹는 모습이다. 나도 이 드라마를 보면서 아무리 바빠도 밥은 함께 먹기 위해 시간을 맞추고 반찬 싸움을 했던 지난 과거가 떠올라 가슴 뭉클했었다. 이뿐 아니라 최근에 밥과 식탁을 중심으로 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삼시세끼, 한끼줍쇼, 강식당 등 이러한 예능 프로그램은 혼밥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필요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지 모르겠다. 식탁을 중심으로 마주 앉아 대화할 사람이 필요한 그들에게 대리만족을 준다.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만들어 먹는 과정 속에 관계가 형성되고 대화가 이뤄지는 모습은 이런저런 이유로 혼밥을 하는 많은 이들의 허전함을 메꿔주고 있다.

Photo by Ali Inay on Unsplash  사진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y3aP9oo9Pjc?utm_source=unsplash&utm_medium=referral&utm_content=creditShare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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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밥상 공동체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의 저자 팀 체스터는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늘 식사하러 가거나 식사 중이거나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중이셨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은 밥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죄인”(누가복음 5:30) 취급받던 자들과 먹고 마신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수님의 밥상에 초대받은 자들은 세리들, 군인들이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던 자들이 예수님의 밥상에 모여들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의 밥상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게 되었다. 예수님이 차리신 밥상에는 구원이 있었고 그 밥상은 곧 공동체가 되었다. 그 밥상 공동체를 중심으로 예수님은 당신 많은 자들을 환대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선교의 장으로 사용하셨다. 우리도 밥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담아내고 드러낼 수 있다. 밥상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까지 나는 교회 순장들과 늘 밥상을 중심으로 모였고 교제했다. IVF 간사 시절 부산교대 리더 모임을 늘 우리 집에서 가졌다. 리더들이 오기 전 나는 장을 보았고 음식을 준비했다. 리더들을 생각하며 장을 보고 레시피를 연구하며 요리하는 것은 내 사역의 일부였다. 리더들이 수업을 마치고 밥상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한다. 그때부터 밥상 공동체는 서로의 마음을 읽고 서로를 위로한다. 우리에게 밥 먹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밥은 우리를 한 가족으로 하나님 나라의 한 공동체로 이어주고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었다.

우리 주변의 어떤 이웃들을 초대할 것인가? 밥상에서 우리는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 정말로 밥상 공동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밥 한 끼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지 우리는 예상 할 수 없지만, 예수님처럼 우리도 밥상 공동체를 통해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 나라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혼밥 시대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야 하는 지금 이 시점에 밥상 공동체 이야기는 한편으론 너무 비현실적이고 요원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내 집을 오픈하는 것을 너무 불편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 특별히 어느 때보다 빈부격차가 심하여 각자의 경제 사정이 훤히 드러나는데 누군가를 내 집에 초대하고 밥상 공동체를 만들 생각조차 하기 싫다. 하지만 팀체스터의 말처럼 이 황량한 땅에서 배고픈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 그분이 베푸신 음식을 함께 먹는다. 바로 여기, 바로 지금 잠시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의 다가올 세상을 보여 주는 광경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자 표지판이다. 우리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다. 우리의 식사는 장래에 있을 메시아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일이다.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보여 주는 일이다.”라고 할 때 여전히 혼밥이 아니라 밥상 공동체가 대안이라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 그 나라의 파뤼가 나와 우리의 밥상에서 매일 신나게 벌어지는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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